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49화 (149/315)

149화

새학기의 시작

해외의 유학생들을 인턴으로 채용한다는 것이, 사실 기업 입장에서 단기적인 이득을 볼 수 있는 프로젝트는 아니다.

유학생들의 디자인 실력을 떠나 외국인들을 채용하여 일을 시키는 것은, 내국인 직원들과 일하는 것보다 능률이 나쁠 수밖에 없었으니까.

의사소통이야 한국으로 유학 온 학생들인 만큼 아주 어렵지는 않겠지만, 해외의 경우 기업문화도 한국과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진이 윤 교수에게 이런 프로젝트를 제안한 이유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WJ 스튜디오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고 싶다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글로벌 기업이라는 것은, 돈이 많고 회사 규모가 커진다고 그렇게 한순간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해외 법인만 만든다고 사람들이 글로벌 기업이라고 불러주지는 않으니까.

해외 문화와의 접점을 지속적으로 만들어주면서, 한국과는 다른 관점과 문화들을 이해하고 그 안으로 기업이 자연스레 녹아 들어가야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학교라는 창구를 통하여 해외 유학생들을 인턴으로 채용하려는 것은, 이 모든 과정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는 것.

게다가 앞으로 WJ 스튜디오가 더 유명해지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면, 유럽이나 미국의 뛰어난 건축디자이너들을 자연스레 인턴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테니.

장기적인 관점에서 WJ 스튜디오의 성장을 빌드 업 하기 위한, 하나의 포석 같은 개념인 것이다.

그리고 윤치형 교수는 우진의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노라 하였다.

“가능성이 아주 없는 제안은 아니니……. 한번 총장님께 말씀드려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교수님.”

“너무 큰 기대는 마라. 그리고 만약 성사 되더라도, 실질적으로 시행되려면 최소 일 년은 더 걸릴 거야.”

“그거야 당연하죠.”

윤치형 또한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

비록 유럽이나 미국의 탑 클래스 스튜디오들에는 못할지언정, 국내에도 유명 디자인 스튜디오들은 존재했으니.

해외에서 들어온 유학생들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이것이 선순환으로 잘 굴러가기 시작하면 K대의 입장에서도 인지도를 크게 높일 수 있을 테니, 여러 가지로 윈-윈일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럼…… 브루노와 이야기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우진아.”

“별 말씀을요.”

“하지만 학점은 이거랑 별개인 것 알지?”

“넵?”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이번 학기에도 내 수업시간에 잠만 자면 학점은 얄짤 없을 줄 알아.”

“으……. 알겠어요…….”

윤치형 교수와의 이야기를 마친 우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과 사무실에서 나왔다.

건축디자인 원론에 관련된 수업인 윤 교수의 수업은, 전공과목 중에서도 가장 졸린(?) 수업이었으니 말이다.

“분명 내용은 좋은데……. 졸린 걸 어떡하라고.”

하지만 뚱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과 달리, 우진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오늘 윤 교수와 대화하는 동안 머릿속으로 그려본 WJ 스튜디오의 청사진이, 꽤나 멋진 것이었으니까.

‘흐흐.’

물론 해외의 유학생들이 매력을 느낄 스튜디오 중에 우진의 WJ 스튜디오가 포함되려면, 갈 길은 한참 멀었다.

국내에서야 <우리 집에 왜 왔니>의 유명세 때문에 WJ 스튜디오의 인지도가 많이 뻥튀기된 상황이었지만.

그것이 유학생들에게까지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인지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이번 왕십리 패러필드에 지어질 파빌리온을, 반드시 멋지게 해 내리라 또 한 번 다짐하였다.

우진의 생각은 이렇게 머릿속에서 돌고 돌았다.

이렇게 그가 진행 중인 모든 일들은, 결국 시너지를 내며 그를 더 높은 곳까지 끌어 올려줄 프로젝트들이었다.

‘<우리 집에 왜 왔니>가, 해외에도 수출이 되면……. 글로벌 인지도도 올라가려나?’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던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디자인학부 건물에서 나왔다.

이제 교양수업 시작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그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무려 공학관 건물로 가야 했다.

저벅- 저벅-

교정에서 걸음을 옮기는 우진의 곁으로, 시원한 3월의 봄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휘유, 바람 시원하고 좋네.”

이어서 도착한 공학관의 앞에는, 우진과 함께 자연과학(?)을 탐구하기 위해 먼저 도착해 있던 소연이 있었다.

“디공디는 잘 듣고 왔어?”

소연의 물음에, 우진은 엉뚱한 대답을 했다.

“밥이나 먹으러 갈래?”

어이없는 표정이 된 소연이 반문하였다.

“뭐? 수업은?”

하지만 다음 순간.

“이번 주는 정정 기간이잖아.”

꽤 합리적인 우진의 대답에, 소연의 두 동공이 살짝 흔들린다.

“그, 그렇기는 한데…….”

망설이는 그녀의 팔을 우진이 잡아끌었다.

“후문 쪽에 새로 생긴 국밥집 맛있다더라.”

“아재같이 국밥?”

“뭐래. 네 취향을 가장 많이 고려한 제안이었는데.”

“칫.”

“그래서, 안 먹어? 나 혼자 감?”

“아니. 가자. 사실 나도 어딘 줄 알아. 거기 순대국 맛있더라.”

“…….”

그렇게 우진의 2학년 첫날은, 자연스런 자체휴강과 함께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 * *

재엽은 요즘 들어 조금 무료함을 느끼고 있었다.

무료하다는 게 바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한창 높은 주가를 올리고 있는 재엽에게, 일이 끊일 리는 없었으니까.

다만 그가 무료한 이유는, 뭔가 특별하고 신선한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의외성 없는 일상의 연속이랄까?

그것은 지금 재엽의 앞에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수하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수하야, 요즘 뭐 재밌는 거 없냐?”

“그런 게 어딨겠어. 뻔히 아는 사람이 왜 이런담.”

“뭔가 예상치 못한 일 같은 거. 그런 게 좀 있어 줘야, 사는 맛이 나는데 말이지.”

“이 오빠가 또, 배부른 소리 하네.”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커피숍은, 가로수길에 있는 리아의 카페 프레스코 매장이었다.

카페 주인장인 리아는 일정 때문에 회동에 나오지 못했지만, 다들 워낙 바쁜 사람들이다 보니 시간 맞는 사람들끼리 잠깐씩이라도 만난 것이다.

재엽은 마침 오늘 집에 있는 날이었고, 수하는 압구정에서 광고 촬영이 있던 날이었기에.

가까운 신사동에서 만날 수 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연말까지만 해도 재밌는 일 좀 있었는데.”

“하긴. 크리스마스 파티 때도 꽤 재밌었고.”

리아의 카페 프레스코는 여전히 인산인해였지만, 루프탑에 항상 비워두는 자리가 있었다.

리아가 중요한 미팅이 있거나 친한 지인들이 방문했을 때 사용하기 위해, 어지간하면 비워놓는 곳이 있었던 것이다.

재밌는 것은, 그 자리의 가장 큰 수혜자가 석현과 제이든이 되었다는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나도 이 동네로 이사 오고 싶다.”

“확실히 강남이 살기는 좋지.”

“맞아. 리아가 만들어놓은 아지트도 있고.”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너도 청담 써밋 청약 넣으라니까?”

“나 이제 통장 없어 오빠. 마포 프레스티지 지난번에 계약했다고 했잖아.”

“아, 맞다. 그랬지.”

커피를 한 모금 쪽 빨아들인 재엽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미분양 기다렸다가 하나 계약해. 리아도 계약한다고 했어.”

수하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리아는 부자잖아.”

“너도 요즘 잘나가는 거 다 알거든? 오늘 찍은 광고도 화장품광고 아니야?”

“히히, 그렇긴 해.”

입이 쭉 찢어져서는 헤헤 웃는 수하를 보며, 재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재엽이 볼 때 수하는, 가능성이 정말 무한한 배우였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이후로 인기가 엄청나게 치솟기도 했지만, 그것이 이제 시작이라고 느껴질 만큼 말이다.

‘캐릭터 자체가 매력 있는 친구이기도 하지만……. 진짜 연기력이 끝내주니까.’

일전에 우연히 촬영현장에서 그녀가 연기하는 모습을 본 적 있었는데, 그때 재엽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었다.

카메라 워킹이나 사운드 등으로 인한 포장이 전혀 되지 않은 날것임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을 보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자신이나 리아를 부러워하는 수하를 볼 때면, 재엽은 가끔 꿀밤을 한 대씩 때려주고 싶었다.

왠지 몇 년만 지나면, 재엽이 거꾸로 수하를 부러워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

“그거 광고 찍고 번 돈으로 계약 가자 임수하.”

“그거로 계약금이나 간신히 되겠다. 무슨 30평대 분양가가 13억이 넘는다며?”

“어차피 중도금은 대출이잖아.”

“잔금은 어떻게 내라고.”

“그때까지 벌면 되지. 아니면 잔금 칠 때쯤, 마포 집을 팔던가.”

“응? 그런 방법이 있었네?”

집 얘기부터 시작해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우리 집에 왜 왔니> 촬영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얘기들을 하였다.

두 사람 모두 딱히 저녁 일정이 없었으니, 오랜만에 꽤 오래도록 한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남아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것 또한 당연히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까.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서우진 이놈은 연예인이야 진짜.”

“스케쥴 말하는 거지?”

“너나 나보다 더 바쁜 것 같지 않아?”

“그러니까. 노인네들 힘들게 기다리게 하고 말야.”

“아까 좀 더 일찍 오라고 그랬더니, 개강해서 바쁜 걸 어쩌냐고 하는데……. 순간 당황해서 말문이 막혀버렸다니까?”

“푸핫, 크크크. 맞네. 그러고 보니 오늘, 3월 첫 주 월요일이네.”

오늘 두 사람은 우진이 오면 가볍게 술이나 한잔 하기로 약속한 상황이었다.

카페 벽에 걸려있는 시계가 7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으니, 우진도 슬슬 올 때가 되었다.

“디저트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되겠지 오빠?”

“케잌 너 혼자 다 먹어놓고. 이제와서?”

“한 조각 더 시킬까, 잠깐 고민했거든.”

“참아라. 술 마실 배는 남겨놔야지.”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 즈음.

우진이 도착하기 전, 갑자기 재엽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위이이잉-!

석재로 제작된 탁자의 위에 놓여 있어서 그런지 진동 소리는 무척이나 요란하였고, 화들짝 놀란 재엽은 전화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우진이 오면 일어날 준비 하고 있어.”

“그래. 천천히 다녀와 오빠.”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로, 루프탑의 구석진 곳으로 걸어 나가는 재엽.

그리고 그렇게 한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우진이 도착하기 전 먼저 전화를 끊은 재엽이, 조금 미묘한 표정이 되어 자리로 돌아왔다.

“오빠, 왜. 무슨 일 있어?”

수하의 물음에 재엽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쇼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말이 좀 씨가 된 것 같은데?”

“뭐가?”

“아까 내가 그랬잖아. 예상치 못한 일이 좀 일어나줬으면 좋겠다고.”

조금 당황한 수하가 말을 살짝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 그랬지.”

“방금 전화 엄마한테 온 건데, 문제가 좀 생겼다네.”

“응?”

“그 내가 엄마한테 산 청담 써밋 말이야.”

“……?”

“엄마가 놀라서 전화 오셨어.”

꽤나 심각한 재엽의 표정에 수하는 걱정스런 표정이 되었다.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재엽이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덜컹-

뒤늦게 도착한 우진이,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뭐야. 이거, 분위기 왜 이래?”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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