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Passion for design
수업이 끝났다.
그리고 제이든은 우울했다.
“Bloody Hell!”
“제이든, 너 오늘 그 말만 몇 번짼지 알아?”
“Holy!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정확히 25번째야.”
“정말 그렇게 많이 했다고?”
“사실 거짓말이야. 나도 세어 보진 않았어.”
“젠장.”
가방을 챙겨 컴퓨터실을 나오는 선빈과 제이든.
먼저 나와 있던 우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제이든이 왜 저러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제이든, 오늘 그래도 알리아스 꽤 잘하던데. 왜 그렇게 울상이야?”
“후. 우진은 제이든의 진짜 실력을 몰라.”
“오늘은 가짜 실력이었어?”
“물론. 사실 제이든은 모든 걸 다 알지만, 모른척한 것뿐이지.”
“왜?”
“다른 학생들이 충격받을까 봐 걱정됐거든.”
“엄청난 배려심이네.”
“당연하지. 제이든은 관대하거든.”
며칠 전에 석현에게서 관대하다는 말을 배운 제이든은, 요즘 이 단어에 꽤나 꽂혀 있었다.
거의 모든 대화의 마무리에서 자신의 관대함을 어필할 정도.
그런데 항상 그러한 어필 뒤에는 건방진 표정을 짓던 그였건만.
오늘은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일 뿐이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눈이 핑 돌아갈 정도로 어려웠던 수업 때문이었다.
“너무 우울해 하지 마 제이든.”
“제이든은 우울하지 않아.”
“오늘 수업 중 과제도 네가 가장 먼저 끝냈잖아?”
“칭찬은 우진이 받았지.”
“지금 내 실력이 더 뛰어난 걸 인정한 거야?”
“Holy! 말이 헛 나왔어. 필요 이상으로 관대한 말을 해버렸군.”
“자꾸 한글의 의미를 네 멋대로 바꿔 쓰지 마, 제이든.”
여느 때처럼 실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며 컴퓨터 실기실을 나온 우진과 제이든은, 선빈까지 대동하여 오랜만에 교내 카페에 왔다.
우울해하는 제이든에게 핫초코를 한 잔 사준 우진은, 빨대를 쪽쪽 빠는 제이든을 보며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제이든 스스로는 엄청 아쉬워하고 있었지만, 우진이 보기에 사실 오늘 가장 수업을 잘 따라간 능력자는 제이든이었다.
사실 알리아스라는 프로그램이 라이노보다 좀 더 예민하고 난이도 높은 프로그램이기는 했지만 큰 틀에서의 모델링 방식 자체는 비슷한 면이 많은 툴이었고.
때문에 당연히 라이노를 선행 학습한 제이든이 우진을 비롯한 다른 학생들보다 이해가 빨랐던 것이다.
단지 더 대단한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시키지도 않은 짓(?)들을 하다가, 교수님께 핀잔을 들었을 뿐이었다.
‘대체 이렇게 단순한 놈이, 어떻게 머리는 좋을 수 있는 거지?’
일 년을 알고 지냈음에도 아직 불가사의한 존재인 제이든.
“다음 주에 대단한 걸 보여주면 되잖아, 제이든. 다음 수업 땐 관대할 필요 없어. 알겠지?”
“후우……. 우진. 그 말, 후회하게 될 거야.”
그에게 약간의 위로(?)를 남긴 뒤 먼저 카페에서 일어선 우진은, 다시 학과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음 수업까지는 아직 두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그 사이에 과 사무실 건물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었으니 말이다.
우진과 약속이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윤치형 교수였다.
“조교님, 교수님 아직 안 오셨죠?”
“아, 우진이 왔냐. 방금 연락받았다. 금방 오실 거야. 들어가 앉아 있어.”
“네, 형. 고마워요.”
과 사무실 안쪽의 접견실에 들어가자, 조교가 미리 세팅해 놓은 커피가 눈에 들어왔다.
자리에 앉은 우진은 그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고.
“으……써.”
우진이 집어 든 커피잔을 다시 내려놓기도 전에, 윤치형 교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좀 늦었나?”
* * *
윤치형 교수가 우진을 보자고 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산학협력과 관련해서 조율해야 하는 일체의 이슈들 때문이었다.
“자, 서 대표. 이 서류대로 진행해도 되는 거지 그럼?”
“그렇습니다, 교수님.”
“그나저나 대표님 월급이 너무 짜서 어쩌나?”
“하하, 아닙니다. 저야 사실 따로 하는 일도 없는데,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죠…….”
K대학교의 산학협력 시스템은, 해당 프로젝트를 통해 업체에서 고용한 학생의 월급 대부분을 학교에서 지원해 주도록 되어 있었다.
학교는 업체를 통해 학생이 실무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고.
업체는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월급을 통해 비용을 최소화하여 인턴을 고용할 수 있는 개념인 것이다.
어찌 됐든 우진도 이 시스템 내에서 학점을 받아가는 것이었으니,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지원금을 받는 것.
해서 오늘 우진이 과 사무실에서 한 것은, 이 비용을 조율하는 것부터 해서 구체적인 서류 데이터의 픽스라고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학교에서 우진에게 지원해주기로 한 액수는 월 70만 원 정도였는데, 우진의 입장에서는 진짜 학교에서 용돈이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6학점 대신 받는 돈이라고 생각하면, 사실 공돈은 아니긴 하지. 그래도 거저 생긴 돈 같아서 기분은 좋지만 말이야.’
하지만 이 일련의 과정들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는 얘기가 되어있던 부분이었고, 마지막 확인 작업 정도였으니 말이다.
때문에 오늘 만남의 진짜 이유는 조금 다른 부분에 있었다.
그래서 서류 정리가 끝나고 난 뒤에도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고.
윤 교수가 먼저 그 본론에 대한 운을 떼었다.
“일단 얘기 시작하기 전에, 고맙다는 인사부터 먼저 하고 싶구나.”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교수님.”
“우진이 네 덕에, 이 산학협력 사업이 탄력 많이 받았거든.”
잠시 의아한 표정이 됐던 우진은, 곧 무슨 말인지 알아채고는 반문했다.
“브루노……. 말씀이신 거죠?”
“그래. 크게 관심 없던 네 선배들도, 브루노의 스튜디오까지 협약체결이 됐다고 하니까 다들 과 사무실 전화기에 불이 나도록 전화하더라.”
“하하. 확실히 브루노의 스튜디오에서 인턴을 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인 선택지니까요.”
윤 교수는 브루노와 연결해 준 우진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브루노의 스튜디오와 관련된 얘기들을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윤 교수가 이 얘기를 먼저 꺼낸 이유는, 당연히 이것이 본론과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에 있는 브루노의 스튜디오는, 별개의 국내 법인인 이라는 거지? 브루노 입장에서는 해외 법인인 셈이겠군.”
“그렇습니다, 교수님. 사업자 이름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더구나.”
“스페인에 있는 브루노의 설계사무소 본사의 상호는, TRA스튜디오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아.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물어봤지.”
정확히는 브루노와 관련해서, 우진에게 부탁하고 싶은 부분이 하나 있는 윤치형이었다.
“지금부터 내 이야기는 사실 대외비인데…….”
“말씀하세요, 교수님. 저 입 무겁습니다.”
“하하, 그래. 다름이 아니고 이번 산학협력 참여도가 높아서 그런지, 총장님께서 새로운 프로젝트의 기획안을 추가로 지시하셨거든.”
“기획……안이요?”
생각지 못했던 윤치형의 얘기에, 우진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래. 새로운 기획안.”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 윤치형이, 커피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우진이 너, 우리 학교에 교환학생 시스템 있는 거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감이 좀 올지 모르겠는데……. 그것과 산학협력 프로젝트를 콜라보하는 개념의 신규 프로젝트야.”
“네에……?”
“으음.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해외에서 진행될 산학협력이라고 해야 하나?”
우진은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편이었고.
그래서 윤치형의 이 몇 마디를 들은 순간, 그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오호……! 이게 진짜로 될 수만 있다면, 해외 스튜디오에서 인턴경력을 쌓을 수도 있는 거잖아?’
윤치형 교수가 이야기하는 신규 프로젝트란 바로, 이미 있는 교환학생 시스템에 산학협력의 장점을 덧붙이는 것.
K대는 이미 해외의 유명한 디자인학교와의 교환학생도 몇 년째 진행 중이었는데.
만약 현지의 기업들과 커넥션만 만들 수 있다면, 교환학생으로 가 있는 국가에서도 산학협력을 진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미 친분이 있는 해외 디자인학교에 현지 법인을 소개받을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유명한 디자인 스튜디오를 그런 식으로 소개받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아무리 현지 회사라고 한들 어중이떠중이 회사에 K대학생들을 인턴으로 보내는 것도 득 될 것이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와중에 우진과 직접적인 친분이 있는 브루노의 현지 스튜디오는, 윤치형의 입장에서 너무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선택지였다.
만약 브루노가 현지 산학협력도 흔쾌히 수용하여 스페인 교환학생 시스템과의 콜라보가 성공적으로 결정된다면.
실질적으로 학생들에게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될 것임은 물론, K대 디자인학부의 위상도 크게 상승할 수 있을 테니까.
특히 윤치형 교수가 학과장으로 있는 공간디자인과는 더더욱 그렇고 말이다.
“브루노의 현지 법인과 연결을 바라시는 거죠?”
본격적인 설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우진이 입을 열자, 윤치형 교수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그, 그렇지.”
“뭐……. 다음 미팅 때 이야기야 충분히 해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잠시 당황했던 윤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이 프로젝트를 당장 진행하자는 건 아니야. 국내 산학협력도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 않은 시점에서 스페인 현지 법인에 대한 얘기까지 꺼내는 건……. 브루노의 입장에서도 당황스러울 수 있을 테지.”
“그렇습니다.”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윤 교수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이런 느낌으로 생각하고 있어.”
“말씀하세요.”
“이번 학기 산학협력이 어느 정도 진행된 이후에, 슬쩍 운을 한번 띄워보려는 거지.”
“음…….”
“만약 브루노가 인턴으로 일한 우리 학교 학생들이 마음에 드는 상황이라면, 해외 법인에 대한 이야기도 좀 더 쉽게 꺼낼 수 있지 않을까?”
윤치형의 이야기는, 결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
애초에 K대의 첫인상이 우진과 제이든, 그리고 소연이었던 브루노는 K대학교에 대해 아주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제이든과 소연을 포함해 이번에 브루노의 스튜디오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된 다섯 명 또한 다들 출중한 실력을 가진 학생들이었으니.
우진이 말만 잘한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 우진은, 이 얘기를 듣자마자 고개를 바로 끄덕일 수도 있었다.
태생이 영국인인 제이든은 몰라도 소연이나 선빈 같은 평범한 학생들의 경우, 이 프로젝트가 성사된다면 훨씬 더 많은 기회가 열리게 되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우진 또한 자신의 동기들이 더 훌륭한 디자이너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기꺼이 도움을 주고 싶은 게 당연한 것.
하지만 우진은 그러지 않았고.
거기에는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순간에도 우진의 사업 머리가 본능적으로 돌아간 것이다.
“충분히 가능하긴 할 것 같습니다, 교수님.”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요, 교수님.”
윤치형 교수를 마주 본 우진은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잠시 후,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역으로 현지 학교에도 제안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뭐……?”
“현지에서 이쪽으로 오는 교환학생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 학생들에게도, 한번 산학협력을 제안해 보는 겁니다.”
“……!”
“이를테면 WJ 스튜디오라던가….괜찮은 회사들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
우진의 능글맞은 목소리를 듣던 윤치형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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