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Passion for design
언제나 그랬듯, 2011년의 2월도 빠르게 지나갔다.
회귀한 뒤로는 전생에서보다 몇 배 이상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느낌.
그래서 한 번씩 우진은, 이게 회귀의 부작용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도 했었다.
당연히 진짜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후, 벌써 개강이라니.”
학교 주차장에 차를 댄 우진은 학과 건물로 향했다.
발걸음은 가벼웠다.
오히려 작년 말보다 회사 업무량도 많이 줄었고, 올해는 더 열정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목적도 강했으니 말이다.
특히나 학기 첫날부터 조운찬 교수의 수업이 있었으니, 수업이 부담되기는커녕 기대 가득할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우진에게 부담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찾아왔다.
“우와……! 서우진이다!”
“야, 이제 우리 선배님인데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헉! 맞다. 설마 들으신 건 아니겠지.”
“이 거리에서 안 들렸겠냐?”
“으, 괜찮아. 우리 과 선배는 아니니까.”
막 개강한 디자인학부 건물에는 많은 학생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우진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와……. 근데 실제로 보니까 신기하다. 연예인 보는 것 같아.”
“서우진 선배 정도면 연예인 맞지 뭐. 저 선배 때문에 우리 학교 원서 썼다는 애도 봤는데?”
“응……?”
“아, 팬심 때문은 아닐걸?”
“그럼?”
“롤 모델이라던데? 저렇게 어린 나이에 성공한 디자이너도 찾기 힘들잖아.”
“아하.”
대놓고 사인을 해달라거나 아는 척을 하는 사람들은 다행히 아직 없었지만,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리는 것만으로도 아주 부담스러운 우진이었다.
‘크흠. 팬심일수도 있지. 아닐 건 또 뭐야?’
모르는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본다는 건, 우진에게도 아직 많이 생소하고 묘한 느낌이었다.
유명해졌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관심들이 부담되기도 하는 것.
게다가 우진을 선배라고 부를 신입생들이 생겼다는 것도, 묘한 기분이 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드르륵-
컴퓨터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도착해서 자리를 세팅해 둔 제이든의 모습이 보인다.
그의 옆에서 신이 나서 떠들고 있는 또 다른 멀대는 바로 선빈.
소연은 보이지 않았다.
1학년 때도 3D툴과 관련된 수업들을 많이 어려워했던 그녀는 디공디를 아예 수강 신청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너무 당연했다.
3D툴이 적성에 잘 맞지 않는 학생들에게 디공디 수강은,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수강생이 20명도 안 되겠네. 나야 좋지만…….”
우진은 작게 중얼거리며 자리를 찾아 들어섰다.
하지만 역시나 우진이 자리 잡기도 전에, 요란스런 제이든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헤이, 우진! 이쪽으로.”
“그렇지 않아도 거기로 가고 있었어.”
“준비됐지, 우진?”
“뭐가?”
“이 제이든 님의 위대함에 감탄할 준비 말이야.”
벌써 몇 번째 듣는지 모를 제이든의 말에,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흠……. 다음 주부터 얼굴 볼 수 없는 건 아니고?”
“What?”
“아직 수강 정정기간이잖아. 잘 생각해 제이든, 오늘 수업 들어보고 어려우면 다음 주엔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이 제이든 님을 무시하다니!”
“무시한 거 아냐. 단지 충고일 뿐이지.”
“Bloody Hell!”
공간디자인과의 2학년에 배정되어있는 수업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진의 동기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재수강을 하러 온 고학년 학생들이거나. 3, 4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수업을 들으러 온 경우. 혹은 열정 넘치는 다른 과의 학생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사실상 우진과 친분이 있는 사람은 제이든과 선빈이 전부.
제이든의 오른쪽에 앉은 우진은, 그 반대편에 앉은 선빈과도 반갑게 인사하였다.
“여, 선빈!”
“형, 오랜만이야. 방학 때도 엄청 요란하게 살았던데?”
“뭐가?”
“태호건설 관련 기사 봤어. 거기 구속당한 상무가, 우리 아버지도 아시는 사람이었더라고.”
“그래……? 어떻게 아시지?”
“나도 물어봤는데, 그냥 업계 바닥 좁다고. 그런 얘기만 하시네.”
“그렇군.”
“그리고 참, 우리 아버지께서 형 엄청 칭찬하시던데. 진짜 대단한 친구인 것 같다고.”
“대단하긴, 무슨. 그런 거 아니야. 내가 한 건 딱히 없어.”
“겸손은.”
우진은 오랜만에 만난 선빈이 뭔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물론 작년 학기 중에도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던 사이이긴 했지만, 뭔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변한 것을 느낀 것이다.
‘얘가 방학 동안 뭔 일 있었나?’
우진이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느끼는 그 미묘한 차이는 바로 질투와 동경이라는 시선의 차이였다.
카페 프레스코의 디자인에 진심으로 감탄한 그 날 이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선빈의 태도가, 방학이 지나자 확 느껴진 것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두 멀대들과의 요란한 인사가 끝나고, 우진은 자리의 컴퓨터를 켜고 프로그램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피이잉-
순식간에 부팅되어 윈도우 화면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우진은 만족스런 표정이 되었다.
아직 SSD*[Solid State Drive의 약자로, 하드디스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개발된 반도체 기반의 저장장치.]가 보급형으로 저가에 공급되지 않는 2011년임에도 불구하고, K대 디자인과 컴퓨터 실기실의 모든 컴퓨터에는 SSD메모리가 기본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K대에서 디자인과에 얼마나 많은 예산을 투자하는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었다.
‘좋아. 라이노를 한번 켜볼까?’
디공디는 우진이 유일하게 강의계획서까지 꼼꼼하게 챙겨 본 수업이었다.
때문에 우진은 수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대략 알고 있었고.
이 수업에서 메인으로 사용될 툴이 라이노(Rhino3D)라는 것도 우진은 잘 알고 있었다.
3D툴인 라이노는 프로그램의 이름에 걸맞게, 아이콘도 코뿔소의 모양으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미리 책을 좀 사서 먼저 공부해볼 걸 그랬나?’
프로그램을 열어서 이런저런 기능들을 눌러보던 우진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3D맥스와 어느 정도 비슷한 사용방식을 가진 툴일 줄 알았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생각보다 더 생소했으니 말이다.
그런 우진을 옆에서 지켜보던 제이든이, 씨익 웃으며 참견하였다.
“바보, 우진.”
“뭐?”
“지금부터 이 제이든이 하는 걸 자잘 보라고.”
“……?”
“아직 수업이 시작되진 않았지만, 멋진 걸 조금 보여주도록 하지.”
신이 나서 우진의 의자를 밀어낸 제이든은, 그의 컴퓨터 앞에 앉아 쏜살같이 마우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오호.”
우진은 조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제이든이 만들어낸 결과물 자체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간단한 모델링이라곤 해도 제이든이 너무 능숙하게 시연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감탄과 동시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개강하자마자 이걸 보여주려고, 혼자서 낑낑대며 선행학습을 했을 모습이 눈에 선했던 것이다.
마치 주인의 명령을 잘 수행한 충견마냥, 두 눈을 반짝이며 우진을 바라보고 있는 제이든.
그래서 우진은, 제이든의 기대에 이번만큼은 부응해 주기로 하였다.
“대단해, 제이든.”
“역시 제이든은 엄청나지?”
“내가 널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 같아.”
“후후. 이제야 제이든의 위대함을 알아보다니. 어리석은 우진.”
더욱 신이 난 제이든은, 우진의 앞에서 이것저것 다양한 모델링들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사실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다 보니 대단할 정도로 복잡한 모양은 없었지만, 그래도 라이노의 많은 기능들을 사용하는 모습은 꽤 놀라운 것이었다.
‘오호, 이거 조금 공부한 수준이 아닌데?’
제이든의 그 시연들은 꽤 흥미로움과 동시에 도움이 되었기에, 우진은 더욱 추임새를 넣으며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아, 라이노에서는 아예 선의 곡률을 조절해서 곡면을 조율할 수가 있네?”
“제이든의 실력이 대단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이든을 놀려주는 재미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음. 인정할게. 오늘은 네가 나보다 낫네.”
“What? 오늘은 이라니, 우진. 난 항상 우진보다 낫다고.”
“글쎄. 그건 아닐걸. 이번 학기가 지나기 전엔 아마도 내가 더 잘할 것 같은데.”
“농담하지 마, 우진. 그럴 순 없어.”
우진이 제이든을 놀리는 것은 단순히 재밌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한 번씩 경각심을 일깨워줘야, 더 열심히 수업에 임할 인물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제이든의 성장은 우진에게도 장기적으로 큰 도움이 될 터.
아마도(?) 그것이 제이든을 놀리는 더 큰 이유일 것이었다.
하여 그렇게 우진이 제이든의 3D모델링 시연을 감상하는 사이.
드르륵-
컴퓨터실의 문이 다시 열리고, 조운찬 교수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자 조금 소란스럽던 장내는 곧바로 조용해졌으며, 다들 기대에 찬 눈빛으로 조운찬 교수를 바라보았다.
여기 모인 학생들 중에는, 사실상 학점을 때우기 위해 들어온 수강생은 없을 것이었다.
다들 이 수업에 기대가 무척이나 큰 사람들뿐이었으니 말이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처음 뵙는 분들도 무척이나 많군요.”
강단에 선 조운찬이, 특유의 담백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제 수업을 이미 들어보신 분들도 많지만, 다시 한번 간단히 소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공간디자인과 교수 조운찬이라고 합니다. 한 학기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조운찬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자, 장내에서 자연스레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보통의 강의였다면, 아마 이다음 순서는 사제 간의 약간의 잡담이었을 터.
하지만 조운찬은 전혀 그런 이야기 없이, 곧바로 스크린을 켜고 수업을 시작하였다.
어떤 수업이든 한결같은 그였기에, 이미 예상했던 수순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어서 수업이 시작되자, 누구보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스크린을 응시하는 제이든.
‘이 제이든 님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도록 하겠어.’
수업 자체에 대한 기대도 기대지만, 제이든은 자신이 방학 동안 공부한 것들을 마음껏 뽐낼 생각에 더욱 들떠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자, 다들 컴퓨터 부팅되셨으면, 바탕화면을 보세요.”
“네, 교수님!”
“바탕화면에 알리아스(Alias) 안 깔려있는 학생 없죠?”
조운찬의 첫마디가 떨어진 순간, 당황한 나머지 제이든의 두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Alias……?”
오늘 수업에서 지난 몇 달 동안 갈고닦은 라이노3D 실력을 마음껏 뽐내 보일 예정이었는데, 조운찬이 이름조차 생소한 전혀 다른 프로그램의 이름을 이야기했으니 말이다.
그런 제이든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했는지, 누군가 조운찬에게 질문했지만…….
“교수님, 그런데 수업은 라이노로 진행되는 것 아니었나요?”
조운찬에게서 나온 대답은, 제이든의 기대를 더욱 처참히 부숴버리고 말았다.
“하하. 라이노에 대한 수업도 할 겁니다. 하지만 비정형 모델링의 근본적인 부분들을 더 심도 있게 공부하기 위해서는 알리아스 프로그램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초반 커리큘럼을 조금 수정해 봤습니다.”
제이든의 두 동공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