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43화 (143/315)

143화

Dealings

파빌리온(Pavilion)이란.

사전적 의미로 따지자면, 가설 건물, 부속 건물, 조형물, 정자 등의 개별적인 건축물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독립적인 구조를 가진 일체의 건축 구조물을 의미하는 단어가 바로 파빌리온인 것이다.

하여 건축 디자인 업계에서 사용되는 이 파빌리온이라는 개념은, 보통 어떤 공간에 설치될 수 있는 디자인적 의미를 갖는 건축조형물을 통칭한다.

물론 조형물이라 해서 단지 미관상의 아름다움만 담기는 것은 아니다.

그 건축조형물이 실제로 어떤 기능을 가지는 경우에도, 그것은 여전히 파빌리온이라 불리니 말이다.

파빌리온은 쉘터(Shelter)의 역할을 하는 쉼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행인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안내소가 될 수도 있고.

나아가 밴드나 오케스트라 등이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설치된 밴드스탠드(Bandstand)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기능보다 디자인적 아름다움이 조금 더 우선하는 개념이, 건축 디자인 업계에서 얘기하는 파빌리온이라 보면 될 것이다.

물론 파빌리온이라는 개념이 생소한 김 실장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보통 그것을 설치미술과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WJ 스튜디오에서, 디자인적으로 설계에 어울릴 조형물을 하나 설치해 주시겠다는 거죠?”

“뭐, 비슷합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비용은 따로 청구하실 테고…….”

우진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김 실장이 펜을 빙그르르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거래인 거네요?”

“저는 실장님께, 카페 프레스코라는 훌륭한 브랜드가 입점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실장님은 저희 스튜디오에게 멋진 파빌리온을 설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서로에게 윈-윈이 될 수 있는, 괜찮은 Deal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진의 말이 끝나자, 김 실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우진의 부탁 자체가, 그렇게까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어차피 이 정도 규모로 지어지는 복합 몰의 로비에는 그럴싸한 조형물이 하나쯤 들어가 줘야 했고.

해외 유명 작가의 비싼 작업물을 들여오는 게 아니라면, 사실 어디에 일을 맡겨도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됐으니 말이다.

만약 우진이 터무니없이 비싼 단가를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설계권을 가진 브루노와도 긴밀한 관계인 WJ 스튜디오에 일을 주는 것이 나쁘지 않은 선택일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실장이 고민하는 이유는, 이런 종류의 일을 원하는 업자들 중에 양아치가 아주 많기 때문이었다.

단가는 높게 부르고 조형물 자체는 대충 만들어서, 한 건 크게 해 먹으려는 업자들.

사실 조형물이라는 것 자체가 단가를 책정하기 아주 애매한 장르였고, 디자인 값을 얼마를 쳐 주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값이 달라질 수 있는 분야였으니.

그런 양아치 같은 업자들이 많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고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대놓고 거래를 요구하는 경우라면?

우진이라는 사람을 잘 모르는 김 실장으로서는, 냉정하게 더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카페 프레스코>라는 먹음직스런 미끼까지 던져놓고……. 대체 얼마나 크게 해 먹으려 하는 거야?’

라는 식으로 사고가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진은, 그런 김 실장의 속내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김 실장은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상황 자체가 너무 뻔했으니 말이다.

우진 또한 전생에 건설사에서 근무할 때, 양아치 같은 업자들을 한두 명 만나본 게 아니었으니까.

‘나였어도 비슷한 생각부터 떠올렸겠지.’

하지만 당연히 우진은, 이 파빌리온 제작으로 양아치처럼 해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물론 금전적인 이득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형적인 가치들이었으니 말이다.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함께 설계한 이번 패러필드 복합 몰은, 분명 세계 건축업계의 관심을 받게 될 것이고.

여기에 WJ 스튜디오의 이름으로 독자적인 파빌리온 디자인을 선보인다면, 그 또한 자연히 세계적인 조명을 받을 테니 말이다.

물론 디자인이 별로라면, 아무리 브루노의 명성을 등에 업었다 하더라도 순식간에 묻혀버릴 것이다.

하지만 우진은 자신 있었다.

파빌리온 디자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것이었고.

전생에서 온갖 건축 잡지에 실리며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던 파빌리온들을 한두 개 봤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우진은 김 실장이 고민하는 동안 잠시 머릿속을 정리한 뒤,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안다고 해서, 그것을 너무 직설적으로 꺼내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왕십리 패러필드는, 그렇지 않아도 이미 비리와 로비 때문에 민감한 사업장이었으니까.

“실장님.”

“예, 대표님.”

“혹시, 제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제안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조금은 의외의 이야기에 김 실장은 갸웃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지 않을 이유도 없었으니 말이다.

우진의 입이 다시 떼어졌다.

“사실 실장님 입장에서도, 꽤 난처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 그게 무슨…….”

“저희 WJ 스튜디오가 최근에 크게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파빌리온 제작은 포트폴리오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우진이 꺼낸 이야기는 사실 김 실장의 머릿속에 전혀 없던 부분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요.”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꺼낼 이야기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가 한 가지 드리고 싶은 제안은……. 디자인 피(Fee)에 대한 부분을 백지수표로 드리겠다는 겁니다.”

“네에……?”

우진의 말이 끝나자, 김 실장뿐 아니라 브루노의 두 눈도 휘둥그레졌다.

그 제안 자체가, 너무 파격적인 것이었으니 말이다.

“백지수표라는 말씀은……. 디자인 값을 저희가 원하는 대로 책정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원가에 대한 부분만 깔끔하게 영수증으로 남겨서 따로 청구하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 확실하게 챙겨 주시면……. 디자인 피는 패러마운트에서 얼마를 책정하든 그대로 수용하겠습니다.”

김 실장은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저희 재무팀에서, 제로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그쪽이야 당연히, 건축비를 최대한 줄이려 들 테니까요.”

“그런데…….”

혹여 우진이 자재의 원가절감으로 어떤 장난을 치려는 것은 아닌지 순간적인 의심도 들었지만, 그러한 부분은 미리 칼같이 잘라버렸다.

“원자재와 인건비에 대한 검증도, 패러마운트 측의 감사팀에 맡기겠습니다.”

“……!”

“그렇다고 과도한 자재를 사용할 일도 없을 겁니다. 원가 총액은, 업계표준을 넘지 않도록 할 테니까요.”

그래서 우진의 이야기를 듣던 김 실장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패러마운트의 입장에선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상할 수준까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저희야 감사하긴 한데…….”

해외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들여오는 것은 너무 큰 출혈이 필요한 일이고, 그렇다고 다른 업자를 알아보자니 그에 대한 검증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우진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우진은, 김 실장이 하고 싶지만 꺼내기 어려운 말들까지 자진해서 얘기하고 못을 박아버렸다.

“방금 말씀드린 모든 내용은, 도급계약서에 명시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하여 그렇게 우진의 말이 전부 끝나자, 장내에는 침묵이 흘렀다.

여유로운 표정의 우진과, 혼란스러운 표정의 김 실장.

그리고 뒤늦게 통역의 이야기를 들은 뒤, 놀란 표정이 된 브루노까지.

그렇게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김 실장이었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뭐, 당연히……. 좋습니다. 좋죠.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는데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우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그렇죠?”

“그런데 서 대표님.”

“예?”

“계약서를 쓰기 전에, 딱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우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 뭐. 얼마든지요.”

김 실장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파빌리온 계약을 따 가시려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우진은 다시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건 기회고, 저는 이 기회를 살릴 자신이 있으니까요.”

당연히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김 실장은 아리송한 표정이 되었지만, 우진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진은 김 실장에게 한마디를 툭 하고 덧붙였다.

“디자인 잘 빠지면, 값은 알아서 잘 쳐주셔야 합니다? 하하.”

* * *

사실 건축뿐만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분야에서, 가치를 책정하기 참 힘든 부분이 바로 디자인 피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아주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가치이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로 책정할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만약 브루노처럼 이미 커다란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라면 좀 얘기가 다르겠지만, 우진처럼 디자이너로서의 인지도가 크지 않은 인물이라면 더더욱 어려워진다.

그래서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기에 우진의 이 거래는, 너무 위험한 거래라고 할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 이 거래가 끝난 뒤에, 패러필드라는 ‘거대한 복합 몰에 지어진 파빌리온’이라는 포트폴리오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결과가 만들어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거대한 규모의 파빌리온을 제작하면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땡전 한 푼 남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진은 오히려 자신의 인지도가 백지상태에 가깝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던진 것이었다.

디자인업계의 인지도라는 것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면.

모든 디자이너의 출발점이 항상 제로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우진은 자신이 디자인한 파빌리온의 가치를 직접 책정하지 않고 오히려 패러마운트의 주관으로 넘김으로써.

디자이너로서의 데뷔를, 최대한 높은 출발 선상에서 시작하고자 한 것이다.

‘일종의 도박이긴 하지만……. 자신은 있으니까.’

만약 우진이 디자인한 파빌리온이 정말 세계적으로 건축업계의 인정을 받고, 수많은 전문가들로부터 거론된다면.

김 실장은 결코 디자인 피를 적게 책정할 수 없을 것이다.

패러마운트는 한국 대기업일 뿐 아니라 글로벌 기업이었고.

때문에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디자인에 터무니없이 낮은 가치를 책정한다면, 기업 이미지를 망치기 딱 좋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우진이 패러마운트에 부를 수 있는 디자인 피에는, 명확한 천장이 정해져 있다.

아직 SPDC라는 학부 공모전 외에는 디자이너로서 데뷔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우진이, 자신의 디자인에 높은 값을 책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우진의 이 선택은 오히려, 그가 디자인할 파빌리온에 최대한 높은 가치를 책정받기 위한 포석이었다.

남들의 귀에는 궤변으로 들릴지언정, 우진은 사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궤변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결과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우진의 손에서 탄생할 파빌리온이, 세계적인 인정을 받을 훌륭한 디자인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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