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New project
“Bloody hell! 우진, 혹시 학교에서 날아온 공문 봤어?”
흥분한 제이든을 향해, 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무슨 공문?”
제이든이 왜 흥분했는지 잘 알고 있지만, 우진은 모른 척했다.
그의 반응을 보는 것이 은근히 재밌었으니 말이다.
“Hmm……. 역시 우진은, 브루노의 선택을 받지 못했군.”
“그게 무슨 말이야, 제이든?”
“미안하지만 우진, 이번 학기에는 WJ 스튜디오에서 일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어.”
“지난 학기에는 일했나?”
우진의 반문을 무시한 채, 제이든은 제 할 말만 계속했다.
“제이든 님의 능력을 빌려줄 수 없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지.”
“앞뒤 다 자르고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래도 브루노가 이 제이든 님의 뛰어난 능력을 알아본 모양이야.”
“……?”
“이번 학기에, 나를 인턴으로 채용하고 싶대.”
“오, 그것 참 잘됐네.”
제이든은 마치 랩이라도 하듯, 신이 나서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브루노는 심지어 날 데려가기 위해서, Professor 윤에게도 따로 이야기를 한 모양이야. 교수님께서 브루노의 사무실에서 인턴을 한다면, 그것을 학점으로 인정해 주시겠다고 하더군.”
“엄청난데?”
제이든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려 6학점이야, 우진. 그러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브루노의 사무실로 출근해야겠어. 서운해해도 어쩔 수 없어.”
“제법 서운하네.”
하지만 신나게 말을 잇던 제이든은, 우진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Bloody hell! 소연! 아무래도 우진은 영혼을 잃어버린 것 같아. 우진의 영혼을 좀 찾아줘!”
길길이 날뛰는 제이든을 보며, 소연은 피식 웃고 말았다.
가끔 보면 제이든은, 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친구였다.
“흥분하지 말고 고기나 먹어, 제이든. 우진 오빠는 네가 부러워서 그런 것뿐이야.”
치이이익-
담담한 표정으로 고기를 구우며, 흥분한 제이든을 달래는 소연.
웃긴 것은, 그 한 마디에 날뛰던 제이든이 다시 안정을 찾았다는 부분이었다.
“후우. 좋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제이든 님을 부러워하는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니까.”
제이든은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러니까, 우진. 날 브루노에게 빼앗기기 싫다면, 빨리 우진도 산학협력이라는 걸 신청해.”
“산학협력?”
“WJ 스튜디오도 K대와 협의해서 내게 학점을 줄 수 있다면, 어쩌면 이 제이든 님이 우진을 위해 WJ 스튜디오에 남아줄지도 모르지.”
“흠. 노력해 볼 게 제이든.”
결국 제이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란, WJ 스튜디오에도 이런 제도를 도입하면 좋겠다는 부분이었는데.
그것을 이렇게 길고 장황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그렇게 결론까지 다 얘기까지 다 하고 나서야 젓가락을 드는 제이든을 보며,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진짜 별난 놈이라니까.’
우진은 제이든에게, 자신의 산학협력 제휴 사실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WJ 스튜디오가 사실 산학협력을 먼저 체결했고, 우진이 그것으로 6학점을 날로 먹을(?)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제이든은 배신감에 거품을 물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지간한 한국인보다도 젓가락질을 잘하는 제이든은, 소연이 구워놓은 고기들을 야무지게 집어 먹기 시작하였다.
소연과 친하게 지낸 덕인지.
소시지 치킨 피자만 좋아하던 제이든은, 최근 고기의 맛에 눈을 떴다.
기름기 가득한 탱글탱글한 오겹살을 우물거리며 음미하는 제이든.
그런 그를 향해, 이번에는 소연이 다른 방향으로 화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제이든.”
“음?”
“이번 학기 전공 수업, 뭐 들을 예정이야?”
“Hmm……. 글쎄. 아직 전부 다 확정 짓지는 않았어.”
소연은 두툼한 목살을 불판 위에 올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우진을 향해 물었다.
“오빠는 생각해둔 거 있어?”
이미 시간표를 다 짜뒀던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야 대충 정해뒀지.”
“오……? 윤치형 교수님 수업이야 필수니까 들어야 할 거고……. 조운찬 교수님 수업 들을 거야?”
“디공디(디지털 그래픽 공간디자인) 말하는 거지?”
“응, 그거.”
우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소연이 처음 시간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디지털 그래픽 공간디자인 수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임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난 당연히 듣지. 2학년 수업 중에 그게 제일 듣고 싶었는데.”
2학년 1학기부터 들을 수 있는 ‘디지털 그래픽 공간디자인’ 수업은, K대 디자인학부에서 여러모로 유명한 수업이었다.
조운찬 교수가 강의하는 핵심 수업 중 하나로, 각종 3D툴을 응용해서 건축디자인에 접목하는 것을 배우는 수업.
이 수업이 유명한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수업의 난이도와 무지막지한 과제 때문이었으며.
둘째는 현시점에 국내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툴들을 배울 수 있는 하이 퀄리티의 수업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공간디자인과가 아닌 다른 디자인학부 학생들도 수강 신청을 많이 할 정도로 인기 있는 수업임과 동시에, 보통 수강생 중 절반 이상이 낙오한다는 악명 높은 수업인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공간디자인과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어지간한 각오 없이는 수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수업이었다.
소연이 우진과 제이든에게 물어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고 말이다.
“역시 오빠는 들을 줄 알았어.”
소연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이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제이든은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엣헴. 혹시 지금 이 제이든 님에게, 디공디를 수강할 건지 물어볼 생각인거야?”
“어……. 그렇다면?”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된 소연이 얼떨결에 반문하자, 제이든은 다시 신이 나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건 물어볼 필요도 없는 거였어, 소연.”
“왜?”
“디공디에서 A+를 받을 수 있는 건, 오직 이 제이든 님뿐일 테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에 소연은 말을 잃었고.
“……?”
우진도 덩달아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제이든?”
하지만 제이든은 의미심장한 표정만 지어 보일 뿐, 우진의 물음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비밀이야. 그리고 개강해서 수업을 들어보면 알게 되겠지.”
“뭘?”
“이 제이든 님의 위대함을.”
“…….”
우진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사실 그렇게까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혼자 집에서 선행학습이라도 하는 건가? 뭐 열정 넘치는 건 좋은 일이니까…….’
적어도 ‘블러디 헬’을 연발하며 밤새 게임에 빠져있는 것 보다는, 훨씬 더 긍정적인 방향일 터.
우진은 제이든을 응원해 주었다.
“그럼 디공디 수업 들을 때, 모르는 건 제이든에게 물어보면 되는 거지?”
“Of course. 제이든 님만 믿으라고.”
그렇게 주말 오후.
오랜만에 여유롭게 고기를 구우며 수다를 떤 세 사람은, 법카의 은총(?)과 함께 식사를 마쳤다.
사실 오늘 그들이 만난 이유는, 방학 동안 모형 작업실에서 고생한 소연과 제이든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함.
이번 주를 마지막으로 둘의 알바가 마무리되니, 우진이 맛있는 고기를 한 끼 사준 것이다.
“소연이는 집으로 간다고 했지?”
“응. 오늘 저녁에 동생들이랑 할머니 뵈러 가기로 해서.”
“할머니 잘 지내시지? 안부 좀 전해드려.”
“히히, 그럴게.”
제이든에게로 시선을 돌린 우진이, 예의상 물어보았다.
“제이든, 너는 어디로 가?”
그러자 그 물음을 기다리고 있던 제이든이, 재빨리 대답하였다.
“제이든님은 강남에 볼일이 있지.”
“강남?”
“어딘지는 비밀이야. 궁금해도 말해줄 수 없어.”
“…….”
오늘따라 비밀이 많은 제이든을 보며, 동시에 한숨을 푹 쉬는 우진과 소연.
“그래. 시크릿 보이. 강남이라면 아쉽지만 태워줄 수 없겠군.”
“Holy……! 우진은 어디로 가는데?”
“비밀이야.”
“젠장!”
시끄러운 두 사람을 먼저 보낸 우진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제이든에게는 비밀이라고 한 우진의 목적지는 다름 아닌 용산.
우진은 오늘, 브루노와 패러필드의 설계 조율을 위해 미팅이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브루노가 성수동에 오기로 되어 있었지만, 어쩌다 보니 패러마운트의 실무자가 용산으로 오게 되어 삼자대면을 하게 된 것.
“패러마운트에서 온다고 했던 사람이……. 이번에 새로 부임한 기획실장이라고 했지?”
태호건설의 로비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뒤, 패러마운트 담당 부서 쪽에서도 꽤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다고 했다.
때문에 우진은 오늘 미팅에 꽤 기대가 컸다.
새로 부임한 실장급 인물이면, 실적에 목말라 할 확률이 높았으니 말이다.
로비로 인해 온 회사의 시선이 쏠려있는 이 왕십리 사업장에서 훌륭한 성과를 보인다면, 반사적으로 크게 실적으로 올릴 수 있을 터.
의욕적인 실무진과 함께 일하는 것은, 사업에 긍정적인 방향이 아닐 수 없었다.
끼이익-
도착한 우진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를 발견한 브루노가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 * *
이번 왕십리 역사의 민자 사업과 같은 복합 몰 개발은, 일반적인 건축 개발사업보다 조금 더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진다.
자본을 대는 시행사와 건물을 올리는 시공사가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부분이 없었지만.
실시 설계단계에서부터 시행사와의 더 세밀한 조율이 필요하다는 점은 조금 특별한 부분인 것이다.
물론 다른 건축사업이 진행될 때에도 설계단계에서 시행사와의 조율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복합 몰 사업은 그 조율의 정도가 훨씬 더 하드하다.
보통 복합 몰은 삽을 뜨고 건설이 진행되는 동안, 이곳에 입점하게 될 브랜드들을 미리 유치하기 시작하는데.
그들에게 최대한 매력을 줄 수 있는 구조를 뽑아내기 위해, 시행사에서 따로 설계 조율을 위한 TF팀을 꾸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시행사의 의견뿐 아니라 미리 입점 계약이 체결된 브랜드의 의견까지도 반영되는 경우가 있었다.
모든 것은 자본주의의 논리.
패러마운트에서도 아쉬워할 정도로 강력한 파워와 인지도를 가진 브랜드의 경우.
그들을 유치하기 위해 설계단계에서부터 그들이 매력적으로 느낄 만한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미팅에서도, 주요 안건은 거의 이러한 내용들이었다.
실시설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흐음……. 그러니까, 실장님. 지상 2층의 경우, 유명 의류 브랜드를 필두로 한 쇼핑 공간을 조성할 예정이라는 말씀이신 거죠?”
브루노의 말을 곧바로 통역사가 통역하였고, 패러마운트에서 나온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브루노. 그래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의 접근성이 높을 A섹터 부근에는, 최대한 많은 매출이 발생할 만한 업종이 들어서야 합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그래서 이 부분의 공간이 이렇게 좁게 빠지면, 저희 입장에서 조금 난처할 것 같습니다. 메이저 브랜드에서는, 이렇게 좁은 공간에 매장을 내어주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런 얘기가 나오게 될 경우, 아쉬운 쪽은 패러마운트였다.
세계적인 건축디자이너 브루노에게 상업성을 위해 설계변경을 요구하는 건, 분명한 아쉬운 소리였으니 말이다.
물론 디자이너이기 이전에 프로패셔널한 실무자인 브루노는, 그런 부분에서 딱히 불쾌함을 느끼거나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흠. 그럼 에스컬레이터의 위치를 조금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사선으로 방향을 비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 같군요.”
“뭐 이런 얘기는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듯합니다. 일단 체크 해 둘 테니,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죠.”
그리고 이런 대화들이 오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진은 슬슬 끼어들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오늘 이 미팅에 들어오면서, 우진은 한 가지 얻어내고자 하는 부분이 있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