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40화 (140/315)

140화

New project

2월은 우진에게 조금 특별한 달이다.

정확히 일 년 전 2월 15일이 바로, 우진이 20년 전으로 돌아와 새 삶을 살 수 있게 된 날이었으니 말이다.

회귀라는 초자연적인 경험을 한 뒤, 전생에 항상 꿈꿔왔던 삶을 살 수 있게 된 바로 그날.

그 때문인지 우진은 오랜만에, 이제는 꾸지 않을 줄 알았던 악몽을 꾸며 일어났다.

그 악몽이란 바로, 회귀 전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꿈이었다.

“으……. 차라리 재입대 꿈이 낫지. 이 꿈은 진짜 안 꿨으면 좋겠어.”

악몽 덕분인지 새벽같이 일어난 우진은, 시원한 물로 간단하게 세안을 한 뒤 추리닝을 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출근까지 꽤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말이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집을 나선 우진은, 전생에서부터 가끔 조깅을 하던 코스로 자연스레 뛰어나갔다.

개포동에 있는 우진의 집은 양재천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고, 아늑한 산책로가 조성되어있는 양재천은 가볍게 뛰기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후욱- 후욱-

사실 우진이 아침 일찍 조깅을 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오늘처럼 본의 아니게(?) 일찍 일어나지거나, 혹은 머릿속이 복잡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그럴 때나 가끔, 오늘처럼 뛰러 나오곤 했으니 말이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가볍게 땀을 흘리는 것은, 머릿속을 비우는데 아주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흣차!”

한 십오 분 정도 가볍게 달리자 숨이 차올랐는지, 우진은 잠시 멈춰서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이어서 우진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눈앞에 높이 솟아오른 커다란 건물로 향해 있었다.

양재천변에 솟아있는 건물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호화로운 디자인의 마천루.

아크로팰리스(Acro Palace)라는 이름을 가진 이 높다란 건축물은, 강남구 도곡동의 랜드마크이자 부의 상징이기도 한 프리미엄 주상복합이었다.

2011년인 지금을 기준으로는, 강남구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비싼 가격을 가진 아파트.

잠시 숨을 고르며 아크로팰리스의 자태를 감상하던 우진의 시선이, 이번에는 그 반대편에 가지런히 늘어선 주공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그곳은 바로 오늘까지도 우진이 살고 있는 곳인 개포동의 주공 아파트였다.

양재천이라는 개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세워져 있는 두 건축물은, 마치 강남구의 빈부격차를 상징하는 그림과도 같이 느껴졌다.

마치 양재천이, 빈과 부를 나누는 기준선 같은 느낌이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우진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떠올랐다.

이 강남의 빈부격차를, 누구보다 많이 느꼈던 사람이 바로 우진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강남 산다는 사실만으로 오해도 많이 받았었지.’

외부인들은 강남에 살면 그저 부자인 줄 알지만, 우진의 생각에는 강남이야말로 서울에서도 가장 빈부격차가 심한 동네였다.

특히 그가 자라온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강남이라는 지역이 급속도로 개발되었던 이 시기에는 더더욱 말이다.

우진은 아마 전생에도 여기 비슷한 자리에 서서, 지금과 꽤나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른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우진의 마음가짐이었다.

전생에서의 우진에게 이 아크로팰리스는 그저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것이었지만.

지금의 우진은 아크로팰리스가 아니라 그 이상을 바라볼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과거의 우진은 아크로팰리스를 보며, ‘저런 곳엔 대체 어떤 사람들이 살까?’ 따위의 실없는 생각을 했다면.

지금의 우진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난 이 두 번째 인생에서,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자신감과 열정은 작은 성공을 만들었고. 그 작은 성공은 우진에게 조금 더 큰 열정과 자존감을 선물하였다.

이어서 그것들은 마치 눈덩이가 불어나듯 점점 더 큰 가능성과 성공을 낳았으며.

그것으로 우진은 지금 이 자리까지 설 수 있었다.

심지어 우진이 선 이 자리는, 아직 종착점은커녕 반환점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지난 생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만큼, 높은 곳까지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 열심히 살아야지. 남들은 가질 수 없는 기회를 얻었으니까.’

집으로 돌아온 우진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뒤,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아침밥을 먹은 뒤 다시 현관문을 나섰다.

“다녀올게요, 엄마.”

“그래. 오늘도 고생이 많구나.”

그리고 출근길에 배웅해주시는 어머니를 보며, 마음속으로 작게 다짐했다.

올해는 꼭 어머니와 함께, 저 아크로팰리스 못지않은 좋은 집으로 이사 가리라고 말이다.

* * *

왕십리 민자사업의 공모결과가 나왔다.

공모에 채택된 설계는,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당연히 브루노의 것.

신문에 대서특필 될 정도의 커다란 이슈도 있었다.

패러마운트의 시공사로 내정되어있던 태호건설의 비리가, 언론을 통해 아주 적나라하게 밝혀진 것이다.

그 모든 로비 과정이 너무 훤하게 드러난 탓에, 어떤 논란거리조차 생길 여지가 없었다.

사람들은 태호건설을 비난했으며, 태호건설은 공사 예정이던 다른 시공권들까지도 전부 잃어버렸다.

덕분에 돈줄이 막혔고, 그렇지 않아도 최악으로 치닫던 재무 상태는 결국 파국에 이르렀다.

그대로 파산해버리고 만 것이다.

태호건설에 다니던 죄 없는 평범한 직원들은 안타깝게 되었지만, 그렇다 해서 이 비리폭로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 때문에 태호건설의 비리를 묻고 덮어둔다면.

그거야 말로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격일 테니까.

[왕십리 역사, 브루노 산체스의 야심찬 설계. 청탁‧비리 뚫고 최종 설계안으로 낙점.]

그리고 이 사건이 생각보다 더 크게 언론을 탄 덕에, WJ스튜디오는 반사이익을 볼 수 있었다.

[왕십리 역사, 브루노 산체스의 야심작. 설계 과정에 참여한 WJ스튜디오는 어디?]

공모에 채택된 브루노의 설계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덩달아 그와 함께 이름이 올라간 WJ 스튜디오 또한 또 한 번 유명세를 얻게 된 것이다.

세계적인 건축디자이너 브루노와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WJ 스튜디오의 브랜드 밸류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언론을 통해 크게 알려지기까지 했으니.

이것의 무형적 가치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윤치형 교수로부터 걸려온 전화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서우진이, 요즘 잘 나가더라?]

“하하, 잘나간다니요, 교수님. 그냥 일이 좀 잘 풀린 것뿐입니다.”

[흐흐, 딱히 가르친 건 별로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내 제자, 자랑스럽다.]

“가르친 게 없으시다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수업시간에 매번 잠만 자는 녀석이, 뻔뻔하기는.]

“하…… 하핫.”

윤치형 교수는 WJ 스튜디오의 기사가 난 것을 보고 우진에게 전화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화의 목적이 오직 그것만은 아니었다.

학교 일 때문에 우진에게 마침 연락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기사를 보고는 겸사겸사 전화를 한 것이었다.

[우진이 너, 작년 연말에 얘기했던 산학협력 건은 기억하지?]

“예, 기억하죠.”

[그거 관련해서 곧 회사 메일로 공문 하나 날아갈 테니까, 받으면 바로 회신 좀 해줘.]

“알겠습니다, 교수님. 당연히 그래야죠. 제 학점이 걸린 문젠데요.”

[그나저나 이번에 네 회사 유명해져서, 산학협력 올라가면 네 선배들이 다 지원하는 거 아니냐?]

“아, 교수님. 이번에는 공고에 저희 회사 이름은 빼주시기로 했잖아요.”

[그랬기는 한데, 그래도 공고 올리면 재밌을 것 같아서 말이지.]

“아닙니다. 안됩니다, 교수님. 이번엔 저만 하는 거로…….”

[흐흐흐. 그래, 알겠다. 걱정 하지 말고, 조만간 서류 작성 끝나면 학교나 한번 오거라.]

“예, 알겠습니다.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윤치형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우진은, 전화를 끊고 이번에는 노트북을 열었다.

그가 노트북을 켠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회사 계정으로 브루노의 메일이 와 있다는 사실을, 직원에게서 들었었기 때문이다.

브루노가 우진에게 보낸 메일은, 이번 프로젝트가 순항할 수 있었던 데에 대한 감사인사.

브루노는 똑똑한 사람이었고, 우진보다도 훨씬 더 사회경험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설계 공모에 얽힌 비리와 관련된 보도를 보자마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우진이 물밑작업을 했다는 사실까지도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다.

딸깍-

우진은 브루노의 메일을 열었고, 그 안에는 생각보다 더 장문의 내용이 들어있었다.

……전략……

WJ 스튜디오와 서우진 대표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내 설계는 훨씬 더 나은 방향으로 디벨롭 될 수 있었으며, 서울시민들을 더욱 이롭게 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건축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중략……

그리고 나는 서우진 대표가 이렇게까지 이 프로젝트에 크게 공을 들인 줄 몰랐습니다.

덕분에 우리의 노력으로 탄생한 이 설계는 결국, 이렇게 빛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조만간 성수동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Ps. 혹시 우진은, 영어나 스페인어를 배워 볼 생각이 없습니까?

공모에 채택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통화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음이 아주 아쉽습니다.

……후략……

브루노의 메일을 읽던 우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일단 브루노가 한글로 메일을 보냈다는 사실부터가 매우 기꺼웠으며(물론 통역이 대신 번역하여 작성했겠지만), 그가 태호건설을 몰아내기 위해 들인 자신의 노력을 조금이라도 알아줬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다른 건 몰라도 영어를 배울 생각은 없는데……. 이거 좀 미안하게 됐네.”

영어를 배울 생각이 없냐는 마지막 이야기에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잘하고 하고 싶은 분야에 대한 공부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 허덕이는 마당에, 언어를 새로 공부할 시간은 없었으니 말이다.

딸깍-

브루노의 메일을 전부 읽은 뒤, 우진은 답장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메일의 내용은 한글로 작성했다.

영어나 스페인어로 써주고 싶지만, 모르는데 어쩌겠는가.

브루노의 사무실에 통역사가 상시 머문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정성스레 메일까지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 노력들은 동업자로서 응당 해야 할 일들이었을 뿐이며…….

……중략……

이렇게 브루노와 함께 커다란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쁘고 즐겁습니다.

조만간 성수동에 오신다니, 그때 뵙고 자세한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Ps. 제가 언어에 소질이 없어……, 이렇게 한글로 답신을 할 수밖에 없어 죄송합니다.

메일을 전부 작성한 우진은, 한번 다시 읽어본 뒤 송신 버튼에 마우스를 가져다 대었다.

그런데 메일을 보내기 직전,

갑자기 뭔가 떠오른 우진이, 메일에 내용을 추가하기 시작하였다.

‘생각해보니 이 타이밍에, 윤 교수님께 꽤 괜찮은 선물을 줄 수도 있겠는데?’

우진이 메일에 추가한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면, 글래셜 타워의 완공 이후로 축소됐던 브루노의 설계사무소의 인원이 당연히 더 충원돼야 할 것이고.

이 상황에서 브루노에게 K대 공간디자인과와의 산학협력을 제안한다면, 서로에게 꽤 괜찮은 시너지가 날 수 있을 테니 말이었다.

물론 브루노에게보다는 K대에게 더 좋은 일이겠지만, 브루노의 입장에서도 나쁠 것은 없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잘 되면, 브루노에게 소연이나 제이든을 추천 해줘야겠네. SPDC 때문에 이미 안면도 있으니 브루노도 흔쾌히 수락할 테고……. 브루노의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근무한 경력이 생기는 건, 두 사람에게도 나중에 이력서에 한 줄 채울 만한 훌륭한 소스가 될 테니까.’

하여 메일을 조금 더 길게 늘여 쓴 우진은, 기분 좋게 브라우저를 끄고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우진의 옆에는, 멀대 같은 영국인 한 명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Bloody hell! 우진, 혹시 학교에서 날아온 공문 봤어?”

그의 정체는 바로, 브루노의 러브콜(?)을 받고 흥분한 제이든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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