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39화 (139/315)

1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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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주요 정책들은, 기획재정부의 협의를 거쳐 결정된다.

그 이유는 바로 예산 때문인데.

국회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결국 기재부의 예산결산 최종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정책이 굴러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의 돈줄을 틀어쥐고 있는 기획재정부는, 사실상 국가의 정책까지 좌지우지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기재부 장관의 서열이 행정부에서 세 번째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정부조직법 제 19조에 따라, 기재부 장관이 부총리를 겸임하도록 되어 있는……. 바로 그 이유 말이다.

‘기재부 차관 출신이시라더니……. 진짜 파워가 어마어마하시네.’

때문에 이렇게 강력한 권력을 가진 기획재정부에서.

무려 차관까지 역임한 황종호의 파워는, 우진과 경완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막강하였다.

그는 현역에서도 항상 경제부 관료들에게 존경받던 인물이었고, 덕분에 아직까지도 그 영향력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우진이 그 힘을 명확히 느낀 것은, 성동구청에 뜬 패러마운트의 설계 공모 공시를 확인하고 나서였다.

황종호가 알겠다는 대답을 주고 정확히 3일 만에, 버젓이 공모 공시가 떠버렸으니 말이다.

공시에는 공모전에 참여한 여덟 개 회사의 기획서들이 전부 투명하게 올라와 있었고.

그것을 확인한 우진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황종호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방법을 어떻게든 만들긴 했을 우진이지만.

그래도 한참을 돌아갈 뻔한 천리 길을, 덕분에 고속도로처럼 뚫고 지나갈 수 있었던 게 사실이었으니까.

사실상 이건 문제를 해결한 수준을 넘어, 더 큰 이득을 본 수준이었다.

우진은 황종호 덕분에, 정말 많은 시간과 비용을 아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르신 덕에 확보한 이 시간은……. 태호건설에 치명적인 결정타를 먹일 수 있는 골든 타임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우진은 오늘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진태를 회의실에 불러 앉혔다.

태호건설이 허둥지둥하는 사이,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체크메이트를 걸어버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언론에 이 소스를 뿌리는 일이야.”

“언론? 갑자기?”

진태의 물음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공시가 떴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걸 봐서 이슈화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

“으음?”

“생각해봐, 형.”

“뭘?”

“형 평소에, 구청 홈페이지 같은 데 들어가 봐?”

“아니.”

“지역개발사업 공시 떠 있는 거, 확인해 본 적 있어?”

“없지.”

“그러니까 언론이 필요한 거야. 왕십리 민자사업이 진행돼서, 패러마운트가 성동구와 함께 이런 설계 공모를 진행했다.”

“오호.”

“이 공모에는 이러이러한 회사들이 참여했으며, 이런 설계들이 나왔고…….”

우진의 얘기를 듣던 진태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다시 말했다.

“그런데 그런 내용에, 시민들이 관심 있을까?”

“없을 거라 생각해?”

“흠. 하긴. 역사에 쇼핑몰이 들어온다는 기사가 뜨면, 궁금해서 한 번 눌러 보긴 하겠다.”

우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맞아. 그런데, 내가 바라는 건 그 정도가 다가 아냐.”

“그래?”

“관심이야 생기겠지만, 그건 사업 진행에 대한 관심 정도고……. 지어질 건축물의 디자인이나 공모작으로 올라온 설계에는, 별 관심 안 보일 확률이 높거든.”

“그렇겠네. 그럼 설계 공모 쪽이 이슈화되려면…… 뭐가 더 필요할까?”

우진의 두 눈이 반짝였다.

“더 필요한 건 없어. 이미 소스는 갖춰졌거든.”

“소스?”

“브루노의 명성을, 최대한 이용해볼까 해.”

“……!”

우진의 이야기를 들은 진태는 잠시 말을 멈춘 채 고민을 시작했고.

그런 그를 향해 우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기사 제목은 이런 식이면 좋을 것 같아.”

“어떻게?”

“용산구 글래셜 타워를 디자인한 브루노 산체스. 그의 두 번째 작품, 왕십리 역사에 들어서나?

그 말을 들은 진태는, 탁자를 가볍게 두들기며 감탄했다.

탁-

“크……. 확실히 느낌이 다르네.”

“그렇지?”

우진이 공시된 게시물을 확인한 것은,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이십 분 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시점이 공시가 올라온 지 3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으니.

아직 태호건설에서는 공시가 떴다는 사실도 모를 확률이 컸다.

그들은 성동구청에 로비가 먹혀들어 갔다고 생각할 테니, 공시 같은 건 확인할 생각도 안 할 터였다.

‘태호건설에선 아마, 쏟아지는 인터넷 기사를 보고서야 상황을 인지하게 되겠지. 아니, 그 시점이 빠를지 태호건설 관계자가 쇠고랑을 차는게 빠를지……. 그것도 사실 확실하진 않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본 우진은, 기분 좋게 웃음 지었다.

일이 잘 풀려서 이곳 패러필드의 건축설계에 발 담글 수 있게 된 것도 고무적이었지만.

우진의 전생에서 부실공사로 열 명도 넘는 사람이 죽게 만든 태호건설을, 업계에서 몰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도 꽤 기분 좋았던 것이다.

아마 이번 비리가 알려지면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게 될 것이고.

거기에 기업 이미지까지 최악으로 내려갈 테니, 태호건설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였다.

연초부터 정신없이 움직인 데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자, 그럼 대충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느낌 오지?”

“오케이.”

“형이 언론 쪽에 연락 돌리는 동안, 나는 패러마운트 쪽이랑 얘기해 볼게.”

“패러마운트? 거긴 왜?”

“공시가 올라왔다는 건 패러마운트 에서도 사실상 태호건설에 등을 돌렸다는 얘기잖아?”

“하긴. 패러마운트에서 자료를 공유해 줬으니, 공시가 올라온 거겠지.”

“맞아. 그러니까 아마 그쪽은, 어떻게 상황이 흘러가는지 인지하고 있을 거야.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걸 도와주겠다고 얘기하면서, 몇 가지 딜을 해볼까 해.”

한 이십 분 정도 회의가 더 진행되자, 대략적인 계획의 윤곽이 잡혔다.

하여 우진과 역할 분담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진태는,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우진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박경완 부장님 말야.”

“응?”

“덕분에 진짜 도움 많이 받는다.”

“그치.”

“그 네가 말했던 어르신이라는 분도, 결국 박 부장님이 소개시켜준 분이라는 거잖아?”

“맞아.”

“그럼 이번엔 우리가 진짜 큰 빚을 진거네.”

진태의 말에 우진은 피식 웃었다.

그의 말이 맞고, 우진도 그에 동의하지만.

진태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 하나 있었으니 말이다.

“빚을 진 건 맞는데, 아마 바로 갚을 수 있을걸?”

“청담 클리오 써밋을 말하는 거야?”

우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건 별개지 이거랑.”

“그런가? 그럼 어떻게 갚는다는 건데?”

우진이 씨익 웃었다.

“이거 비리 밝혀지고 나면, 태호건설은 아마 산산조각 날거야.”

“그렇겠지?”

“그럼 태호건설이 갖고 있던 그 시공권은?”

“……!”

“그거 슬쩍 주워다 천웅에 주면. 아마 종호 어르신 소개받은 빚을 어느 정도는 퉁 칠 수 있지 않을까?”

우진의 이야기를 듣던 진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경완이 왜 제 일처럼 열심히 발로 뛰고 있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더해 패러마운트사에 전화하여 딜을 해보겠다는 우진의 이야기까지도.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되었다.

“거참. 넌 진짜 머리가 빠릿하게 돌아간다니까.”

“사실 뻔한 거잖아. 다만 내가 대응이 좀 빠른 편이지 뭐.”

“흐흐. 부장님은 이번에 임원 승진하시면, 곧바로 실적 하나 올리실 수 있겠네?”

“뭐, 그렇지. 서로 상부상조하는 게 좋은 거 아니겠어?”

회의실에서 나온 진태는 바삐 움직여 자리로 향했다.

우진이 부탁한 일들은 최대한 빠르게 처리할수록 효과가 좋은 것들이었으니,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쁘게 타자를 두들기고 전화를 돌리는 와중에도, 진태의 표정은 무척이나 좋았다.

우진도, 경완도. 모두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서로 도우며 빠르게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물론 가장 기분 좋은 것은, 두 사람과 함께 진태 자신도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예, 기자님. 지난번에 저희 대표님 기사 써주신 건,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번엔 왕십리 역사 민자사업 관련해서 소스 드릴 게 좀 있어서 연락 드렸는데요…….”

“아, 물론입니다. 조금 조심스럽지만 한 가지 힌트 드리자면……. 지금 시공사로 선정되어 있는 태호건설 쪽에서 비리가 터질 수도 있다는 건데…….”

“단독으로 드리기는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미 몇 군데 뿌려져서요.”

“여튼 기사,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패러필드 설계 공모 마감은, 1월 10일 월요일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17일 월요일.

패러마운트 기획실에서는 공모결과 발표를 2월 초에 한다고 했으니, 이제 시간은 대략 2주일 정도 남은 셈이다.

아마 그 2주가 전부 지나기 전에, 모든 상황은 바뀌어 있으리라.

* * *

딸깍- 딸깍-

태호건설 건물의 10층.

상무이사 윤정렬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이며, 컴퓨터 마우스를 딸깍이고 있었다.

지금 그의 모니터 스크린에 떠올라 있는 것은, 복잡한 숫자들이 적혀있는 엑셀 파일.

이것은 이번 왕십리 민자사업을 진행하면서 들어간 돈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엑셀 파일이었다.

아직 삽을 뜨기는커녕 설계 공모결과도 나오지 않았건만.

이미 수십억 이상의 액수가 이리저리 적혀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 모든 돈은 전부, 시공권과 설계권을 따기 위해 들어간 로비 비용이었으니 말이다.

정렬은 지금 이 엑셀 파일을 정리하며, 마지막에 자신에게 떨어질 돈의 액수를 계산하는 중이었다.

“흠. 추가로 좀 더 깨지긴 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잘 정리하면 남기는 하겠네.”

탁-

커피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은 정렬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늘 그는 기분이 꽤 좋은 상태였다.

사실 지난주 성동구청에 로비를 집어넣고 난 뒤.

후배에게는 꽤 여유로운 척했지만, 정렬 또한 제법 똥줄이 탔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여기서 삐끗하여 잘못된다면.

시공권이고 설계권이고 나발이고, 그부터 쇠고랑을 차고 교도소로 끌려 들어가게 될 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주가 무사히 지나고 주말까지 지났음에도.

아직 아무런 연락이 돌아오지 않았다.

정렬이 로비한 것은 뭔가를 해달라는 게 아닌 눈감아달라는 것이었고.

이런 종류의 로비에선 무소식이 바로 희소식인 것이다.

‘흐흐. 역시 꽁 돈 싫어하는 인간은 없단 말이지.’

공무원의 입장에선 그냥 공시 민원을 무시하고 한 번 눈만 감아주면 수천만 원 이상의 돈이 공짜로 생기는 것이었으니.

사실 이런 제안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바보 아닌가?

적어도 정렬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사람은 원래, 자신이 가진 시야만큼만 세상을 볼 수 있는 법이었다.

“좋아. 이 정도로 정리하면 되겠어. 아쉽지만…… 여기서 더 남겨 먹을 수는 없겠지.”

정리된 엑셀 파일의 가장 하단에 찍힌 액수는 대략 십억 정도.

이것은 정렬이 남겨서 꿀꺽하려는 액수였고, 때문에 그 숫자만 봐도 정렬은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직 엑셀 파일 속에만 들어있는 가상의 돈이었지만.

정렬은 이미 이 돈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이거로 뭐하지? 외제 차라도 한 대 뽑을까?’

파일을 저장한 정렬은, 흥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에는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들어와, 눈부시고 짜증나게 거슬리던 햇살이.

오늘따라 따스하고 기분 좋게 느껴지는 정렬이었다.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는군. 빨리 다음 달이 왔으면 좋겠어.’

2월이 돼서 공모결과가 나오고 공사비가 집행되면.

이 엑셀 파일 안에 적힌 십억이라는 돈은 정렬의 것이 된다.

그 상상을 떠올린 정렬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부르르 떨었다.

“흐, 흐흐흐!”

그런데 정렬이 그렇게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정렬의 집무실 문을, 누군가가 두들기기 시작하였다.

쿵- 쿵쿵-!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정렬의 표정은 순식간에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레 노크한 것도 아니고 거슬릴 정도로 세게 두들기는 소리였으니,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른 것이다.

‘어떤 새끼가 버릇없이……!’

요즘 회사 안에서,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대표마저도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정렬은 감히 누가 이렇게 요란스레 자신의 집무실 문을 두들기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야?!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쾅-!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정렬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열린 문 안으로 까만 정장을 입은 웬 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밀려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제야 정렬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벅- 저벅-

하얗게 질린 표정의 정렬을 향해, 한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이어서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렬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서울 서부지검에서 나왔습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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