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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135화 (135/315)

135화

자승자박

“야, 알바 한 번 해볼 생각 없냐?”

우진의 지인 중에는, 성동구민이 몇 명 더 있었다.

“응 웬 알바? 이미 모형 인턴으로 열심히 굴리고 있으면서.”

그 중 하나는 바로, 성수동에 살고 있는 소연.

“그거 말고, 좀 다른 거야. 짬날 때마다 그냥 가볍게 할 수 있는 거.”

“그게 뭔데?”

“너 혹시, 민원 넣어봤냐?”

“민원……?”

WJ 스튜디오가 있는 위치이자 소연이 사는 곳인 성수동 또한, 성동구에 속한 지역구였던 것이다.

“너 동생도 둘 있지?”

“이, 있긴 한데…….”

“얼마 전에 수능 끝난 동생 하나 있지 않아?”

“맞아.”

“부탁 좀 하자.”

“…….”

“지금 심심할 시기 아냐.”

“친구들이랑 잘 놀러 다니던데.”

“용돈 준다고 해. 넉넉히 줄게.”

“용돈이라니. 아깐 알바라며.”

“알바비는 내가 너한테 주는 거고, 용돈은 네가 동생한테 주는 거지.”

소연뿐만이 아니었다.

WJ 스튜디오가 완전히 성수동에 자리 잡은 뒤, 직주근접을 위해 회사 인근으로 이사 온 몇몇 직원들까지.

“진태 형. 형도 좀 하자.”

진태를 비롯한 대여섯 명의 직원들도, 민원에 동원된 것이다.

“갑자기 웬 민원이야. 나 이런 거 태어나서 한 번도 안 해봤어.”

“형이 민원 넣을 때마다, 월급이 조금씩 오른다고 생각해.”

“조금 혹하긴 하는데…….”

“그냥 밥 먹기 전에 한 번씩. 하루에 딱 세 번만 민원 넣자. 어때.”

“흠.”

“이번 달 인센티브 10퍼센트 올려드림.”

“콜.”

그렇게 우진은 제법 많은 성동구민을 확보할 수 있었고.

“부장님,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오냐. 공모마감까지 일주일이라고 했지?]

마지막으로 이 계획의 설계자인 경완에게, 진행 상황을 보고하였다.

“네.”

[그럼 심사는 한 한 달 걸리나?]

“맞아요. 그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와이프한테 얘기해 놓을게.]

“흐흐, 형수님. 믿습니다.”

[걱정마라. 민원에도 클라스라는 게 있거든.]

“클라스요?”

[원래 민원도, 당해본 사람이 더 잘 넣는 법이야.]

“…….”

[무작정 물량 공세가 답은 또 아니거든. 공무원 기분을 너무 나쁘게 하면 안 돼. 이게 또 결국 다 사람이 하는 일이잖아?]

“민원학…… 개론입니까?”

[크크, 그런 셈이지.]

경완과의 전화를 끊은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신나 보이는 경완이었다.

‘형수님 알바비를 짭짤하게 드려서 그런가?’

딸깍- 딸깍-

대표실 컴퓨터에 앉은 우진은, 경완이 준 가이드에 따라 첫 번째 민원을 발송하였다.

그리고 얼굴 모르는 누군가를 향해,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묵념하였다.

‘조금. 아니, 조금 많이 귀찮으실 수도 있겠지만……. 잘 좀 부탁드립니다. 화이팅!’

그렇게 시작된 민원 설계(?)와 함께,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 * *

태호건설의 상무이사 윤정렬은, 최근 기분이 무척 좋았다.

지난 삼 년 가까이 지지부진하던 회사 실적이, 올해는 확실히 반등할 근거를 확보했으니 말이다.

그것은 바로, 왕십리 민자사업의 시공권을 따냈다는 것.

이것을 위해 꽤 많은 로비 비용이 들어갔지만, 그래도 총공사비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공사 한 건만으로, 작년 매출 이상을 상반기에만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었으니까.

‘흐흐, 이건만 잘 풀리면, 내년에는 전무까지도 바라볼 수 있겠어.’

윤정렬이 상무가 된 것은, 바로 작년이었다.

그 이전까지 최악으로 치닫던 영업실적을 책임지고 퇴사한 선임 자리에, 그가 부임한 것이 1년 전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임원으로 승진했음에도 불구하고, 3개월 전까지는 그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사실 상무 발령 자체가, 시한부 선고 느낌이었달까.

그때까지는 전년도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는 수준에서 회사가 굴러가고 있었으니, 이대로라면 그도 옷을 벗어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 구세주같이 등장한 기회가, 바로 패러마운트라는 회사였다.

패러마운트에 근무하던 정렬의 학교 후배가 사업 TF팀과 정렬을 연결해 주었고, 정렬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은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패러마운트의 집행부에서도 조금 난색을 표했었다.

아무리 인맥으로 소개받은 회사라 해도, 태호건설의 재무상태나 시공능력 평가도가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정도 사소한(?)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연봉의 두 배쯤 되는 돈을 현찰로 꽂아 주는데……. 안 받고 배기나.’

로비 과정에서 남은 부스러기들은, 정렬의 주머니에 그대로 들어갔다.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어차피 결과만 좋으면 된 것 아닌가?

정렬이 아니었다면 태호건설에서 비벼볼 수도 없었을 만한 굵직한 사업권을 따왔으니, 오히려 그 정도는 챙기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망해가는 회사 살려놨는데, 이정도야 뭐.’

회사 내 대우도,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다른 임원들은 정렬의 눈치를 보기 바빴으며, 대표이사는 회사에서 그와 마주칠 때마다 입에 침을 튀어가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이렇게까지 회사생활이 잘 풀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탄탄대로가 깔린 것이다.

하지만 그 탄탄대로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이번 주 초부터였다.

정확히는 패러마운트 실장으로 있는 후배로부터, 전화를 받은 때부터였다.

“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A&C로 무조건 밀어주겠다며?”

[그, 그게……. 죄송합니다, 선배님. 구청에서 감사가 들어왔어요.]

“뭐라고?”

[설계 공모 심사과정을 전부 다 구청 홈페이지에 공시하라고…….]

“갑자기 왜?”

[민원이 들어왔나 봐요. 공공성 있는 사업인데, 깜깜이로 진행되는 게 말이나 되느냐.]

“그게 무슨 개 뼉다구 같은 소리야? 공사가 시작된 것도 아닌데 민원이 오는 게 말이나 돼?”

[제 말이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민원이 들어와서, 지금 저희 본사 TF팀도 골치 아파 죽겠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정렬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태클이 들어올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시공사 선정까지야 다른 업체에서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해도, 설계 공모 결과가 나온 뒤에는 반발이 충분히 있을 만하니까.

하지만 공모 결과가 나오고 나서는 일사천리로 밀어붙이면 그만이다.

대응책도 전부 다 생각해 뒀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의 태클은, 전혀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황당하네 진짜.’

태클이 걸리려면 누군가에게 불만스러울 만한 실질적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 법인데, 아직까지 태호에선 대외적으로 아무런 제스쳐도 취하지 않았으니까.

‘내부 플랜이 경쟁사로 샜나? 말이 안 되는데.’

공사가 시작된 뒤에야, 민원이 들어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공사판과 민원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

하지만 그때는 상관없다.

이미 삽을 뜬 뒤에는, 어지간해서는 엎어지기 힘들었다.

한번 시작된 공사가 엎어지는 것은, 시공사의 손해보다도 공공의 손실이 더 큰 일이다.

‘하, 씨발. 어떡하지?’

머리를 굴려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공모 심사에, 구청에서 직접 관여하겠다는 건 아니지?”

[다행히 그런 얘기까진 없었는데……. 공시 올리는 것 자체가 문젭니다.]

“으으……. 그럼 결국 공모 올라온 설계는 전부 다 오픈해야 된다는 거잖아?”

[그렇죠.]

“A&C 설계가 가장 좋았다고, 어떻게든 우겨봐야 하나?”

[사실 당선이 납득될 만한 퀄리티의 설계가 올라오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왜?”

[이번 공모에 브루노 산체스가 참여했거든요.]

“용산에 글래셜 타워 설계한 그 할배?”

[네. 그 사람이요.]

“미쳐버리겠네, 진짜.”

브루노의 이름을 들은 정렬의 얼굴이, 더욱 까맣게 죽어버렸다.

사실 브루노의 실제 디자인 설계 실력보다는, 그 이름이 가진 인지도가 문제였다.

디자인을 떠나 A&C의 설계도에는 상당 부분 공사비용을 뻥튀기시킬 수 있는 설계가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세계적인 건축가가 공모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설계를 채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언론에서도 집중적으로 조명받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니 말이다.

말을 잃은 정렬의 귓가로, 다시 후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실무진이랑 얘기 좀 해 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구청 권고, 쌩까면 안 되겠지?”

[그걸 한 번 알아보려고요. 한번 슬쩍 떠보고, 안될 것 같으면…….]

“안될 것 같으면, 뭐?”

[저희도 어쩔 수 없죠, 선배.]

후배의 대답을 들은 정렬은, 순간적으로 열이 뻗쳐올랐다.

이미 현찰로 넘어간 돈은 회수할 방법도 없는 상황인데, 후배로부터 무책임한 말을 들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야, 그렇게 무책임한 게 어딨어! 우리가 그쪽에 바른 돈이 얼만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돌아오는 건 당연히 냉정한 대답일 뿐이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십니까, 선배. 일단 저희는 최대한 노력했고, 사실상 시공권까진 이미 드렸잖아요?]

“후우…….”

[설계비용은 사실 전체 파이의 1할도 안 되는 수준인데……. 그걸 가지고 무책임하다고 말씀하시면 안 되죠.]

후배의 이야기 중 틀린 얘기는 없었기에, 정렬은 우선 사과하였다.

흥분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일단은 좀 차분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 미안하다. 내가 너무 흥분했네.”

[여튼, 결과 나오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연락 기다릴게.”

[예 선배.]

뚝-

후배와의 전화를 끊은 정렬은,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사실 후배의 입장에선 시공권이 설계 공모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으니 말이다.

정렬을 비롯한 태호건설에서, A&C팩토리의 설계권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A&C 나가리 되면……. 남는 게 진짜 아무것도 없을 텐데.’

태호건설에서 패러마운트에 뿌린 수십억의 돈.

그 돈을 회수하고 그 이상의 금액을 남겨 먹기 위해서는, 설계사와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할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설계비용을 뻥튀기하고, 또 자재를 빼돌리는 것으로 충당하려 계산해 뒀던 백억 이상의 금액이, 눈앞에서 증발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

그 안에서 정렬의 몫만 최소 수억 이상이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눈이 돌아갈 만한 것이다.

‘방법이 없나? 진짜 외통수인가?’

민원을 넣었다는 사람을 찾아가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런 감정적인 생각은 아무 의미 없다.

그래서 정렬은, 조금 더 위험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툭-

휴대폰을 다시 든 정렬은, 어딘가를 향해 다시 전화하였다.

“어, 정수야. 난데.”

[하하, 정렬이.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너 혹시, 성동구청 쪽에 아는 사람 있냐?”

[성동구청? 그쪽은 왜?]

“내가 좀 급한 일이 생겨서…….”

[글쎄다. 최근에 그쪽으로 발령 난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상황이 좀 많이 급한데, 괜찮은 사람 한 명만 수소문해서 소개해 줘라.”

[괜찮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야?]

“그걸 꼭 찝어서 말해줘야 아냐.”

[흐흐. 급은 어느 정도?]

“최소 국장급은 돼야 할 것 같은데……. 도시관리국 쪽 인물이면 과장급도 괜찮고.”

[알겠다. 찾아보고 다시 연락하마.]

“그래, 고맙다!”

정렬이 생각해 낸 해결책은 결국, 더 많은 돈으로 더 많은 사람을 매수하는 것.

‘남는 게 좀 줄어들어도, 어쩔 수 없지. 손해 보는 것보단 낫잖아?’

하지만 이 순간, 그가 알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금 그의 이 선택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최악수였다는 사실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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