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지뢰 찾기
[야, 우진아.]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나도 석중 씨랑 연결 좀 해주면 안 되냐?]
“뭐야,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카페 프레스코 그거, 3호점은 내가 하면 안 돼?]
“고갱님, 이미 14호점까지 공사 중입니다만.”
[젠장.]
“갑자기 왜 그러는데?”
[방금 유리아한테 전화 왔어.]
“응?”
[자기 카페 대박 난 거 자랑을, 전화통에 대고 거의 20분 동안 하더라니까?]
“크크크, 나도 그 전화 받았어.”
[너도?]
“난 어제 밤에.”
[으아……! 배 아파! 나도 할래!]
“일단 카페 입점할 건물부터 한 채 준비해 와. 그러면 내가 한번…….”
뚜- 뚜- 뚜-
이른 오전부터 재엽의 유쾌한(?) 전화를 받은 우진은, 피식 웃으면서 나갈 채비를 하였다.
재엽은 반쯤 농담조로 얘기했지만, 우진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배가 아픈 것만큼은 진심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저께 오픈한 유리아의 카페 프레스코 2호점은, 정말 말 그대로 초대박이 터졌던 것이다.
“흐흐, 매출 들었으면, 아무리 재엽이 형이라도 배가 아프지 않을 수 없겠지.”
석중과 의논해서 메뉴를 전부 프리미엄화 시킨 것이 주효했다.
커피를 포함한 음료류는 기존 1호점의 메뉴와 완전히 같게 하되, 레옹 베이커리를 운영했던 석중의 노하우를 접목하여 디저트들을 최대한 고급화한 것.
가로수길 상권은 강남에서도 프리미엄 디저트에 대한 수요가 가장 많은 곳이었기에, 통할 수 있었던 마케팅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석중이 형님이 프리미엄 외식에 대한 이해도는 높으시다니까.’
솔직히 우진은 이삼 만 원짜리 디저트 메뉴에 회의적이었다.
그로서는 머리털 나고 그런 비싼 디저트를 먹어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석중의 이야기가 일리가 있었으며 리아 또한 그의 의견에 찬성했고.
그 때문에 두 사람의 의견에 맞춰서 마케팅 전략을 수립했다.
결과는 이렇게, 대박이 났고 말이다.
‘첫날 매출이 몇 천 단위가 넘었다고 했나? 오픈빨이야 있겠지만……. 나도 혹할 정도였지.’
우진은 전에 석중이 가져온 자료에서, 국내에서 압도적인 파이를 가지고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 매장의 상위 매출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확인했던 매출 규모는, 월 2억~3억 수준.
인천공항에 있는 전국 최고 매출의 매장이 월 5억 가까운 매출을 기록한 적도 있다 하였는데, 이 기세대로라면 유리아의 매장도 충분히 그에 준하는 매출을 달성할 듯 보였다.
물론 세입자를 들였어도 한 달에 1억 가까이 월세가 나올 건물이긴 했지만, 그 몇 배 이상의 순이익을 뽑아낼 수 있는 수익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게다가 전 층을 다 카페 프레스코 매장으로 쓰다 보니 공실 걱정할 일도 없었으며.
이 성업이 몇 달 이상 지속된다면, 건물 가치도 어마어마하게 오를 터였다.
리아가 카페를 차린다고 할 때 고민하다 포기했던 재엽으로서는, 충분히 배가 아플 만했다.
‘뭐, 리아 누나가 잘 되면 좋은 거지. 다음에 만나면 생색 좀 왕창 내야겠어.’
흥얼거리며 집 밖으로 나선 우진은, 차에 시동을 걸고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 WJ 스튜디오에는, 방문하기로 한 중요한 손님이 한 명 있었다.
* * *
“오, 여기가 우진의 사무실이군요.”
“하하, 멀리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는 제가 가려고 했었는데…….”
“아, 아닙니다. 우진의 사무실을 한번 구경하고 싶기도 했고……. 사실 그렇게 멀지도 않았어요.”
오늘 우진을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브루노였다.
지난 토요일 브루노에게 받은 왕십리 복합몰 프로젝트의 설계도를 가지고, 회의를 한 번 하기로 한 것이다.
해서 성수동 WJ 스튜디오에 도착한 브루노는, 우진의 사무실에 도착하여 감탄부터 했다.
그는 우진이 자신의 사무실을 이렇게까지 잘 꾸며놨을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지난번에 우진의 사무실도 제 사무실과 별다를 것 없을 거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거, 사과부터 해야겠군요.”
“예?”
“이렇게 인테리어를 멋지게 해 놓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제 누추한 사무실과는 비교가 되질 않는군요.”
“하하, 아닙니다. 그냥 여기가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깔끔한 것뿐이지요.”
브루노의 칭찬과 함께 기분 좋게 회의실에 들어온 우진은, 직원이 미리 세팅해 놓은 스크린을 켜고 컴퓨터를 연결하여 회의 자료들을 올렸다.
그러자 PDF파일로 묶인 수백 장의 도면이, 그대로 스크린 위에 떠오른다.
이것만으로도 왕십리 복합몰 프로젝트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건축물 전체의 연면적이야 청담 선영 아파트단지보다 훨씬 좁지만, 설계 규모 자체는 비슷한 수준인 대형 프로젝트인 것이다.
아파트는 같은 타입의 평면이 수십 세대 이상 겹치는, 모듈(Module)*[여러 개가 모여 완제품을 구성하고 있는 단위 부품. 또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단위.]형 설계였으니까.
스크린을 힐끔 본 브루노는, 직원이 내어 온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함께 온 브루노의 통역 또한, 그 옆에 조심스레 짐을 내려놓고 앉았다.
“지난주는 좀 쉬셨습니까? 청담동 프로젝트로 고생 많이 하셨을 텐데……. 저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또 뉴 프로젝트에 끌려 들어오셨군요.”
브루노의 말에 우진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처럼 <청담 클리오 써밋> 프로젝트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새 프로젝트에 발을 담근 셈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번 프로젝트는, 부담이 훨씬 덜했다.
어쨌든 왕십리 프로젝트는 브루노가 메인이었고, 우진은 단지 서포트를 해주는 개념이었으니까.
“괜찮습니다. 뭐, 일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게 행복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렇지요. 건축가에게 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좋다는 방증이겠죠.”
회의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나자, 브루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요?”
“좋습니다, 브루노.”
그리고 우진이 먼저, 준비해 둔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기 시작하였다.
* * *
우진이 브루노의 설계를 검토하는 데에는, 대략 이삼일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크리스마스 전주에 하루 정도 전반적으로 훑어본 뒤.
바로 어제와 그제 본격적인 분석을 끝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설계 분석 과정에서 우진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역시 브루노’라는 점이었다.
세계적인 거장답게 브루노의 설계는, 상상 이상으로 창의적이고 짜임새 있었으니 말이다.
‘이 설계대로 왕십리에 복합몰이 들어가면……. 진짜 볼만 하겠네.’
거기에 한 가지 더.
우진은 이 설계에 감탄한 만큼, 속으로 짐작만 하고 있던 한 가지 의심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 의심은 왕십리 프로젝트에 브루노가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생겨났던 것이었는데.
이곳 설계의 공모 과정에서 뭔가 비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브루노의 이 설계가 공모에 들어갔는데, 이걸 떨어뜨리고 그 구닥다리 설계로 시공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이건 조금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우진의 전생에서 브루노는 글래셜 타워를 이후로 한국에서 다시 프로젝트를 하지 않았었는데.
우진은 그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브루노는 분명 자신의 설계가 떨어진 뒤 어떤 건축물이 당선되고 지어지는지 확인했을 테고.
그것을 본 순간 적잖이 실망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우진의 이 짐작은, 어느 정도 맞는 내용이기도 하였다.
‘물론 한국 복합몰 감성에 조금 맞지 않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그냥 이 설계대로만 가도 충분히 랜드마크가 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회의 초장에 이런 얘기부터 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진이 아무리 확신한다고 한들, 그 비리라는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일단 우진은 본래 회의의 목적에 부합하는, 건축설계와 디자인적인 측면에서의 이야기부터 먼저 풀어 놓았다.
공모 비리라는 미래의 걸림돌을 어떻게 치울지는, 브루노와 상의할 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브루노의 설계를 보면 이 가운데 지하에 크게 중정(中庭)*[본래 집 안의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마당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건축물 가운데에 뚫려있는 정원. 혹은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을 뚫어 놓으셨는데, 결국 지상 유리천장으로부터 들어오는 자연채광을 살리시려는 게 목적이겠죠?”
“바로 그렇습니다, 우진. 설계에 주어진 공간의 30퍼센트 정도가 지하 혹은 반지하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렇게 하면 그 공간도 지상층 같은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기왕 중정을 크게 만드는 김에, 건축물의 남쪽 외벽 일부 설계를 글래셜 타워처럼 통유리로 바꾸는 건 어떻습니까?”
“오호, 이 부분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외부 진입로에서 중정 디자인을 내려다볼 수 있게 시야도 확보되니, 훨씬 더 다채로운 공간이 연출될 것 같아서 말이죠.”
“Great! 구조설계를 돌려봐야 가부를 알 수 있겠지만, 확실히 그렇게 디자인을 변경하면 더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 수 있겠군요.”
당연한 얘기겠지만, 우진의 제안들은 거의 브루노가 먼저 만들어놓은 디자인 컨셉과 아름다움을 조금 더 부각시키기 위한 아이디어들이었다.
물론 브루노가 그 모든 제안들을 전부 수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우진의 설계에 대한 인사이트가, 그만큼 많이 발전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하, 역시 오늘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과찬이십니다, 브루노. 오히려 제가 브루노의 설계를 분석하면서, 배운 부분이 정말 많았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열띤 회의는,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회의 내용을 기록하기 위해 들어와 있던 WJ 스튜디오의 직원이, 중간중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열정이었다.
“왕십리의 주변은 대학가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브루노.”
“그야 이미 사전 조사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스트릿 아울렛 분위기의 좀 더 젊은 감성으로 매장을 꾸밀 생각을 했던 것이고요.”
“저는 그 부분에서 브루노가 간과하신 점을 하나 짚어드릴까 합니다.”
“오호, 제가 발견하지 못했던 뭔가가 있는 겁니까?”
“지금의 왕십리는 대학가, 젊은 층 위주의 유동인구가 형성되어 있지만……. 이 건물이 완공될 시점이 넘어서면 얘기가 좀 달라지니까요.”
“어떻게 달라집니까?”
“왕십리 뉴타운이 얼마 전에 첫삽을 떴습니다.”
“……!”
“이쪽, 여기부터 여기까지.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온다는 얘기지요.”
우진은 회의실 한쪽 벽에 걸려있는 서울 지도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서울의 주요 대기업들과 금융권 회사들은, 대부분 강남과 종로, 그리고 여의도에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 왕십리는, 이 지역들까지 단시간 내에 도달할 수 있는 훌륭한 위치에 입지해 있죠.”
일견 건축디자인에서 조금 벗어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브루노는 우진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때문에 이 왕십리 뉴타운은 꽤 많은 고액 연봉자들이 선호하는 주거지역으로 탈바꿈될 겁니다.”
“훌륭한 직주 근접의 요건을 갖춘 뉴타운이라는 이야기죠?”
“그렇습니다, 브루노.”
“쇼핑몰 디자인의 타겟 연령층을, 조금 더 상향 조정할 필요가 있겠군요.”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 브루노의 이해력에, 우진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바로 그렇지요. 저는 이 왕십리 복합몰의 주요 수요층이, 3040세대를 아우르는 젊은 부부가 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우진의 이야기를 듣는 브루노는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그가 우진에게 기대했던 부분이, 바로 이런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현지인이 아니라면 쉽게 알 수 없는, ‘입지’와 ‘문화’에 대한 이런 디테일한 통찰력들.
그래서 오늘 회의가 끝날 즈음.
브루노는 우진에게 정식으로 제안했다.
“만약 이번 공모에서 제 작품이 당선된다면, 실시설계 단계부터는 WJ 스튜디오와 함께하고 싶군요.”
“하하, 이미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이 아닙니다.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고 싶다는 말이지요.”
브루노의 이야기에, 우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공모에 당선된 뒤에는, 당연히 브루노가 모국에 있는 자신의 설계사무소 본사와 일을 하려 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놀란 것과 별개로 이런 매력적인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는 것.
‘어떻게든 냄새나는 쓰레기들을 치워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
우진은 브루노가 내민 주름진 손을 맞잡으며 빙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브루노. 실망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동기부여가 더 크게 된 탓인지, 우진의 머릿속이 좀 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