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Adios 2010
우진의 염려대로 두 바보들은, 파티에 도착하자마자 연예인들의 사인부터 수집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대충 3층에만 유명한 연예인이 열 명도 넘게 보였으니, 눈치를 챙기기는커녕 이성(?)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파티에서 사인을 수집하는 녀석들은 석현과 제이든뿐이었기에 우진은 꽤 부끄러웠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다들 유쾌하게 두 사람에게 사인을 건네줬다는 점이었다.
능글맞은 석현과 제이든이, 그래도 비호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재엽도 피식 웃으며 두 사람을 슬쩍 응시했고, 리아는 제이든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저 친구들 귀엽네.”
재엽의 말에, 리아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우진에게 물었다.
“외국인 친구는 대체 언제 사귄 거야?”
우진은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학교 동기야.”
“아, K대 디자인과?”
“후우……. 쪽팔려……. 모르는 척하고 싶다. 역시 괜히 데려왔어.”
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쉬자, 뒤늦게 도착한 수하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왜, 재밌는 친구들인데.”
리아도 동의했다.
“그러게. 저래야 20대 초반 같지. 우진이 네가 너무 아저씨 같은 거야.”
“뭐야. 여기서 갑자기 또 왜 날 공격하는 건데?”
철면피를 깔고 여기저기서 사인을 수집한 탓인지, 아니면 상상을 초월하는 제이든의 친화력 덕분인지.
석현과 제이든은 예상보다 빨리 파티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둘이 알아서 잘 놀기 시작한 덕에, 우진도 맘 편히 아는 얼굴들에게 인사하며 파티를 즐길 수 있었다.
아는 얼굴이라 봐야 거의 <우리 집에 왜 왔니> 식구들이었지만 말이다.
“피디님도 오셨네요!”
“오, 서 대표님! 저야 당연히 왔죠. 리아 씨가 불러주시는데, 안 올 수는 없잖아요?”
공진영 PD부터 시작해서 촬영감독, 그리고 스타일리스트 등등.
“앗, 송 감독님! 예인 씨도 왔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우진이 마냥 아무 생각 파티를 즐기기만 할 수 있던 것은 아니다.
기왕 이런 파티에 초대받은 이상, 원래 알던 얼굴들뿐 아니라 다른 연예계 관계자들과도 하나둘 안면을 터야 했으니 말이다.
파티장 분위기가 유쾌하고 즐거운 것과 별개로, 곳곳에서는 비즈니스가 이뤄지고 있었고.
이것은 우진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기회였다.
리아의 인맥 대부분이, 우진의 잠재적 클라이언트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리아는 꽤 열심히 우진을 챙겨주었다.
“우진아, 저기 윤진이도 소개해 줄까?”
“엇, 서윤진 배우님?”
“나랑 동갑이라, 오래전부터 친했던 친구야.”
“처음 뵙네요. 배우 서윤진이라고 합니다. 서우진 대표님이시라구요?”
“아아, 넵! 저도 처음 뵙겠습니다. WJ 스튜디오 대표, 서우진이라고 합니다.”
우진과 재엽. 그리고 수하 등과의 돈독한 친분은, 확실히 연예계에서 파워가 막강했다.
수하가 이제 슬슬 인기를 얻고 본격적인 성장을 시작한 배우라면, 재엽과 리아는 지금도 이미 정상에 가까운 인기를 구가 중인 연예인이었으니 말이다.
다들 리아, 재엽과 친분을 만들고 싶어 했고 알아서 그들에게 다가오다 보니, 우진은 쉽게 많은 연예인들과 안면을 틀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진은, 새삼 재엽과 리아 등이 얼마나 황금 인맥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진짜……. <우리 집에 왜 왔니>에 합류한 건, 신의 한 수였던 것 같아.’
저녁 여섯 시 경쯤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파티는, 여덟 시, 아홉 시가 되도록 분위기가 식을 줄 몰랐다.
그리고 저녁 아홉 시쯤에는, 깜짝 손님도 한 명 파티에 나타났다.
“오……! 형님! 형님도 초대받으셨어요?”
“흐흐, 이래 봬도 내가, 리아 씨 동업자 아니냐. 초대해 주시길래 냉큼 놀러 왔지.”
“좀 더 일찍 오시지. 사람들 많이 다녀갔는데.”
“중요한 미팅 다녀온다고, 어쩔 수 없었어.”
그 손님의 정체는 다름 아닌 카페 프레스코의 창업주인 강석중.
“엇, 강 대표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습니다, 리아 씨.”
“제 매장, 처음 오신 거죠?”
“하하, 아무래도 그렇죠. 역시 우진이가 잘 완성해 놨네요.”
“후훗. 제가 마음에 안 들면 가만 안 둘 거라고 협박했거든요.”
재밌는 것은, 석중이 혼자 온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석중의 뒤에는, 깔끔한 차림새를 한 웬 미인이 한 명 따라 들어왔으니 말이다.
깔끔한 디자인이면서도 기본적으로 수백만 원 이상의 비싼 명품들만 입고 있는 그녀는 바로, 석중의 여동생이자 연예기획사 KSJ엔터테인먼트의 대표 강소정.
그녀를 발견한 우진의 두 눈이 살짝 확대되었다.
강소정은 우진이 갖고 있는 전생의 기억 속에서, 꽤 유명했던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연예계의 메이저 기획사의 대표들 중, 유일하게 여성이면서 능력이 좋기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뭐야, KSJ엔터 대표 강소정 아냐?’
그런데 우진은 강석중과 강소정을 둘 다 알고 있었지만, 둘이 남매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저 여자가, 왜 석중 형님과 같이 오는 거지?’
그래서 의아한 표정으로 석중을 향해 물었고.
“형님. 그런데 같이 오신 분은…….”
그 물음에 석중이 소개해 주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소정이 먼저 앞으로 나와 우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소정은 연예기획사 대표답게, 우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반가워요, 서우진 대표님. 오빠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KSJ엔터 대표 강소정이에요.”
“오빠…… 라면, 석중 형님이요?”
석중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응. 내 여동생이야.”
소정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맞아요. 별로 닮진 않았지만, 남매가 맞아요.”
소정이 내민 손을 맞잡은 우진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강소정 대표님. 절 알고 계신다니, 영광이네요.”
생각지도 못한 경로로 이어지는 인맥 덕에, 우진은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강소정은 석중과 마찬가지로 재벌 3세인 데다, 능력도 좋은 기획사 대표였으니.
장기적으로 아주 훌륭한 인맥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해서 그녀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명함을 챙겨 지갑에 넣은 우진은, 그새 명함 지갑이 터질 정도로 쌓인 명함들을 보고는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이것도 다 자산이지.’
오늘 안면을 트게 된 인맥들이 앞으로도 쭉 이어질 수 있을지.
이어진다면 우진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그것은 사실 미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우진으로서도, 결코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가능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우진의 역량에 달린 일이었고, 때문에 우진은 오늘 파티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어휴, 정신이 하나도 없네.”
그래서 우진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리아에게, 무척이나 고마웠다.
오늘 그녀 덕에 얻어가는 것이 정말 많다고 느꼈으니 말이다.
“피곤하면 바람 좀 쐬고 와, 누나. 얼굴도 좀 빨간데?”
“그래? 와인을 권하는 대로 계속 마셨더니, 조금 취기가 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멋쩍은 표정으로 웃던 리아가,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우리, 그럼 자리를 좀 옮겨 볼까?”
그녀의 말에, 재엽이 반문했다.
“자리? 어디로?”
“옥상 루프탑으로 가자. 거기 가면 시원하니 술도 좀 깰 거야.”
수하가 물었다.
“춥지 않을까?”
그에 리아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그렇게 안 추울걸. 루프탑에도 반쯤 실내인 공간들이 있어.”
* * *
루프탑은 리아의 말대로, 그리 춥지 않았다.
오히려 가로수길의 경치가 멋들어지게 보이는 경관 때문인지,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한 기분이었다.
여기도 물론 사람이 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참 북적거리던 분위기는 지나간 듯했다.
밤이 깊어지자 친한 인물들끼리 두런두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리아와 재엽 등이 먼저 루프탑으로 올라간 뒤, 흥분한 석현과 제이든을 조금 놀아주던 우진도.
결국 다시 <우리 집에 왜 왔니> 멤버들과 모여 앉았다.
“친구들은? 집에 갔어?”
리아의 물음에, 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 대답했다.
“석현이는 강제로 집에 소환된 것 같고……. 제이든은 사라졌어.”
“음? 그 한국말 잘하는 영국인?”
“응. 2층에 있던 디자이너 여성분들이랑 신나서 놀고 있는 것까진 봤는데, 어느 순간부터 안 보이더라고.”
재엽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 친구, 재밌게 잘 노네.”
“후우……. 어디 가서 사고라도 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우진이 한숨을 푹 쉬며 말하자, 재엽이 웃으며 다시 대꾸하였다.
“에이, 제이든 연상들한테 인기 좋던데? 어디서 같이 수다 떨면서 놀고 있겠지, 뭐.”
“제이든이 인기가 많다고?”
“키도 크고 잘생겼잖아.”
“그럼 뭐해, 허당인데.”
“크크크.”
이제 거의 자정이 다 되어 갔지만, 이야기는 끊일 줄을 몰랐다.
다들 친분에 비해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으니,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잘 없었던 것이다.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재엽이 불쑥 지난 금요일의 일을 꺼내기도 하였다.
“그나저나, 서우진. 그날은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그날? 무슨 말이야.”
“종합운동장에서 말이야. 총회 끝나고 잠깐 얼굴이라도 보려 했더니, 순식간에 어디로 휙 사라져 버리데?”
“아아. 그날은 어쩔 수 없었지. 건설사 회식도 잡혀 있었고, 조합장님이랑 이야기할 것도 좀 있었고.”
“쩝. 하여간.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서우진 영접하는 게 훨씬 더 힘들다니까.”
재엽이 투덜거리자, 옆에 있던 수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총회? 무슨 총회.”
이번에는 리아가 입을 열었다.
“언니, 그 영상 못 봤어?”
“음? 웬 영상?”
“우진이 쟤, 완전히 연예인 다됐더라고.”
“으응……?”
“그 무슨 시공사 총회?”
“시공사 선정 총회.”
재엽이 말을 정정하자 힐끔 그를 째려본 리아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거기서 우진이가 뭐 발표 같은 걸 하던데, 혀에 아주 기름이 좔좔 흐르더라니까?”
재엽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덧붙였다.
“맞아. 난 현장에서 봤는데……. 뭐, 거의 혓바닥을 기름통에 담궜다 꺼낸 줄 알았어.”
두 사람의 이야기에, 수하가 눈을 반짝이며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와,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이야기를 듣던 우진은, 멋쩍은 표정이 되어 손사래를 칠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아, 다들 왜 그래. 별 것 아냐. 그냥 건설사 프레젠테이션을 한 것뿐이라고.”
우진의 당황하는 표정이 재밌는지, 재엽은 과장된 표정으로 우진의 성대모사를 하였다.
“아름다운 건축은……. 행복한 삶에 대한 약속이니까요.”
영상을 봐서 우진의 그 대사를 알고 있던 리아는, 폭소를 터뜨렸고.
“크히히히.”
수하는 닭살 돋는 표정으로 양팔을 쓸어내렸다.
“으, 뭐야. 소름 돋아. 진짜로 그랬어?”
“그랬다니까? 검색하면 영상 바로 뜰걸?”
한참 우진을 놀린 뒤, 대화의 주제는 계속해서 바뀌었다.
술이 들어가서인지 꽤 진지한 얘기들도 나왔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진행되었다.
하여 늦게까지 시간을 보낸 우진은, 거의 새벽 두 시가 다돼서야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사실은 졸음이 몰려온 탓에 한 시 쯤 먼저 가려고 했지만, 재엽이 붙잡은 탓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진은, 재엽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되어서야 함께 일어날 수 있었다.
“나 이제 진짜로 가 볼게 누나.”
“그래, 조심히 가.”
“누나는 언제까지 있게?”
“나도 이제 슬슬 정리하고 가야지 뭐.”
그런데 파티장을 빠져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취기가 오른 재엽은 우진을 놔주지 않았다.
술 마시고 운전하면 안 된다며, 기어이 우진을 자신의 집으로 끌고 가 재운 것이다.
“야 우리 집 십 분이면 걸어가. 방도 네 개나 있어. 아무 방이나 하나 줄게. 가자.”
그래서 결국 재엽의 집에 신세까지 진 우진은, 아침에 그와 해장국까지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나서야 집으로 귀가 할 수 있었다.
마치 회귀 전 어렸던 시절, 현장 선배들과 밤새 한잔하고 해장국을 때리던(?) 그때의 감성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래, 뭐…….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거지.’
12월 24일 밤은, 즐거운 추억과 몇몇 새로운 인연들을 남겼다.
꽤나 특별하고 조금은 별났던 우진의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잔잔히 흘러 지나갔고.
이틀이 더 지난 12월 27일.
드디어 유리아의, 카페 프레스코 가로수길점이 오픈하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