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Adios 2010
“야 이 미친놈아!”
“제가 왜 미친놈입니까?”
“미쳤어! 그냥 미쳤다고!”
“하하하.”
“네가 해냈어! 이 미친 꼬마 놈아!”
천웅건설의 승리가 발표 난 순간.
경완은 미친 듯이 자리에서 뛰어나와, 우진을 얼싸안았다.
준비야 이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많이 했다고 생각했다.
우진과 WJ 스튜디오도 애썼지만, 그 못지않게 경완과 TF팀도 몇 날 밤을 새워가며 열정을 불살랐으니 말이다.
지난 한두 달 정도는 이 프로젝트에 인생을 갈아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최선에 최선을 다했던 경완과 천웅건설의 관계자들.
하지만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모든 결과가 잘 나온다는 법은 없다.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 꼭 최고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바라 마지않았던 이 최고의 결과가 나온 순간.
경완은 전율했고, 또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결과는 그 모든 고생을 단숨에 보상받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큭, 크흑……!”
붉어진 경완의 눈시울을 보며, 우진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부장님, 지금 우는 겁니까?”
“울긴! 누가! 안! 울어!”
“그럼 광대 밑으로 흐르는 그 투명한 액체는 뭡니까?”
“더, 더워서 그래! 땀이야 인마! 크흡!”
“12월인데, 광대에서 땀이 나요?”
“제기랄. 그렇다면 그런 줄 알어.”
과장된 경완의 반응에, 우진이 낄낄거리며 다시 말했다.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
“부장님 광대에 땀 같은 거 안 났다고요. 크크크.”
우진이 놀렸다는 것을 깨달은 경완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기분 나쁠 리는 없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 자체가, 그는 그저 행복했으니 말이다.
“후우우……. 오늘은 기분 좋으니까 봐준다.”
솥뚜껑 같은 손으로 우진의 등짝을 팡 하고 두들긴 경완은, 속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한번 훔쳤다.
이어서 둘은 다른 천웅 관계자들과 함께 단상 위로 올라섰다.
그들을 믿고 투표해 준 조합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사실상 어지간한 건설사의 한 해 매출을 책임질 정도로, 커다란 수주권을 따낸 천웅건설.
관계자들은 일제히 조합원들을 향해 큰절을 올렸고, 우진도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그에 동참했다.
수주전마다 승리한 건설사에서 조합원들을 향해 큰절을 올리는 것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우진도 딱히 거부감은 없었다.
전생에도 많이 겪어본 일이니까.
게다가 사실, WJ 스튜디오에도 수십억의 매출을 안겨준 조합원들 아닌가?
‘큰절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도 할 수 있지.’
하여 이렇게 기분 좋은 분위기 속에서 총회는 모두 마무리되었고.
조합원들이 가장 먼저 총회장을 빠져나갔다.
이어서 우진과 경완도 바깥으로 나가려는데, 조합장 곽홍식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두 분, 바쁘십니까?”
홍식의 물음에, 경완이 기분 좋게 웃으며 답했다.
“하하, 바쁠 일이 있겠습니까. 총회도 다 끝났는데요.”
“바로 천웅건설 회식 잡혀있는 것 아닙니까?”
“그, 물론 그렇기는 한데…….”
경완의 말에, 홍식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게 10분 정도만 시간을 좀 주시지요.”
“그 정도야 어렵지 않습니다.”
경완의 대답을 들은 홍식이, 이번에는 우진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서 대표님도, 가능하실까요?”
우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홍식이 두 사람을 부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발표 마지막 순간, 우진이 꺼내 들었던 조커 카드.
추가될 조합원 분담금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몇 가지 묻고 싶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건축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시공사 선정 총회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관리처분이라는 큰 산이 남아있었고.
그래서 홍식은 우진이 언급했던 방안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을 들어보고 싶었다.
당장 12월 말에는 관리처분 계획을 제출할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홍식이 가장 먼저 꺼내 든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었다.
“분양가를 최대한 높여서, 그것으로 조합원 부담을 줄여보겠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진이 대답했다.
“그랬지요.”
“만약 미분양이 난다면, 그것을 천웅이 안고 가겠다고 하셨고요.”
이번에는 경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에 잠시 뜸을 들인 홍식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천웅에서는, 감당 가능한 최대 분양가가 얼마쯤 되겠습니까?”
“예?”
경완의 반문에, 홍식이 다시 말했다.
“다음 주쯤, HUG*[주택도시보증공사]에 분양가 제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그렇게나 빨리요?”
“빨리 움직여야지요. 재건축은 시간이 생명 아닙니까.”
홍식의 이야기에, 우진은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가 일 잘하는 조합장이라는 것은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 이렇게 큰 행사가 끝난 날까지 곧바로 다음 스텝에 대해 이야기할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업 진행이 빠른 것은 천웅과 우진의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었고, 때문에 우진은 기꺼운 마음으로 대답하였다.
사실 홍식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생각해 두고 있었던 부분이었으니까.
“제가 생각하는 분양가 마지노선은, 평당 3950입니다.”
그리고 우진의 대답이 이어진 뒤.
이번에는 홍식이 경악한 표정으로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예……?!”
우진이 제시한 평당 3950이라는 분양가는, 원래 조합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3300만 원보다 무려 650만 원이 높은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우진과 천웅이 감당 가능하다고 이야기할 만한 최대 분양가를 3500선으로 생각하고 있던 홍식으로서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수치였다.
경완은 이미 우진과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건지 담담한 표정이었고, 놀란 홍식을 향해 우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사실 3950까지 저희가 감당 가능하다고 해도, 그 가격에 승인이 나지는 않을 겁니다. 최근 HUG가 분양가 산정을 후하게 봐주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역대급으로 비싼 분양가니까요.”
우진의 차분한 이야기에 정신을 차린 홍식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서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사실 3600 정도만 도, HUG에서는 꽤 난색을 표하겠지요.”
HUG는 건설사의 분양을 보증해주는 역할을 한다.
분양보증이란 건설사가 부도 등의 악재로 사업을 이어가기 어려울 경우, 소비자에게 입주금을 돌려주거나 해당 사업을 승계해 건축물을 완공시키는 방식으로 입주자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개념이다.
건축물을 짓기 전에 분양부터 진행하는, 선 분양 방식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인 것이다.
그래서 HUG입장에서는, 보증 금액이 클수록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홍식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고, 그 말을 우진이 이어받았다.
“그래서 제가 드리는 말씀은, 조합장님께서 능력껏 HUG와 최대한의 분양가를 협상해 오시기만 하면, 저희는 그 분양가에 맞춰드릴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
“정말 3950이라는 고분양가를 따 내 오시더라도, 수용하겠습니다.”
우진의 이야기는 정말 파격적인 것이었다.
평당 3950만 원이라는 분양가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비싼 가격이었는데, 이 배짱 분양가로 분양 후 미분양이 되더라도 천웅에서 그 리스크를 감당하겠다고 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 수준의 분양가가 승인만 난다면, 조합원 추가 분담금은 오히려 다른 건설사 설계안보다 더 싸질 수도 있는 수준.
“괜……찮으시겠습니까?”
이것은 조합장인 홍식이, 천웅건설을 걱정할 만한 수준으로 파격적인 제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우진도 아무 생각 없이 이런 높은 가격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우진은 전생에 선영아파트 재건축으로 지어졌던, 청담 아르티아 리버뷰의 분양가를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르티아 분양가가 당시 평당 3450만 원정도였지. 그때도 고분양이라고 말이 많았지만, 완판은 물론 경쟁률도 꽤 높았어.’
청담동은 지금 신축에 목이 마른 상태였다.
서초 반포와 강남 역삼 도곡 쪽은 한창 신축이 지어지며 탈바꿈되는 시기임에도, 청담은 아직 재건축이 전혀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거기에 우진과 천웅이 만들어낸 프리미엄 설계가 마케팅 요소로 잘 포장된다면.
우진은 대략 평당 3600까지는 완판이 되리라고 보고 있었다.
사실 그래서 우진은 내심, 조합장이 3700만 원 이상의 고분양가를 승인받아오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야 미분양이 좀 나서, 우진의 몫까지 돌아올 테니 말이다.
‘3800쯤 봐도, 34평 기준 13억 정도야. 대충 3년 정도 뒤만 생각해도 엄청나게 남는 장사지.’
그래서 우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예. 괜찮으니까, 저희 걱정은 마시고……. HUG에서 최대한 고분양가 따와 보세요.”
“……!”
“이제 조합원 분담금 줄어드는 건, 조합장님 능력에 달린 겁니다.”
물론 우진의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홍식은, 감격에 겨운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서 대표님.”
홍식은 주름진 손으로 우진의 손을 꽉 맞잡았고, 그렇게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한 우진과 경완은 서둘러 회식 자리를 향해 이동하였다.
그리고 회식 자리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경완이 우진에게 투덜거렸다.
우진이 눈물 흘린다며 놀린 것이, 갑자기 다시 생각난 모양이었다.
“야, 서우진.”
“왜요.”
“고분양가 감당은 우리 천웅이 하는데, 왜 생색은 네가 내냐?”
그에 우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분양 되면 제가 제일 먼저 열 채 주워갈 거라니까요?”
“또 구라친다.”
“진짠데…….”
“어우, 구라쟁이.”
“아니, 불혹이 넘은 양반이 구라쟁이가 뭡니까, 구라쟁이가.”
“우리 처조카한테 배웠어.”
“…….”
티격태격하는 사이 택시는 회식 장소에 도착했고, 그날 우진과 경완은 정말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셨다.
평소에 술을 그리 즐기지 않은 우진도 오늘만큼은 술맛이 너무도 달달했고, 게다가 회식에 참석했던 WJ 스튜디오의 직원들이 우진을 가만두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우진이 집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세 시도 넘은 늦은 시간.
집에 들어온 우진은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기절해 버렸다.
피로가 겹친 상황에 술까지 들어가니, 몸이 그대로 방전된 것이다.
그래서 우진은 쓰러진 그대로, 다음날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우진이 그렇게 곯아떨어져 있던 그 시각.
아침 일찍부터 인터넷에 올라온 몇 개의 기사가, 폭풍처럼 커다란 이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서우진 전문가. 강남 재건축 수주전을 승리로 이끌어내다.]
[청담 클리오 써밋! 최고의 프리미엄 아파트를 설계한 서우진은 누구?]
[“아름다운 건축은, 행복한 삶에 대한 약속” 전문가 서우진의 건축 철학에 대하여.]
심지어 그 기사에 짤막하게 실린 우진의 영상들은, 인터넷을 통해 일파만파 퍼져가고 있었다.
* * *
WJ 스튜디오의 2010년 연말은,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신 피날레였다.
그렇지 않아도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던 WJ 스튜디오였지만, 청담 선영의 수주전까지 승리하면서 거의 메이저 설계사무소 급의 인지도를 얻게 된 것이다.
게다가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비단 청담 선영의 수주전뿐만이 아니었다.
가로수길 카페 프레스코 2호점은 어느새 완공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며, 석현이 맡은 모형 파트의 매출 또한 목표치를 훨씬 상회할 정도로 높은 수준을 달성했으니 말이다.
사실 모형 파트의 급격한 매출 상승은, 석현의 능력이라기보단 박경완의 보답이었다.
석현이 따낸 매출이 일억 정도라면, 경완이 천웅건설의 건축모형 외주를 몰아준 것이 거의 삼억 가까이 되는 규모였으니까.
우진이 수주전 발표를 멋지게 해낸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그러니까, 석구. 이 내기는 무효야.”
“아,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대표님! 약속은 지키셔야죠!”
“네가 만든 매출이 아니라, 부장님이 주신 거잖아!”
“그래도! 결과는 똑같잖아.”
“휴우. 너 그렇게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
“헤헤, 휴가 다녀와서 또 열심히 일할게. 그러니까 이번엔 약속한 대로 가자고.”
“좋아. 그럼 크리스마스까지 쉬는 거로 합의 보자고. 주말 포함하면 거의 일주일이야. 오케이?”
“홀리 씻! 콜!”
시공 파트 직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거의 일주일 가까운 휴가를 받아 낸 석현과 모형 파트 직원들은 환호했고, 그렇게 또 일주일이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 정도 굵직한 일들이 일단락되자, 우진도 조금 여유가 생겼다.
물론 물리적인 여유가 생긴 것과 달리, 머릿속은 쉴 틈이 없었지만 말이다.
‘내년 연초는, 왕십리 프로젝트로 바쁘겠지.’
시공사 선정 총회가 끝난 바로 다음 날, 우진은 숙취가 남아있는 채로 브루노의 사무실을 찾았었다.
그리고 그날 브루노로부터 받은 설계들이, 지금 우진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원인이었다.
‘일단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이 건은 내년부터 생각하지 뭐.’
내년이라 봐야 이제 일주일 남은 시점이었지만, 우진은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2010년 12월 24일, 금요일 오후.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는 저녁에, 우진은 신사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