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누구나 살고 싶은 곳
“주말 아침. A씨는 아침 일찍 쏟아지는 햇살을 느끼며, 기분 좋게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습니다.”
우진의 담담한 목소리가, 장내에 가득히 울려 퍼졌다.
“창문을 열자 밖으로 보이는 시원한 한강 뷰와 함께, 상쾌한 바람이 집 안을 가득 채웁니다.”
그가 한마디 할 때마다 화면이 넘어가면서, 그 이야기에 맞는 3D랜더링 컷이 스크린 위에 떠오른다.
“화장실에서 패킹된 목욕 도구를 간편하게 챙긴 A씨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5층으로 올라갑니다.”
“입주민 전용 카드키를 문 앞에 가져다 대자, 자동문이 열리면서 커뮤니티 센터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진이 청담 선영의 조합원들 앞에서 가장 먼저 보여준 것은 바로 스토리였다.
우진이 설계하여 조합원들의 앞에 들고나온 아파트인 청담 클리오 써밋 (Clio Summit).
미래에 이곳에 살게 될 입주민들의 생활을, 스토리로 만들어 풀기 시작한 것이다.
“커뮤니티 센터 입구에 위치한 사우나에서 기분 좋게 샤워를 한 A씨는, 개인 캐비넷에 목욕 가방을 집어넣고 수영복으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사우나와 이어져 있는 수영장으로 들어가자, 스카이 브릿지를 따라 개방된 탁 트인 한강 뷰가 다시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수영장에서 기분 좋게 아침 운동을 마친 A씨는, 조식을 먹기 위해 커뮤니티 레스토랑으로 향합니다.”
“스카이 브릿지 내의 계단을 타고 한 층 위로 올라가자, 역시나 환상적인 뷰를 자랑하는 커뮤니티 레스토랑이 A씨를 맞아줍니다.”
우진의 이 이야기가 다짜고짜 시작되었을 때.
처음 조합원들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다른 건설사들의 발표와는, 너무 다른 방식의 신선한 시작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우진의 목소리를 듣던 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그 이야기에 빠르게 몰입을 시작하였다.
결국 우진의 이야기 속에 있는 A씨는 미래의 조합원들이나 다름없었고.
미래의 자신이 주인공이 된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으니, 쉽게 몰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입주민 전용 카드키로 계산을 마친 A씨는, 맛있는 조식을 간단하게 먹은 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청소를 하지 않아 집이 더럽지만,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A씨는 곧바로 외출할 준비를 합니다.”
“A씨는 집을 나서기 전, 거실에 설치된 패드를 사용하여 컨시어지 서비스(Concierge service)*[고객의 요구에 따라 모든 것을 관리하고 처리해주는 가이드 서비스.]를 예약합니다.”
“집안 정리부터 시작해서 청소, 빨래까지. 비용은 조식과 마찬가지로 관리비에 더하여 청구되겠지만, A씨는 이 서비스를 자주 애용합니다.”
“A씨의 시간은 이 컨시어지 서비스로 인한 비용보다, 훨씬 더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것일 테니까요.”
명성건설이 조망권에 주력했고, 제운건설이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강조했으며, SH물산이 그들이 가진 첨단기술을 강점으로 내세웠다면.
우진과 천웅건설이 조합원들에게 내세운 것은, 지금껏 그 어떤 아파트에서도 볼 수 없었던 최고의 커뮤니티 공간과 프리미엄 서비스였다.
처음 발표 시작단계에선, 아파트 단지 디자인이 담겨 있는 조감도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그 어떤 몰입감도 없는 상태에서 보여주는 아파트의 디자인은, 그것이 아무리 뛰어나고 대단할지라도 공감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이 가장 먼저 보여준 것은 바로 그가 설계한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아파트에서도 볼 수 없었던 프리미엄 라이프 스타일.
이 공간에 살게 될 것이라는 상상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대감이 벅차오르게 만들 만큼 특별한 서비스들.
더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천웅에게 시공을 맡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대체 불가능한 특별한 가치를 보여주는 게 우진의 목표였던 것이다.
‘어지간한 수준으론 안 돼. 갖고 싶어 미치도록 만들어야지.’
천웅이 제시한 공사비는 다른 3사에서 제시한 공사비보다 무려 800억가량이 더 비싸다.
조합원 분양가로 따지면, 34평 아파트 기준으로 분담이 3~4천만 원 정도 더 늘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괜찮은 중형 세단 한 대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고.
때문에 그만큼의 가치를 확실히 보여줘야만 했다.
물론 분양가를 끌어 올려 조합원들의 부담감을 덜어주고, 그 리스크는 천웅이 가져가겠다는 절충안도 미리 준비해 두었지만.
그것은 마지막에 꺼내 들 결정적인 조커 카드였다.
그런 메리트 없이도 조합원들의 머릿속에 너무 갖고 싶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을 시점.
바로 그 시점이 되었을 때.
천웅을 골라도 될 이유를 하나 더 얹어줄 생각이었으니까.
‘마치 엄청 사고 싶었던 상품이 할인할 때의 느낌 같은 걸 연출해 주는 거지.’
하여 우진은 계획한 그 큰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한 획, 한 획, 이야기를 덧그리기 시작하였다.
“A씨는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나, 점심을 먹고 즐겁게 수다를 떱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얼마 전 A씨가 입주한 청담 클리오 써밋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친구들은 강남 최고의 프리미엄 아파트에 입주한 A씨를 부러워합니다.”
딸깍-
조합원들의 몰입이 극에 달했을 때, 우진이 레이저 포인트를 눌러 스크린을 전환 시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오오……!”
“와…….”
장내 여기저기서, 무의식중에 새어 나온 탄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진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무기 중 하나인, 청담 클리오 써밋의 하이 퀄리티 조감도가 스크린 위에 펼쳐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반응들과 별개로, 우진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야, 너희 집은 무슨 아파트가 아니라 럭셔리 호텔 같더라.”
“그 스카이 브릿지에 수영장도 있다며?”
스크린에 떠오른 청담 클리오 써밋의 조감도는, 말 그대로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강변에 가장 높게 세워진 두 동의 마천루.
그 사이를 잇고 있는 멋들어진 스카이 브릿지.
두 동의 옆으로 층수가 조금씩 낮아지는 다른 동들이 줄지어 둘러서 있었으며, 리버뷰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저층부에는 널찍한 테라스가 조성되어 있었다.
무리해서 최대한 많은 세대에 한강 뷰를 제공해주기보다는, 한강 뷰가 아니어도 충분히 매력적일 만한 다른 요소들을 만들어준 것이다.
아파트 사이 좁은 뷰로 어설프게 한강 뷰를 구겨 넣을 바에는, 차라리 다른 프리미엄을 제공해주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A씨의 친구들은 그를 부러워하며, 집에 한 번 초대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A씨는, 친구들을 위해 커뮤니티 게스트 하우스를 하루 예약합니다.”
“게스트 하우스에 머무는 동안, 손님들은 입주민들의 삶을 공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이런 데 한번 살아보고 싶다.”
우진의 스토리는 점점 더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디자인된 모든 공간들을 여과 없이 조합원들에게 보여주었으며.
그 모든 디자인 하나하나에는 사용자를 향한 세심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딸깍-
우진이 다시 한번 레이저 포인트를 누르자, 그가 가장 공들여 디자인한 파트 중 하나인 프리미엄 게스트 하우스의 랜더컷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그러자 우진이 다시 말을 잇기도 전에, 종전보다 훨씬 더 큰 탄성들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
“대박!”
“저게 게스트 하우스라고?”
“정말 저렇게 지을 수 있어?”
우진이 설계한 청담 클리오 써밋은, 일반적인 아파트보다 층고가 50센티나 더 높다.
평범한 아파트가 2.3M 정도의 층고로 지어진다면, 청담 클리오 써밋은 2.8M가 넘는 높은 층고로 개방감을 더한 것이다.
때문에 커뮤니티 센터가 지어질 25층은 다른 아파트 기준 30층이 훌쩍 넘는 높이였고.
그 높이의 스카이브릿지와 이어진 게스트하우스들은,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풀 빌라(Pool villa) 같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가로로 길게 펼쳐진 야외 풀에서 한강을 향해 시선을 돌리면…….
수영장의 끝이 한강과 이어지면서 끝없이 펼쳐지는 듯한 착각이 드는, 인피니티 풀 뷰(Infinity pool view)가 완성된다.
해외 휴양지의 5성급 호텔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환상적인 뷰가, 단지 내 커뮤니티 센터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여기 살면, 어디 놀러 가고 싶지도 않겠어.”
“그림만 그럴싸하게 그려놓고, 실제로는 저렇게 안 짓는 건 아닐까?”
“그럴 수는 없을걸? 도급계약서에 전부 다 명시했을 거야.”
“홍보 책자에서도 봤지만……. 이렇게까지 와 닿지는 않았는데…….”
조합원들의 탄성과 감탄 어린 소리를 들으며, 우진은 만족스런 표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그가 생각했던 대로, 분위기가 잘 흘러가고 있는 듯 보였으니 말이다.
‘인피니티풀 뷰를 이번에 시공하게 되면, 시대를 최소 15년은 앞서가는 셈이지.’
우진의 전생에서 아파트에 인피니티풀 뷰의 수영장이 단지에 생기게 되는 것은, 2025년쯤은 됐을 때의 일이었다.
사실 2010년 후반에도 그러한 시도는 많았지만, 정부의 규제로 인해 실제 시공됐던 사례는 없었으니 말이다.
2010년 중반부터 부동산 시장이 활활 끓어오른 탓에 정부에서는 집값 안정을 위해 각종 규제를 해야만 했고.
그 때문에 스카이브릿지와 같은 각종 혁신 설계들까지 같이 저지당했으니까.
그래서 우진은 지금이 2010년인 것에 오히려 감사했다.
부동산 경기가 되살아나기 전인 이 시점은 정부에서도 오히려 부동산 부양책을 하나둘 내놓기 시작할 타이밍이었고.
이 시점이 우진이 하고 싶은 건축을 마음껏 해볼 수 있는 시기였으니 말이다.
물론 건축으로 돈을 버는 것만 놓고 본다면 활황인 시기가 더 좋겠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좋아. 이쯤 했으면 이제 슬슬 마무리를 시작해 볼까?’
A라는 가상의 인물에 빗대어 입주민의 삶을 스토리로 풀어낸 우진은, 이 이야기 속에서 말하지 못한 여러 가지 디자인적 요소와 서비스들을 차례로 풀어내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기존에 다른 건설사들의 발표에서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설명의 형식이었지만, 애초에 몰입도 자체가 다른 상황이었다.
이미 이 ‘청담 클리오 써밋’에 입주한 상상이 머릿속에 가득한 조합원들은, 우진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완전히 집중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진의 모든 설명이 끝났을 때, 조합원들은 저마다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천웅건설에서 제시한 높은 공사비가, 충분히 이해되었으니 말이다.
“정말 이런 시스템이 다 들어간다면, 건축비가 비싸게 나올 만한데?”
“한 이삼천 더 내고 이런 집에 살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아.”
우진은 잠시 숨을 고르며, 조합원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이어서 장내가 다시 조용해질 즈음.
우진은, 다시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조합원들의 시선이 다시 우진을 향해 모였다.
“여러분들을 위한 특별한 공간.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의 프리미엄 주거.”
마이크를 잠시 입에서 뗀 우진은,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이제 판은 다 깔았으니, 천웅건설의 실질적인 제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었다.
“저희 천웅건설은, 이 새로운 주거공간에 대한 패러다임을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 나오기 힘들 그런 최고의 럭셔리 주거공간을, 조합원 여러분의 추억과 삶이 담긴 이 청담동 최고의 입지에 지어 올리고자 합니다.”
우진이 잠시 말을 멈췄지만,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숨죽이고 기다리는 것이다.
“누구나 살고 싶을 입지인 이곳에, 누구나 살고 싶을 만한 최고의 집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우진은 그렇게, 자신이 준비한 스토리에 첫 번째 마침표를 찍었다.
“아름다운 건축은, 행복한 삶에 대한 약속이니까요.”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