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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125화 (125/315)

125화

전야(前夜)

금요일이 되었다.

우진은 새벽부터 일어나, 사무실에 출근했다.

아니, 사실 밤을 새웠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어제 촬영이 끝난 이후 곧바로 사무실에 돌아왔던 우진은, 거의 새벽 세 시가 다 되어서야 퇴근했으니까.

집에 네 시에 들어와서 두세 시간 자고 다시 출근한 셈이니, 밤을 샌 것과 별다를 게 없었다.

“하, 그래도 어찌어찌 준비는 다 됐네.”

우진은 어제 피곤에 절은 상태로 정리한 자료들을 꼼꼼히 확인하며, 한 차례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오늘 저녁에는 드디어, 그가 몇 달 동안 갈고 닦은 설계를 조합원들에게 발표해야 할 터.

아무리 우진이라 해도 긴장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조건 잘해야 해. 실수 같은 건 용납할 수 없어.’

우진이 이렇게까지 의욕을 불태우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우진 본인과 WJ 스튜디오의 실질적인 이익 때문이었다.

만약 수주전에서 승리한다면, WJ 스튜디오의 위상이 엄청나게 솟아오를 것임은 물론.

당장 1월 매출만 십 수억 이상 뻥튀기될 테니 말이다.

‘수주전 승리할 시, 기본설계 요율*[요금의 정도나 비율.]에 따른 설계비는 최대한 다 지급해 준다고 했으니까…….’

일반적으로 이런 아파트 설계비는, <엔지니어링사업 대가의 기준>에 명시된 공사비 구간별 요율에 의거하여 책정된다.

아파트의 총공사비가 얼마로 책정되느냐에 따라, 그 일정 비율만큼을 설계비로 받는 것이다.

청담 선영아파트의 총공사비가 6천억 정도이니, 5천억 이상 공사 규모에 해당하며.

여기에 기본설계 요율은, 대략 1.3퍼센트 정도.

설계비만 무려 60억이 넘는 것이다.

물론 설계 전반을 천웅과 협업하였으니 60억을 전부 WJ 스튜디오에서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대충 공수 계산해 봐도 40억은 훌쩍 넘을 것이니, 이것은 어마어마한 매출 상승이라고 할 수 있었다.

WJ 스튜디오가 영업도 줄여가면서, 여기에 올인할 만 한 것이다.

“후우.”

양손을 털어 긴장을 걷어 낸 우진은, 담담한 어조로 리허설을 시작했다.

준비한 이 모든 것들을 단상 위에서 제대로 쏟아내기 위한 연습.

‘잘 할 수 있을 거야.’

공모전 발표 때도 긴장감은 오늘 못지않았다.

다만 그 긴장감을 무색하게 할 만큼 자신감이 충분했고, 이번도 그때와 다를 바 없었다.

판이 커졌다고 해서 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발표 순번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는데…….”

모니터에 떠오른 PPT 파일로 향한 우진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 * *

M일보의 경제부 기자 김규식은,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전부터 잡혀있는 취재 일정을 따라 움직이다 보니, 서울 전역을 발에 땀 나도록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기삿거리가 많다는 것은 기자에게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요즘 같으면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

하지만 생각만 그렇게 할 뿐.

5시가 넘어 퇴근 시간이 다가올 즈음에도, 김규식은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것도 시간에 늦을까 봐서, 부리나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늦어도 5시 50분까진 도착해야 하는데…….’

지하철로 내려가는 규식의 전화가, 위잉거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할 새도 없이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에 울려 퍼진다.

[규식이, 불금인데 쐬주 한 잔 어때?]

“나 바쁘다, 친구야.”

[아니 바쁜 건 바쁜 거고. 이제 퇴근할 거 아냐?]

“퇴근 못 해. 아니, 안 해.”

[뭐? 오늘 야근이야?]

“자발적 야근이라고나 할까?”

[미친! 불금에 자발적 야근이라니, 내가 알던 김규식이 맞아?]

“그럴 만하니까, 하는 거지. 여튼, 끊는다?”

[야! 잠깐만! 야……!]

뚝-

평소 같았으면 신나서 달려갈 술자리마저도 거부한 김규식은, 강남 방향으로 향하는 2호선 지하철에 올라탔다.

오늘 그가 따낸 취재 거리는, 거의 단독이나 다름없는 수준.

술 한잔하고 싶다고 이 특종을 포기하고 가기엔, 너무 큰 기삿거리라고 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지. 총회에 들어갈 자격을 얻다니.’

오늘 김규식이 취재하려는 곳은, 청담 선영아파트 재건축 사업의 시공사 선정 총회이다.

외부인들의 출입이 철저히 차단되는, 조합원들의 축제라고 할 수 있는 곳.

규식이 이 행사에 출입자격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인맥 덕분이었다.

조합 대의원 중 하나가 규식의 가까운 친척 어른이었고, 사정해서 겨우 한 자리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니까.

‘노트북에 기록 좀 해도, 누가 태클 걸진 않겠지?’

규식의 눈빛에는 기대가 가득했다.

부동산에 관심 있는 국민이라면 모두가 궁금해할 만한 곳이 바로 청담 선영아파트의 재건축 사업장이었고.

특히 최상급 건설사들끼리 자웅을 다투는 시공사 선정 총회에 대해 단독으로 취재한다면, 기사의 조회수는 보장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누구나 살고 싶어할 만 한 최고의 입지.

그리고 그 입지 위에 지어질 최고의 프리미엄 아파트.

규식은 이 취재 한 번으로, 최소 기사 세 개 정도는 깔끔하게 띄울 자신이 있었다.

‘흐흐, 거기에 깨알 같은 감초도 하나 있고 말이지.’

엊그제 천웅건설의 관계자로부터 얻은 특별한 정보 하나도, 지금 그를 설레게 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요즘 핫한 예능 프로그램인 <우리 집에 왜 왔니>의 서우진 전문가가, 천웅건설의 발표자로 나선다는 사실.

이거야말로 기사의 조회수를 올려줄 수 있는, 히든카드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부동산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우리 집에 왜 왔니>를 시청한다면, 궁금해서라도 기사를 눌러보게 될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천웅건설에서는 어쩌다가 그 친구가 발표를 맡게 된 거지? <우리 집에 왜 왔니>에 섭외된 건, 스물둘 대학생 컨셉 때문 아니었나? 정말 능력이 그만큼이나 되는 친구였나?’

지금 취재를 가고 있는 김규식마저도,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궁금할 정도였으니.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기삿거리라는 반증.

취재지를 향해 옮기는 규식의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오늘 선영아파트의 시공사 선정 총회가 열리는 곳은, 송파구 잠실동의 종합운동장.

오늘따라 지하철의 정차시간이 더욱 길게 느껴지는 규식이었다.

* * *

천웅건설의 TF팀은, 다섯 시가 좀 넘어서부터 종합운동장에 도착해 있었다.

본격적으로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자료들 세팅하고 발표환경을 점검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TF팀을 이끄는 두 실무자 박경완과 오주형은, 대략적인 점검을 마친 뒤 건물 테라스에서 담배를 한 대씩 태우고 있었다.

긴장을 푸는 데는, 담배만 한 것이 없었다.

“확실히 괜찮은 아이디어였긴 해.”

“뭐가?”

“예능 때문에 얼굴 유명해진 서 대표가, 우리 프레젠테이션 발표하는 것 말야.”

주형의 말에, 경완이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괜찮은 아이디어가 아니고, 대체 불가야.”

“흠…….”

기분 환기를 위해 담배를 태우면서도, 두 사람의 대화는 결국 오늘 총회에 관련된 이야기.

“일단 아는 얼굴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호감이 훨씬 더 생길 수밖에 없거든.”

“그렇긴 하지.”

“물론 아는 사람이 발표했다고 해서 그게 표로 이어지진 않겠지만, 적어도 발표에 훨씬 더 집중하게 될걸?”

정확히는 오늘 행사의 키맨(Key man)이나 다름없는, 우진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었다.

“그 부분은 동의해.”

“그 부분은?”

“그냥, 불안해서 그래.”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한 오주형이, 담배를 한 모금 깊숙이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힐끔 쳐다본 박경완은,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야, 오주형이.”

“엉?”

“아직도 걱정하고 있는 거냐?”

담담한 박경완의 목소리에, 주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 안 하는 네가 이상한 거야 인마. 아이디어 자체가 괜찮다곤 하지만, 그래도 결국 서 대표. 스물둘인 건 맞잖아.”

“스물둘이건, 마흔둘이건. 내가 볼 땐 서우진이만큼 제대로 피티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어.”

“그 정도야?”

“너도 지난번에 같이 얘기해봐서 알잖아.”

“그때, 성수 포차?”

“그래 인마. 그때 너 복귀하면서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 안나?”

“음…….”

“이놈이랑 얘기하다 보면,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고.”

“어, 그랬었지.”

뒷머리를 긁적이는 오주형의 등짝을, 경완이 팡팡 두들겼다.

“내가 아는 놈들 중에, 말 빨 이 정도로 잘 세우는 놈도 없어.”

“하긴…….”

“게다가 본인이 직접 디자인하고 설계한 작품이야. 누가 얘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쩝. 그래. 뭐 걱정한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지?”

주형은 재떨이에 담배를 꾹 눌러 버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고, 경완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이제 행사 시작까지는 20분 정도 남은 시점.

사실 태연한 척해도, 경완 또한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SPDC 대상 수상자 아냐? 못해도 평타 이상은 확실히 해 주겠지.’

주먹을 살짝 쥐자, 손바닥에 흥건한 땀이 느껴진다.

천웅건설의 실적도 실적이지만, 사실상 그의 임원승진이 걸려 있는 프로젝트.

그 결과가 정해지는 날이 오늘이었으니, 경완 또한 우진만큼이나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진을 발표자로 내세운 것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형에게 이야기한 것들은, 정말 꾸밈없는 그의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긴장은 별개라고 할 수 있었다.

저벅- 저벅-

경완과 주형이 현장 사무실 안에 돌아가 앉자, 곧 오늘 총회에 참석한 모든 건설사 관계자들이 전부 도착했다.

사무실 안에 모인 인원은, 대략 열댓 명 정도.

하지만 이 정도의 인원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실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사실 경쟁사 관계자들끼리, 딱히 나눌 만한 대화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여 그렇게 조용한 가운데, 5분 정도가 지났을까?

관계자들이 전부 모였음을 확인한 조합 관계자가, 작은 휴지 곽을 하나 들고 나타났다.

“자, 대표자 한 분씩 이쪽으로 와 보시죠.”

그의 말을 들은 경완이 망설임 없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주전에 셀 수 없이 참여해 본 경완은,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았으니 말이다.

‘순번 뽑기겠지.’

관계자가 가지고 들어온 휴지곽은, 다름 아닌 발표 순서를 정하는 제비뽑기 통.

수천억의 공사비가 왔다 갔다 하는 판에서 휴지곽으로 제비뽑기로 발표 순번이 정해진다는 사실도 웃기는 것이었지만, 각 건설사 대표들은 별말 없이 일어나 조합 관계자의 앞에 모였다.

그리고 가장 먼저 손을 집어넣어 제비를 뽑은 것은, 바로 경완이었다.

‘몇 번째가 좋으려나. 아무래도 부담 없으려면 첫 번째겠지?’

경완으로서는 우진이 어떤 순번을 원할지 알 수 없었지만, 1번을 뽑아야 부담 없이 발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제비에 쓰인 숫자는…….

[4번]

바로 마지막 순번인 4번이었다.

“뭐야, 몇 번인데?”

경완의 당황한 표정을 본 주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어봤고, 그에 경완은 대답 대신 펼쳐진 제비를 흔들며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4번? 마지막?”

“그러게.”

“하,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잘만 하면 최고의 순번이지만, 조금만 삐끗해도 그대로 묻혀버리기 좋은 순번인 마지막 순번.

그에 묘한 표정이 된 경완과 주형은, 동시에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모든 것은 그 꼬마.

서우진의 발표에 달려 있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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