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뜻밖의 제안
서울 최초의 3개 호선 환승역이자, 동북부 교통의 요충지인 왕십리역.
서울시 알짜 지하철 노선들이 지나가는 이곳 왕십리역은 ‘파라마운트(Paramount)’라는 기업에서 사업 주체가 되어 개발한 민자역사*[민간회사의 자본을 빌려 지은 역사로, 역사 내에 백화점 등의 종합쇼핑몰을 유치하여 상권을 활성화시킨다는 장점이 있다.]로, 약 2013년경에 완공됐던 곳이다.
물론 한참 오래전부터 노선 운행은 정상적으로 되고 있었지만, 민자(민간자본)개발과 함께 ‘패러필드’라는 대형 복합쇼핑몰이 들어서면서 규모가 확 커진 것이 2012년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한 번 제대로 망했다’는 우진의 이야기는, 바로 이 복합쇼핑몰의 건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건 2011년 하반기 즈음 우진의 전생에서 너무 유명했던 이슈였기 때문에, 사실 우진이 업계 종사자가 아니었더라도 기억했을 일이었다.
‘부실공사로 인한 현장 붕괴. 사람이 열 명도 넘게 죽었던 대참사였지.’
사실 현장에서의 사고는,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인명피해. 그것도 열 명이 넘게 사망한 대규모의 인명피해는 흔치 않은 일이었고.
때문에 당시 시공사로 선정됐던 태호건설은, 대대적인 정부 시찰 및 감사(勘査)와 함께 쫄딱 망했었다.
마치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양파껍질처럼, 사고와 연계된 각종 비리들이 끝없이 엮여 나왔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패러필드 자체가 망했느냐?
그건 아니었다.
일차적으로 비리가 드러나며 사업이 엎어질 뻔하였지만, 부동산 재벌 수준의 대기업인 파라마운트는 그 실패를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의 재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새로운 건설사와 처음부터 다시 협약을 맺은 파라마운트는 과감히 사업을 재개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그렇게 지어진 왕십리 패러필드는 꽤 흥행한 복합쇼핑몰이 되었었다.
사업이 한번 엎어질 뻔하며 입었던 적지 않은 손해를 전부 메우고, 오래지 않아 흑자전환이 됐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쇼핑몰 흥행을 떠나 건축 자체만 놓고 보면……. 확실히 아쉽긴 했지. 기존 부실 설계를 최대한 재활용해서 다시 지은 탓인지, 디자인 자체는 별로였으니까.’
해서 이러한 배경에 대해 알고 있는 우진으로서는, 브루노가 패러필드의 설계를 준비하고 있다는 게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시공 비리를 떠나 공모에 당선됐던 최초의 건축디자인조차도, 우진의 기준에선 상당히 별로였으니 말이다.
쉽게 말해 브루노가 공모에 참가했음에도 그런 수준의 밋밋하고 촌스러운 디자인이 낙점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브루노. 왕십리 복합몰이라면, 주식회사 패러마운트에서 공모 올린 프로젝트가 맞죠?”
우진의 물음에, 브루노가 반색하며 대답하였다.
“오오, 역시 우진도 알고 있었군요. 하긴, 이 정도의 빅 프로젝트라면 우진이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요.”
“공모 마감이 언제인가요?”
“다음 달 10일입니다.”
“아하. 그럼 저를 부르시는 이유는…….”
“한번 우진에게 설계를 보여주고, 같이 이야기해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
브루노의 말을 듣던 소연과 제이든은,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브루노가 우진에게 조언을 구한다고?’
‘대박……! 오빠가 브루노의 조력자가 되는 거야?’
설계를 보여주고 같이 얘기해 보고 싶은 부분이 있다. 라는 것은, 사실상 우진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말과 다를 게 없었으니 말이다.
단순히 우진과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이렇게 실질적인 프로젝트 조인을 제안하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 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브루노가 사실상 우진을 동등한 건축가 이상으로 생각한다는 방증이었으니까.
제이든, 소연과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이 된 우진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하. 우진은 자신의 능력을 너무 저평가하는군요.”
“그럴 리가요.”
“우진은 충분히 제 설계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것이 실질적인 설계이든, 디자인이든. 혹은 UX와 관련된 부분이든. 어떤 방면으로든 말입니다.”
브루노의 이야기는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로 우진의 도움이 필요해서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으니까.
물론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자면, 단순 설계나 디자인 쪽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건축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면서 한국 현지인인 우진이라면, 자신의 설계를 보며 유저 경험에 대한 조언을 많이 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똑같은 복합몰이라도 브루노의 모국인 스페인과 이곳 한국 사이에는, 문화적인 차이가 분명히 존재할 테니 말이다.
‘우진이라면 내 설계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공허함을 채워 줄 수 있을지도…….’
그래서 브루노는 더욱 힘주어 이야기했다.
“우진의 조언에 의해 설계에 변화가 생긴다면, 반드시 우진과 WJ 스튜디오의 이름을 제 이름과 함께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까지는 안 해 주셔도…….”
“그만큼 우진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다는 이야깁니다. 하하. 어떻게,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브루노의 제안은, 우진으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내달 10일이 공모 마감이라면 이미 대부분의 설계가 나온 상태일 것이었는데.
다 된 설계를 가지고 조언 조금 하는 것으로 우진과 WJ 스튜디오를 브루노의 이름과 함께 끼워 넣을 수 있다면, 이것은 남아도 엄청나게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서포터라는 명목으로 작게 들어갈 테지만, 그것만 해도 WJ 스튜디오 커리어에는 큰 도움이 될 터.
그래서 우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영광입니다, 브루노. 도움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꺼이 가보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우진은 브루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기분 좋게 웃음 지었다.
하지만 겉으로 웃는 것과는 반대로, 속은 좀 복잡한 그였다.
‘일단 브루노의 제안 자체는 아주 좋은데……. 사업장에서 구린내가 나는 게 좀 문제란 말이지.’
브루노의 설계에 이름을 같이 올린다는 것도, 결국 설계 공모에서 채택되었을 때에나 의미가 있는 거다.
우진의 기억대로라면 이 공모전에서 채택됐던 설계는 브루노의 것이 아니었고.
때문에 브루노의 설계를 두고 그 구닥다리 설계가 채택된 경유까지 파헤쳐야만, 제대로 된 과실을 따먹을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설계가 채택된 뒤에도 태호건설에서 수주하지 못하도록 막아내기까지 해야 했으니, 우진은 눈앞에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뭐, 언제는 쉬운 적 있었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우진 일행을 배웅하는 브루노를 힐끔 응시하며, 우진은 속으로 실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브루노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우진은 이번에 디자인 외적인 부분에서, 브루노에게 꽤나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 * *
의외의 이슈가 생겼던 월요일이 지나, 다음날인 화요일도 빠르게 흘러갔다.
12월의 2, 3주 차는, 우진과 WJ 스튜디오에게 있어 숨을 한 번 고를 수 있게 해주는 재정비의 주간이라 할 수 있었다.
영업을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던 진태도, 이번만큼은 내근하며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청담 선영의 프로젝트를 제외하고라도 동시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다섯 개나 되었으며.
카페 프레스코의 경우 그동안 열 곳도 넘게 가맹점 계약이 진행되었으니, 사업장을 더 늘리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2호점인 유리아의 가로수길 건물 공사가 다음 주부터 착공 예정이었는데, 이곳의 사전준비 작업도 만만찮은 일이었다.
이면도로라고는 하지만 가로수길은 유동인구가 상당한 상권이었으니.
주변 상권의 민원을 비롯해서, 도로점거가 크게 제한되는 등.
건축 외적인 차원에서도 공사를 힘들게 하는 요소가 많았으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존 다른 건설사에서 리모델링 공사를 이미 한 차례 진행한 상황이었고.
WJ 스튜디오는 이 현장을 이어받아 내부 공사를 진행하는 것이었으니.
주변 상권이 이미 어느 정도 적응한 상태라는 점이었다.
쉽게 말해 이전 건설사에서 상당 부분 욕받이(?) 역할을 먼저 해줬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우진은 꼼꼼히 민원에 대비했다.
“그렇긴 해도 최대한 신경 써서 관리해 줘, 진태 형.”
“알겠어. 네 말대로 주변에 떡도 돌리고, 가게 하나씩 다 찾아가면서 양해를 구했어.”
사실 사람 사이의 일이라는 것은, 같은 문제라도 어떤 식으로 대처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법이다.
공사로 인해 주변에 불편을 끼친다는 점에서는 어떤 사전대응을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약간의 수고를 들여 인심을 미리 얻고 기분 좋게 양해를 구한다면, 가래로 막아야 할 것을 호미로 편하게 막을 수 있게 되는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이것은 앞으로 이곳에서 장사하게 될 카페 프레스코의 이미지와도, 상당 부분 연결될 게 분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꼼꼼하게 진행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누나.”
[걱정한 적 없는데?]
“그럼 다행이고.”
[네가 걱정할 틈을 줘야 말이지. 내가 궁금할 새도 없이 따박따박 보고해 주는데, 걱정을 어떻게 하냐?]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누님.”
[징그러우니까, 끊어!]
“프흐흐흐.”
우진은 건물주인 리아에게도 스케줄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며 신뢰를 쌓았고, 이렇게 WJ 스튜디오의 프로젝트들은 오늘도 기름칠한 톱니바퀴들처럼 깔끔하게 맞물려 굴러가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우진은, 대표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달력을 체크 하며 마무리된 일정들을 하나씩 지우고 있었다.
“좋아. 오늘까진 계획해둔 대로 다 굴러갔고…….”
하지만 아무리 운영을 깔끔하게 한다고 해도, 변수를 아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한 일.
수요일 아침 출근길에, 우진은 생각지 못했던 경완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예, 부장님. 어쩐 일이세요?”
[아, 별건 아니고. 일정이 좀 당겨져서 말이다.]
“네……? 일정이요? 무슨 일정이 당겨졌는데요?”
[시공사 선정 총회, 원래 일요일이었잖아.]
“그……런데요?”
[그거 이틀 당겨졌어. 금요일이야.]
“아니, 잠깐만. 원래도 이번 주 일요일이었잖아요. 그게 더 당겨져서 금요일로 됐다고요?”
[건설사들이랑 조합에서 일정을 좀 맞추다 보니……. 주말이 좀 여러모로 애매하더라고.]
“평일보다 주말이 더 편한 거 아니에요?”
[선영아파트 조합원들이, 평일 저녁이 더 좋다고 했대. 연말이라 그런지, 주말에 일이 있는 사람들도 많고…….]
“부장님…….”
[응?]
“별거 아니라면서요.”
[별거 아니지. 고작 이틀 당겨진 건데 뭐.]
“하아…….”
[그래서 말인데, 서 대표.]
“아, 몰라요…….”
[설계발표 프레젠테이션, 예정대로 네가 좀 해줄 수 있지?]
“으아아아!”
[아직 이틀이나 남았잖아. 그럼, 믿는다……?]
“아니 고작 이틀이 3초 만에 갑자기 이틀이나로 바뀌는 게 어딨어요!”
뚜- 뚜- 뚜-
“부장님. 저기요, 부장님!”
끊어진 전화를 붙잡고, 우진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일정이 촉박하다고 해서, 원래 하기로 했던 프레젠테이션에서 발을 뺄 수도 없는 노릇.
“미치겠네, 진짜.”
우진의 입에서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피티 준비를 하려면, 아무래도 하루 정도는 밤을 새워야 할 듯싶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