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22화 (122/315)

122화

뜻밖의 제안

제이든이 말했다.

“아무래도 우진은, 석현만 너무 편애하는 것 같아.”

“또 아이폰 얘기를 하려는 거야?”

“젠장. 어떻게 생일선물로 아이폰을 줄 수가 있는 거지?”

“그야 석현은 WJ 스튜디오의 충신이니까.”

“제이든도 마찬가지라고!”

“넌 생일이 아니잖아.”

“곧이야. 2월이라니까?”

“게다가 넌 아이폰을 이미 가지고 있지.”

“Bloody Hell! 대체 우리 엄마는 왜 아이폰을 사주고 간 거야!”

“……?”

“나도 아이폰!”

“운전하는 데 방해되니까, 좀 조용히 해 줄래 제이든?”

우진은 지금 차를 끌고 용산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옆 좌석에는 제이든을, 뒷좌석에는 소연을 태운 채 말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이렇게 셋이 움직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전에 공모전에서 알게 된 스페인의 건축 디자이너 브루노가, 그들을 사무실로 초대했으니 말이다.

사실 초대 자체는 꽤 오래전부터 했었지만, 그동안은 시간이 도무지 맞질 않았다.

브루노도 무척이나 바쁜 사람인데, 우진은 그보다 더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으니.

시간 맞추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던 것이다.

‘브루노의 사무실은 꼭 가보고 싶었지.’

우진은 브루노가 설계하여 이제 준공을 앞두고 있는 호텔 건물인 ‘글래셜 타워’에 대해 잘 안다.

용산 대로변에 우뚝 솟은, 그 이름처럼 빙하를 형상화한 생김새를 가진 고층 건물.

전생에서는 여기에 묵어본 적도 있었는데, 첫 방문 때는 크게 감탄했던 기억이 있었다.

커튼 월을 기가 막히게 활용하여, 건물 내부로 들어오면 정말 얼음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도록 아름답게 연출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푸른 유리들이 일정한 패턴으로 외관에서부터 흐르면서, 내부까지 자연스럽게 그 디자인 무드가 이어지는 아름다운 건축물.

멀리 글래셜타워가 보이기 시작하자, 우진은 그것을 손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기 파랗게 빛나는 건물 보이지?”

“엇, 저거?”

소연의 반문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저게 글래셜타워야. 브루노가 설계한 건축물이지.”

“우와, 거의 다 지어졌네?”

창밖을 보는 소연은 초롱초롱한 눈빛이었다.

건축학도로서 브루노같은 업계 거장의 사무실을 방문하게 되는 것은 흥분될 수밖에 없는 일.

게다가 눈앞의 저 멋들어진 건물이 그 사무실에서 설계된 건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대감이 더욱 커지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멋진 건축물 덕분인지, 앵무새처럼 아이폰 노래를 부르던 제이든 또한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와우. 저게 브루노가 설계한 건축물이었어? 대단한데?”

“제이든, 갑자기 웬 아는 척이야? 저 건물에 대해 알아?”

“Sure. 우리 집에서 보이거든.”

“응……?”

“내 방 창문으로 보이는 건물인데, 저게 브루노가 설계한 건물일 줄은 몰랐지.”

제이든의 말에 우진은 그의 집 구조를 잠깐 떠올려 보았다.

며칠 전에도 석현의 생일파티를 한다고 간 적 있는 곳이었기에, 대충 어떤 위치에서 브루노의 건물이 보이는 건지는 깨달을 수 있었다.

‘하긴. 제이든의 집도 용산구니까, 저렇게 높은 건물이 보이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네.’

부르릉-

우진은 미리 브루노에게 언질 받은 대로, 글래셜타워 인근의 건물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그곳이 바로 브루노의 설계사무소가 있는 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자,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브루노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세 사람을 맞았다.

“반갑습니다, 우진. 제이든, 그리고 소연. 내 사무실에 잘 왔어요.”

조금 어눌하지만 깔끔하게 한국말을 구사하는 브루노를 보며, 우진은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브루노, 한국말 할 줄 알았어요?”

우진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브루노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아니. 조금. A little bit.”

* * *

브루노와의 대화는 거의 영어로 오고갔다.

사무실에 브루노의 개인 통역가가 있었지만, 그녀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소연도 영어를 무척이나 잘하는 편이었던 데다, 제이든이라는 완벽한 통역가가 존재했으니 말이다.

제이든은 한국말과 영어 둘 다 모국어 수준으로 완벽하게 구사하는 능력자였다.

비록 우진에게는 시끄러운 영국인 취급을 당할지라도 말이다.

“어때요, 막상 사무실에 와도 별거 없지요? 가보지는 않았지만, 우진의 사무실과 별 다를 건 없을 겁니다.”

브루노의 사무실은, 그의 명성에 비해서는 확실히 초라한 모양새였다.

고급스럽게 인테리어 해 놓은 우진의 WJ 스튜디오와 비교하면, 그저 평범한 사무실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브루노의 입장에선 한국에서 얼마나 일할지 알 수 없었기에, 우진처럼 사무실을 멋지게 꾸며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우진을 비롯한 세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사무실의 인테리어가 아니었다.

“사무실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브루노 같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했던 거지요.”

“맞아요. 브루노의 디자인 프로세스를 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정말 영광인걸요.”

우진과 소연의 칭찬이 이어지자, 브루노는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한결 좋아진 것이다.

칭찬이란 본래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

브루노는 세 사람에게, 이번에 작업했던 글래셜 타워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자세하게 공유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는, 십 년 넘게 설계사무소를 운영해 온 브루노의 온갖 노하우들이 녹아 있었다.

‘확실히 난 아직도 멀었구나.’

브루노의 이야기를 듣던 우진은 감탄을 연발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깨닫는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제이든이라는 필터를 한번 거쳐서 듣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현장감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물론 제이든이 워낙 통역을 잘한 덕도 있겠지만, 그전에 브루노가 가진 인사이트들이 확실히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우진. 혹시 런던에 지어진 세인트 메리 엑스(St Mary Axe)라는 건축물을 압니까?”

“물론입니다. 그 미사일 같이 생긴…….”

“하하. 나는 마치 무를 뽑아다 거꾸로 세워놓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사일이라.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그 건축물은 왜요?”

“그 세인트 메리 엑스를 시공할 때 사용됐던 이중 강화유리 외벽 구조가, 내 글래셜타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있어서 말입니다.”

“오……! 그러고 보니!”

“그래서 이 단면설계를 보면, 구조가 이렇게 빠져 있는데……. 여름에는 자연스럽게 공기가 빠져나가고, 겨울에는 외벽 사이에 갇힌 공기가 단열재의 역할을 해주죠.”

“신기하네요. 그런 게 가능하군요.”

“사실 실제로 사용되는 단열제와 비교하면 효과가 떨어지는 건 당연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유의미한 열 차단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진은 전생에 현장 전문가이자 목수였고, 지금은 디자인을 배우는 건축디자인 학도이다.

하지만 전생과 지금을 통틀어도 잘 알지 못하는 건축 관련 분야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재료공학이나 구조역학과 같은 기술적인 부분이었다.

이 부분은 사실상, 완전한 이공계열의 영역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까지 배울 생각은 없었다.

기술적인 부분까지 공부하기엔, 시간도 여력도 없었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아직 본격적인 건축을 하는 건 아니니까 괜찮지만……. 이쪽으로도 근시일 내에 인재를 확보하긴 해야겠어.’

그래서 우진은 오늘 브루노의 사무실에 와 보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막연히 계획만 하고 있던 부분들이, 브루노 덕에 좀 더 구체화되었으니까.

“자, 슬슬 출출한데, 다들 저녁이나 같이하실까요?”

브루노의 사무실에서 거의 두세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눈 우진과 일행들은, 다섯 시쯤 조금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바깥으로 나왔다.

브루노가 맛집이라며 소개한 용산의 음식점은, 다름 아닌 경양식 돈가스 전문점이었다.

“저는 이 한국식 커틀릿(cutlet)을 가장 좋아합니다.”

“돈가스를 유럽에서는 커틀릿이라고 하는군요?”

“커틀릿이 원조야. 무식한 우진.”

“시끄러, 제이든. 영어 좀 못할 수도 있지.”

분위기는 좋았다.

대화의 흐름도 이제 일방적인 브루노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지금 우진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게 됐고.

브루노는 그에 대해 우진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놀랍군요. 우진의 회사가 그렇게 빠르게 성장한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지난번 SPDC에서 당선됐던 요양원 설계는, 이제 시공에 들어갔습니까?”

“얼마 전에 삽 뜬 거로. 아니, 착공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설계 일부가 변경되긴 했지만, 그래도 기존 안을 최대한 살려서 진행 중이지요.”

“요양원이 완공되면, 제가 꼭 한번 가 볼 겁니다.”

“꼭 오셔야 합니다. 하하하.”

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들을 때 반응이 단순히 놀란 정도였다면.

이번에 참여했다는 청담 선영 아파트의 설계 공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보기 드문 표정을 지으며 주름진 두 눈이 휘둥그레졌을 정도였다.

청담 선영 정도의 대규모 프로젝트 설계를 맡는 것은, 브루노처럼 인지도 있는 건축가에게도 흔히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정말 천 세대가 넘는 신축 공동주택을 우진이 설계했다는 말입니까?”

“아, 아직 공모에 당선됐을 뿐입니다.”

“공모에 당선됐으면 이제 시공되는 것 아닙니까?”

“설명 드리기는 좀 복잡하지만, 아직 최종 경연이 한 차례 남아있습니다.”

“혹시 디자인된 조감도라도 보여주실 수 있는 그림이 있으면…….”

“오늘 가져오지는 않아서……. 브루노가 관심 가지실 줄 알았으면, 챙겨 올 걸 그랬습니다.”

“아쉽게 됐군요. 우진이 설계한 프리미엄 아파트 단지가 궁금했는데 말입니다.”

쉴 새 없이 오가는 대화를 통역하는 제이든은 조금 지친 표정이었지만,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는 소연의 눈동자는 내내 초롱초롱 빛났다.

브루노와 우진의 대화는 이제 갓 학부 1학년을 마친 소연의 입장에서, 신세계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멋지다……. 언젠간 나도…….’

사실 브루노라는 인물은, 소연의 입장에서 너무 먼 곳에 걸려있는 별처럼 막연한 존재였다.

세계적인 건축디자이너와 학부생 사이에는, 그만한 간극이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우진이라는 존재는 브루노와 다르다.

브루노와 마찬가지로 대단한 인물인 것은 맞지만, 그런 사실과 별개로 가까이 있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녀는 우진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봤고, 앞으로도 지켜볼 수 있다.

곁에 있기에, 어떤 식으로 발전해 나가는지 알기에.

그래서 더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 우진이었으니까.

소연은 우진에게서 느끼는 호감과 별개로, 이제껏 막연하기만 했던 건축디자이너로서의 꿈을 그에게서 본 것인지도 몰랐다.

“우진. 돈가스 좀 먹으면서 얘기하면 안 될까?”

“아, 잠깐만. 하던 얘기만 좀 마무리하고.”

네 사람의 접시에 놓인 돈가스는,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브루노가 자신 있게 추천한 경양식 돈가스가 맛없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다들 돈가스의 맛을 즐기는 것 보다, 이 대화가 훨씬 더 즐거웠을 뿐이었다.

해서 우진은 거의 한 시간이 다 되어서야, 접시를 전부 비울 수 있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브루노. 덕분에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허허, 저야말로 우진의 스토리를 들을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직원이 식탁 위에 올려 져 있던 접시들을 가지고 가자 브루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진을 비롯한 세 사람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음, 다음에는 브루노를 한 번 우리 사무실로 초대해 볼까?’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며 우진이 음식점 문을 나서던 그때.

계산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온 브루노가, 갑자기 우진을 불러 세웠다.

“우진.”

“예, 브루노.”

“혹시 돌아오는 주말쯤. 시간 한 번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브루노의 갑작스런 제안에 우진은 조금 의아했지만, 일단 스마트폰을 꺼내어 캘린더를 확인해 보았다.

“음, 다음 주 월요일이 시공사 선정총회라 일요일은 비워둬야 할 것 같고……. 토요일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오호, 그래요?”

“혹시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궁금한 표정의 우진을 향해, 브루노가 웃으며 대답하였다.

“사실 지금 제가 준비 중인 뉴 프로젝트가 하나 있습니다.”

“뉴 프로젝트라면…….”

“혹시 우진. 복합 몰 설계에 관심이 좀 있으십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브루노의 말에, 우진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복합 몰이요……? 저야 건축이라면 사실 뭐가 됐든 당연히 관심 있죠.”

“후후, 역시 그렇지요?”

하지만 우진의 그 놀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제가 이번에 왕십리에 지어질 복합 몰 설계 공모에 작품을 내게 되었는데…….”

“왕십리요?!”

“그 규모가 꽤 상당합니다.”

브루노의 입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프로젝트는, 우진이 아주 잘 알고 있는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왕십리 패러필드(ParaField)! 이게 대체 왜 브루노의 입에서 나오는 거지?’

브루노의 이야기와 머릿속의 기억들이 혼재되면서, 우진은 아주 혼란스런 표정이 되었다.

우진이 전생에 알던 왕십리의 대형 복합 몰 패러필드.

우진이 기억하기로 그곳은, 한 번 제대로 망했던 프로젝트였으니 말이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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