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동상이몽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곽홍식은 오늘, 그 말의 진의를 피부로 실감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정말 정인준 대의원이 비대위원장 친척이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조합장님. 그리고 여기 이 통화 내역 보시면 아시겠지만…….”
“……!”
“조합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롭니다. 정황상 너무 확실한데, 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바로 어제, 천웅건설의 관계자들이 조합 사무실을 다녀간 뒤부터.
곽홍식을 비롯한 조합 직원들은, 무척이나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그들이 홍식에게 던져놓고 간 누런 봉투 안에 들어있던 정보들.
그것들에 대한 진위 여부를, 최대한 빨리 확인해야 했으니 말이다.
‘지어낸 것 같던 그 얘기들이 정말 다 사실일 줄이야…….’
그 봉투 안에 담긴 정보들은 믿기 힘든 내용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그 얘기들이 사실이라면, 조합 차원에서 엄청난 출혈을 감수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서우진의 얘기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맞아떨어졌다.
조합장인 곽홍식으로서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조합의 내부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수 있는 거지?’
물론 우진이 아는 것이 조합 내부 사정이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우진은 내부 사정을 아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터지게 됐을 사고에 대해 알았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 진위가 어찌 됐든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고, 결국 우진이 말한 모든 내용이 사실이었다는 게 가장 중요했다.
어제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했던 그 청년은, 이렇게 말했었으니 말이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전화 주신다면……. 처음에 말씀드렸던 대로, 비대위를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말 이번 기회에 그 쓰레기 같은 놈들, 싹 다 치워버릴 수만 있다면…….’
지랄 맞은 비대위의 인물들을 떠올린 곽홍식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조합이 빈틈을 보이기만을 호시탐탐 노리며, 언제든 사업에 제동을 걸기 위해 악착같이 활동 중인 암 덩어리들.
게다가 이번에 우진이 준 정보로 인해, 조합 대의원 중 하나가 비대위의 끄나풀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소름 돋는 일이지만 어찌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다.
조합원이 비대위원장과 긴밀하게 지낸다고 해도, 그게 법적으로 문제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을 안에 품은 채 지금까지 사업을 진행해 왔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가 막힐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정말 다행이지.’
그런데 우진의 제안은, 비단 이 시한폭탄뿐 아니라 비대위 본진까지 싹 다 무력화시킬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정말 그런 방법을 알려준다면, 천웅의 요구 정도 들어주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로비 좀 받지 않는다고 해서 조합이 크게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사실 조합 내부에 암세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만 해도, 이미 대가는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했다.
“윤식 씨. 내가 준비하라고 했던 공문, 작업 마무리되셨습니까?”
“네, 조합장님. 준비 다 끝내놨습니다.”
“오늘 오후에 메일로 전부 쏘세요.”
“옙!”
“따로 기자회견도 할 거니까, 지난번에 접촉됐던 기자 몇 분도 불러주시고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천웅건설이 요구했던 대로 클린수주와 관련된 제스쳐를 먼저 취한 곽홍식은, 공문이 발송되자마자 가장 먼저 우진에게 받았던 명함을 꺼내고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전화를 받은 우진을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결국 서 대표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됐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말씀하신 그대로더군요.”
우진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 때문인지, 곽홍식의 어투는 사뭇 공손했다.
[그럼, 클린수주는…….]
“이미 공문 다 돌리고 전화 드렸지요.”
[빠르……시군요.]
곽홍식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어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올 우진의 목소리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였다.
[물론입니다. 약속은 지켜야지요.]
그리고 우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홍식은 펜을 들어 그 이야기들을 꼼꼼히 메모하기 시작하였다.
* * *
일주일이 더 지나, 11월 26일 금요일이 되었다.
청담 선영아파트 재건축의 건설사 입찰이 마감되었고.
결국 입찰에 참여한 회사는, 총 네 곳이었다.
도급순위 1위에 빛나는 제운건설과, 그 뒤를 바짝 뒤쫓는 SH물산.
그리고 두 회사와 비교해도 덩치가 크게 꿇리지 않는, 프리미엄 브랜드 수경을 앞세운 명성건설.
마지막으로 최근 런칭한 Clio 브랜드와 함께, 떠오르는 신성으로 주목받는 건설사 천웅까지.
업계 관계자들은 이 결과를 두고, 대부분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제운과 SH물산이 작정하고 뛰어들면 명성도 따라가기 버겁다는 것이 중론이었는데.
덩치로 치면 그들 회사의 절반밖에 안 되는 천웅에서 여기에 출사표를 던진 셈이었으니, 내부사정을 모르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놀랐던 것이다.
Clio 브랜드에 호감을 갖고 있는 일부 전문가들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대부분 업계 관계자들은 부정적이었다.
프리미엄 브랜드 하나 괜찮게 띄웠다고 해서 강남을 너무 우습게 본다는 둥.
이런저런 얘기가 곳곳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물론 천웅에서 그런 반응들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이야기들을 재료 삼아 노이즈 마케팅을 하며, 천웅과 Clio 브랜드가 청담 선영 사업장에 뛰어든다는 것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할 뿐이었다.
하여 그렇게 12월이 됐을 때.
업계를 조명하는 언론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자극적인 기사들을 쏟아내었다.
[천웅건설의 도전? 혹은 만용?]
[3파전이 아니라 4파전으로……. 과연 마지막에 웃는 것은 누구?]
[천웅건설. 전에 없던 최고의 프리미엄 아파트를 선보인다!]
[전문가들, 비현실적인 설계로 조합원들을 현혹하는 것은 좋지 않아…….]
그리고 조합에서 내건 ‘클린수주’라는 슬로건 때문에도, 청담 선영의 재건축 수주전은 더 크게 이슈가 되었다.
클린수주를 서울시나 정부에서 권고한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조합에서 발 벗고 나서 모든 로비를 일체 차단한 것은 전에 없던 방식이었으니 말이다.
이에 대해 수주전에 참여한 각 건설사가 인터뷰를 하기도 했는데, 대외적으로는 당연히 좋은 반응들이었다.
[제운건설 – 로비 없는 수주전은 모든 건설사가 환영할 만한 일.]
[SH물산 – 청담 선영 조합원들의 결단을 적극 지지한다.]
[명성건설 – 소모적인 로비 경쟁. 이제 벗어날 때 됐다.]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든, 클린수주의 명분만큼은 누가 봐도 옳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WJ 스튜디오는 11월보다 한결 조용해졌다.
천웅과 모든 설계 조율을 마친 WJ 스튜디오는, 이제 시공사 선정 총회(건설사 합동 설명회)가 열릴 때까지 별달리 할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천웅건설과 연계된 프로젝트 말고도 따로 진행되는 일들은 많았지만, 원래 바쁘다는 것은 상대적인 법.
가장 큰 프로젝트가 일단락되자 여유가 생긴 우진은 몇 달 만에 주말 출근을 피할 수 있었고.
제이든의 콜을 오랜만에 흔쾌히 수락할 수 있었다.
* * *
[헤이, 우진! 당연히 바쁘겠지?]
“아니, 별로 안 바쁜데?”
[What?! 안 바쁘다고?]
“응.”
[너 우진 아니지! 누구야. 누가 우진의 휴대폰을 훔쳐 간 거야?]
“요란 떨지 마, 제이든. 나라고 해서 매일 바쁘다는 법 있어?”
[당연하지!]
“왜?”
[그야 우진이니까.]
“……?”
12월 초는 대학생들에게 아주 행복한 시기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을 맞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러니까 방학이 앞으로 세 달이나 남아있는, 아주 설레는 시점이라는 얘기다.
물론 과제고 시험이고 편안하게 내려놓은 우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평범한(?)학생인 제이든에게는 달랐다.
성적이 어떻게 나왔든, 방학이란 원래 신나는 것.
심지어 학기 내내 신나게 놀았어도, 방학 때는 더 신나게 놀 생각으로 기분 좋은 게 일반적인 대학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화는 왜 한 건데?”
[후후. 우진도 사실, 이 제이든 님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 끊는다?”
[Wait!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우진은 성격이 너무 급한 것 같아.]
“너만큼 급하겠냐.”
[그럴 순 없지. 난 제이든이니까.]
“후우우…….”
우진이 바쁘지 않다는 말에 신이 난 제이든은, 전화통에 대고 속사포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인데, 우진.]
“말해.”
[이번 주 일요일엔, 우리 집에서 홈 파티를 하는 게 어때?]
“치킨과 피자를 먹고, 밤새도록 게임을 하는 그 파티?”
[후후. 그렇지 않아, 우진. 제이든의 홈 파티는 다시 태어났다고.]
“어떻게 다시 태어났는데?”
[그건 비밀이야.]
그리고 오랜만에 이런 통화가 나쁘지 않았는지, 우진도 제이든의 흰소리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런데 한참을 그렇게 떠들던 제이든이, 웬일로 바람직한 제안을 꺼내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석현의 생일을 챙겨주자는 것이다.
[그래서 우진까지 일요일 홈 파티에 오면, 소연이랑 석현까지 총 네 명이거든?]
“그런데?”
[그날 석현의 생일파티를 해 주는 건 어떨까?]
“뭐? 생일파티?”
[우진, 설마 12월 7일이 석현의 생일인 걸 몰랐던 거야?]
“일요일은 5일이잖아. 석현의 생일은 화요일이라고.”
[아, 맞아. 화요일이 생일이지만, 그냥 일요일에 파티하는 김에 해주자는 거였어. 역시 우진도 석현의 생일을 알고 있었군.]
“아니, 몰랐는데?”
[Bloody Hell! 어떻게 석현의 생일을 모를 수가 있어?]
수화기 너머에서부터 침이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은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고 있었던 탓에, 오늘은 제이든과 조금 더 놀아줄 용의가 있었다.
“제이든. 너, 내 생일은 아냐?”
[Holy! 잠깐, 그건…….]
“내 생일은 10월 19일이야. 이미 한 달도 더 지났지.”
[대체 우진의 생일은 왜 아무도 몰랐던 거야?]
“그야 나도 모르고 지나갔으니까.”
[…….]
“아침에 엄마가 미역국 끓여주실 때 깨달았거든. 아, 오늘이 생일이구나.”
잠시 말을 잃었던 제이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진은 역시 특이해.]
“제이든보다 더?”
[이 제이든 님보다 더 특이한 유일한 사람이야.]
“그건 칭찬이 아닌 것 같아, 제이든.”
[맞아. 칭찬이 아니야.]
“젠장.”
제이든과 낄낄거리며 떠들던 우진은, 문득 자신의 생일날을 떠올리며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 보면 한 달 좀 더 지난 자신의 생일은 회귀 후 첫 생일이었건만, 바쁜 탓에 너무 정신없이 지나간 것 같았다.
애초에 생일에 의미 부여한 지는 너무 오래된 우진이었기에,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말이다.
‘내년 생일도 똑같겠지 뭐.’
사실 우진은 제이든이 석현의 생일을 알고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신기했다.
그는 태어나서 부모님과 여자친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생일도 챙겨본 역사가 없었으니 말이다.
생일은 그냥 태어난 날일 뿐, 딱히 특별하진 않은 날이라는 게 평소 우진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제이든이 석구 생일을 챙긴 건 기특하니까…….’
그래서 결국 일요일의 파티 참석을 수락한 우진은, 제이든과 실없는 대화를 조금 더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이어서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은 우진은, 석현의 선물을 고민하며 인터넷을 뒤졌다.
생일을 챙긴다는 것 자체가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막상 고생한 석현을 치하(?)한다고 생각하니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석구가 올해 진짜 고생 많이 했지……. 덕분에 모형 파트도 엄청 성장했으니까. 꽤 괜찮은 선물로 한 번 챙겨 줘 볼까?’
하지만 그 고민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포털사이트 메인 화면에 크게 떠올라 있는 배너 하나가, 곧바로 우진의 시선을 사로잡았으니 말이다.
‘그래. 이거 괜찮네.’
우진의 눈에 들어온 광고 배너는, 다름 아닌 스마트폰.
정확히는 한국에 얼마 전에 출시된, 아이폰4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 이제 슬슬 스마트폰 쓸 때가 됐지. 폴더 폰에 이미 적응해 버렸지만……. 그래도 스마트폰은 앞으로 대체 불가니까.”
우진의 이 중얼거림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석현의 생일선물로 아이폰을 사줄 겸 해서, 자신의 것까지 같이 사려는 것이다.
아이폰4의 출고가는 90만 원대로, 친구 생일선물로 턱 내어주기에는 결코 싼 값이 아니었지만.
석현은 우진에게 단순한 친구 이상의 존재였으니, 딱히 아깝진 않았다.
이건 친구의 생일선물 겸, 유능한 인재의 충성심 향상(?)을 위한 오너로서의 투자라고 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생일선물도 정했고……!”
퇴근 시간까지 아직 두 시간 정도 남았지만, 우진은 미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오랜만에 석중과의 저녁 약속도 있었고, 마음먹은 김에 스마트폰도 개통할 생각이었으니.
조금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