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동상이몽
‘비대위’란, ‘비상대책위원회’의 약자이다.
그 이름만 들어서는 어떤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모인 기관 같은 느낌이지만, 재개발 재건축 사업에서의 비대위는 쉽게 말해 사업이 진행되지 않길 바라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사업이 진행되는 것을 막으려 할까?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다.
철거 이후 입주민들이 자리를 비움으로 인해 손해를 보게 될 상인들.
나중에 아파트값이 얼마가 오르든, 미 실현이익에 대한 기대보다는 당장의 추가 분담금이 부담되고 내기 싫은 사람들.
근본적으로 변화가 싫고, 이사 자체를 번거롭게 생각하는 사람들 등.
하지만 비대위 안에서도 가장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은 결국 재건축으로 인해 금전적인 손해를 크게 볼 만한 사람들이니, 이들을 무턱대고 비난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손익에 의해 움직이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퍼센트 비난해 마땅한 악질적인 비대위도 있는데, 청담 선영의 비대위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물론 이곳 비대위도 처음부터 그런 모임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재건축으로 인한 손해를 배상받고 합리적으로 이해득실을 따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건만, 수천억 이상의 돈이 굴러다니는 재건축 판 앞에서 눈이 돌아가 버린 것이다.
조합에서 적정수준의 보상안을 수차례나 제시했지만 전부 다 거절한 채, 계속해서 사업에 트집을 잡으며 사사건건 괴롭히는 비대위들.
이들의 목적은 하나였다.
청담 선영 사업장에서, 최대한 거액의 돈을 뜯어내는 것 말이다.
때문에 곽홍식이 받는 거의 모든 스트레스의 주범이 바로 비대위였고.
비대위를 싹 다 정리해준다는 우진의 말은, 비현실적으로 들릴지언정 혹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비대위를……. 정리해준다 하셨습니까?”
홍식의 어투는 무의식중에 공손해졌고, 우진은 대답 대신 미리 준비해뒀던 서류봉투를 탁자 위에 밀어 올렸다.
그러자 홍식이 다시 물었다.
“이게 뭡니까?”
우진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희가 드릴 수 있는 제안의 절반 정도가 담긴 서류입니다.”
“……!”
“저희든 조합장님이든. 서로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 아닙니까?”
홍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야, 당연한 얘깁니다.”
“해서 저희도 처음부터 전부 오픈할 수는 없고, 가지고 있는 패를 절반 정도만 먼저 보여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비대위의 약점이라도 잡을 수 있는 서류라는 겁니까?”
“비슷합니다.”
곽홍식은 당장이라도 서류봉투를 뜯어 열어보고 싶은 눈치였지만, 우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제가 드린 정보들의 진위 여부가 전부 다 확인되면, 그때 다시 연락 주십시오.”
“연락이라면…….”
“나머지 절반의 패를 보여드려야, 비대위를 날려버릴 수 있을 테니까요.”
곽홍식은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아직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우진의 자신감 넘치는 말을 듣다 보니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 말이다.
우진의 입이 다시 떼어졌다.
“대신 다시 연락 주시기 전엔, 클린수주를 먼저 선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저희도 조합장님을 믿고 남은 패를 전부 보여드릴 테니까요.”
홍식이 누런 봉투를 집어 들며 대답했다.
“이 안에, 어떤 자료가 들어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우진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이, 마지막 말을 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전화 주신다면……. 처음에 말씀드렸던 대로, 비대위를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 * *
조합사무실을 나온 우진은, 경완과 함께 잠시 WJ 스튜디오에 들렀다.
조합에서의 미팅이 생각보다 빨리 끝난 탓에, 커피라도 한 잔 마시러 온 것이다.
커피를 마시러 굳이 WJ 스튜디오까지 온 이유는 간단했다.
석중의 배려 덕에 WJ 스튜디오에는 카페 프레스코의 원두가 잔뜩 쌓여 있었고.
덕분에 WJ 스튜디오의 로비는, 어지간한 카페보다 맛있는 커피를 고급스런 인테리어와 탁 트인 뷰 앞에서 마실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후우-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입으로 후후 불던 경완이, 우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화, 언제쯤 올까?”
밑도 끝도, 맥락도 없는 말이었지만, 우진은 곧바로 이해하고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딱 3일만 기다리시죠.”
“3일?”
“사실 3일도 깁니다. 그거 확인하는 데 하루면 충분할 거고. 그 할아버지 성격상……. 내일 바로 전화 올지도 모르죠.”
“그 할배 성격이 어떤데?”
“딱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성격 엄청 급해 보이시던데요?”
“그런가? 하하.”
조합사무실에서의 미팅은 처음 경완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결국 준비한 모든 무기들을 적재적소에서 꺼내 들며 조합장 곽홍식을 요리한 것은, 맞은편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우진이었다.
때문에 경완은, 새삼스레 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스물두 살까지 뭔 짓을 하고 다녀야 이런 요괴가 탄생할 수 있는 거지?’
조합장 곽홍식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수십 년 사회생활을 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늙은 여우 같은 인물인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고 한들,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진은 대화를 주도하다 못해 완전히 쥐락펴락했고, 결국 홍식은 미팅하는 내내 우진의 의도대로 끌려다녀야 했다.
그래서 경완은 생각했다.
이 이십 대의 탈을 쓴 요괴 놈이, 자신과 한배를 탄 것이 너무 다행이라고 말이다.
“야, 근데 이거. 커피 너무 쓴데?”
“허어, 이게 쓰다니요! 고소한 게 향 죽이는구만.”
“향이고 나발이고, 난 그냥 우유 먹을래. 자판기 좀 다녀올게.”
“아 진짜. 촌스럽게!”
결국 자판기 우유를 뽑아 온 경완은, 우진과 조금 더 얘기를 나눈 뒤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금요일.
우진이 말한 대로, 곽홍식의 피드백이 돌아왔다.
* * *
건설사들이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본격적인 수주전이 시작되었다.
수주에 뛰어든 건설사들은 각각 청담 선영아파트 단지 곳곳에 플래카드를 걸었으며.
각자 자신들이 디자인한 설계도와 조감도가 담긴 홍보 책자를 인쇄하여 조합원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11월 상반기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본격적으로 로비를 시작한 건설사는 없었다.
너무 일찍 뿌리는 돈은, 효과가 떨어지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11월 중순인 지금 시점.
각 건설사들은 로비전 준비로 한창이었고, 그것은 명성건설도 다르지 않았다.
“이 팀장, 예산 확보는 전부 끝내 놨지?”
“예, 실장님. 경영지원실에 승인은 전부 받아뒀고, 세탁도 절반 정도는 끝났습니다.”
명성건설에서 이번 수주전을 진두지휘하는 실무자는, 바로 김진명 상무이사의 오른팔 윤영운 실장이었다.
그리고 그 수주전에 로비전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좋아. 규모는 어느 정도지?”
“지난번 서대문구 사업장에서 썼던 비용의 세 배 정도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흠. 충분할까?”
“제운 말고는 이만큼 쓸 수 있는 곳도 없을 겁니다. 걱정 마십쇼.”
“그래. 뭐……. 사실 그 이상 쓰는 것도 좀 과하긴 하지.”
“그렇습니다.”
윤영운은 명성건설에서 거의 이십 년 이상 근무하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수주전을 겪어왔다.
그가 처음 뛰어들어 지금까지 하고있는 업무가 영업 파트였기 때문에.
사실 수주전은 그에게 숨 쉬듯 익숙한 이벤트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수주전이 익숙하다고 한들, 그것과 별개로 이번 ‘청담 선영아파트’재건축은, 윤영운으로서도 더욱 각별히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사업장이었다.
이곳은 근 십 년 사이 청담동에 처음 나오는 재건축임과 동시에 가장 입지가 좋은 사업장이었고.
여기를 수주해 내느냐 마느냐는, 메이저 건설사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으니 말이다.
‘사실 자존심만의 문제는 아니겠지. 여길 따 내고 브랜드 로고를 박는 순간, 인지도는 수직 상승할 테니 말이야.’
윤영운은 이곳 청담 선영아파트를 재건축하고 새로 지어질 아파트에, 반드시 명성건설의 브랜드인 ‘수경(秀景)’을 박아 넣고 싶었다.
청담동의 한강 변 프리미엄 아파트 꼭대기에서 수경 로고가 번쩍거린다면.
청담동에 거주하는 수많은 로열 고객들은 물론, 올림픽대로를 지나다니는 셀 수 없이 많은 서울시민들의 뇌리에도 강력하게 박힐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 수주전에서의 승리는, 윤영운 실장에게도 승진의 발판을 마련해 줄 것이었다.
“언제부터 슬슬 풀어볼까요?”
이 팀장의 질문에 윤영운은 잠시 달력을 살펴보았다.
“일단 입찰 마감은 끝나야지.”
“그럼 11월은 패스하겠습니다.”
“시공사 선정 총회가 언제지?”
“12월 20일로 잡혔습니다.”
“좋아. 그럼 12월 초부터 슬슬 풀기 시작하면 되겠어.”
이 팀장이 ‘푼다’고 하는 것은, 당연히 조합원들에게 로비하기 위해 마련해 둔 거액의 현금들.
윤영운에게는 십수 년 넘도록 쌓인 노하우가 있었고, 이 거액의 돈을 어떤 식으로 풀어야 가장 효율적으로 조합원들의 표를 끌어올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로비를 할 땐, 너무 부담스럽게 접근하면 안 돼. 당연히 받아도 될 돈이라고 인식하게 만들면서……. 그와 동시에 책임감은 갖도록 만들어야지.’
보고가 끝난 이 팀장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의자에 쑥 기대앉은 윤영운은 조합원 명부를 훑어보기 시작하였다.
“많기도 하네.”
천 명이 훌쩍 넘는 조합원들.
두당 500만 원이 훨씬 넘게 책정된 로비 비용.
거의 100억에 가까운 비용을 경영지원실로부터 승인받았음에도, 윤영운은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번에 돈을 부어야 할 곳은, 다른 곳이 아닌 청담동이었으니 말이다.
‘오백 정도로는 꿈쩍도 않을 양반들이 수두룩할 거란 말이지. 오백씩 고루 뿌리면 망하기 딱 좋을 것 같고……. 먹힐만한 인원을 먼저 선별해야겠어.’
로비로 매수될 만한 조합원들을 색출하여, 넘어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정도의 비용을 확실하게 쑤셔 넣는다.
심플하지만 가장 확실한, 윤영운의 전략.
하지만 그렇게 하루 종일 전략을 세우고 회의하던 윤영운은, 퇴근 직전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
“예, 본부장님.”
“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로비를 안 받는다 했다고요? 선영아파트 조합에서요?”
청담 선영아파트 조합에서, 일체의 로비는 물론 모든 종류의 영업을 금지한다고 각 건설사에 통보했다는 것이다.
“지난주에 조합장 할배는 분명히 영업비용 받아 처먹지 않았습니까?!”
“그걸……. 다시 돌려줬다고요?”
때문에 전화를 끊은 윤영운은, 한동안 패닉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씨……발.”
지난 몇 주 동안 밤잠을 줄여 가며 계획하고 구성해 뒀던 수주전의 기본 베이스가.
말 그대로 완전히 엎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아니, 클린수주는 무슨 빌어 처먹을 클린이야!”
윤영운은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려찍었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게 있을 리는 없었다.
이번 수주전은 처음부터 단단히 꼬여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