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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119화 (119/315)

119화

동상이몽

청담 선영아파트의 조합장인 곽홍식은, 수십 년 전부터 청담동에서 살아온 토박이 주민이었다.

청담동 은행에서 삼십 년을 근속하여 은행장 직위까지 역임한 뒤, 은퇴하고 재건축 조합의 조합장이 된 인물.

사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조합장 직책을 마치 고등학교 반장이나 대학교 과대 수준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은퇴하고 할 일 없는 입주민들 중,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노후대책으로 조합장 월급이나 받으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도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수천억 이상의 거액이 굴러다니는 재건축 사업장에서, 방향키를 잡아야 하는 선장인 조합장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조합장의 추진력과 역량에 따라 사업 진행속도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곽홍식은, 준수한 능력을 가진 조합장이었다.

그가 이끌어 가는 청담 선영아파트 재건축 조합의 사업 속도는, 평균보다 훨씬 빠른 수준이었으니까.

‘추진위 설립한 지 이제 2년쯤 되어 가나……?’

사업 진행속도가 지지부진한 재건축 단지의 경우, 추진위원회가 설립된 시점을 기준으로 10년도 넘게 시간을 버리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그런데 청담 선영은 고작 2년 만에 시공사 선정단계에 와 있었으니, 곽홍식의 능력이 준수하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셈이었다.

‘내년 초에만 관리처분까지 받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좋은 능력과 별개로, 곽홍식은 그렇게 청렴한 사람은 아니었다.

조합장을 역임하면서 그렇게 큰 비리를 저지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굴러들어오는 돈도 거절할 만큼 대쪽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얘기다.

기본적으로 조합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고 일하기는 하되, 자신에게 떨어지는 콩고물까지 외면하지는 못한다고 해야 할까?

때문에 홍식은 오늘 조합사무실에 방문하기로 한 사람들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그가 만나기로 한 손님들은, 아마도 천웅건설의 관계자들.

수주전이 본격적으로 시동 걸리는 이 시점에 건설업체 관계자가 자신을 찾아올 이유는, 하나뿐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뭐라도 하나 찔러 넣어 보려는 거겠지. 탈 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받아먹고 적당히 거절해야겠어.’

이미 제운건설부터 시작해서 SH건설. 그리고 명성건설까지.

메이저 건설사의 관계자들은 이미 한 번씩 조합사무실에 다녀갔다.

홍식은 그때마다 소정의 떡값(?)을 받아 챙겼고, 오늘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홍식은, 이게 옳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것이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재건축 경험하는 동안 거의 십 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은데……. 이런 쏠쏠한 재미라도 없으면 어쩌겠어.’

그것은 이렇게 조합을 잘 이끌어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라고 할 수 있었다.

“휘유.”

담배를 한 개비 꺼내어 문 홍식은, 사무실 뒤편에 나 있는 문을 열고 베란다로 걸어 나갔다.

조합사무실이 있는 청담 선영아파트의 상가는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곧 부서질 예정인, 낡고 허름한 건물이었고.

조만간 이주가 끝나고 철거가 시작되면, 이사 나갈 예정인 사무실이었다.

그래서 손님이 볼일 없는 사무실 뒤편의 베란다는 담배꽁초로 가득했고, 이렇게 쌓인 담배꽁초만큼이나 홍식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재건축 조합을 운영하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은 그였다.

“후우우…….”

깊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뱉어낸 홍식은, 시계를 확인한 뒤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볐다.

치이익-

이제 약속시간이 다 되었으니,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제발 천웅 놈들은 좀 합리적인 사람들이었으면 하는데…….’

담뱃불을 끈 홍식은 다시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그가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똑똑똑-

누군가 사무실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조용한 가운데 울려 퍼졌다.

“일단 약속시간은 칼 같군.”

작게 중얼거린 홍식은, 담담한 목소리로 밖을 향해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오.”

* * *

“반갑습니다. 천웅건설에서 이번 사업 책임을 맡은 박경완이라고 합니다.”

“여기까지 오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 조합장 곽홍식입니다.”

“안녕하세요. WJ 스튜디오 대표 서우진입니다.”

“……! 젊으신 분이 대표님이셨군요.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처음 이야기의 시작은, 무척이나 평이한 느낌이었다.

설계사무소 대표 서우진이라는 남자의 나이가 지나치게 어려 보이기는 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한다면 평범한 안부 인사가 오가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사업 진행하신다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조합장님.”

“하하, 월급 받는 만큼 일하는 게지요, 뭐.”

“지난 사업 설명회는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저희 천웅에서도 꼭 수주전에 참여하고 싶을 만큼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건설사에서 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청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건설사 합동 설명회라면.

건설사 관계자들을 불러놓고 사업장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 조합의 사업 설명회라 할 수 있다.

박경완이 말하는 사업 설명회란 바로 이것이었고.

조합이 준비했던 설명회에 대한 칭찬으로 운을 뗀 덕분인지, 분위기는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지난번 마포에서 론칭하신 클리오 브랜드는,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하핫, 그렇습니까?”

“오죽하면 제가 직접 천웅에 연락해서 입찰을 부탁드렸겠습니까.”

“그 일은 정말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잘 좀 부탁드립니다. 청담 선영 아파트, 이 강남에서도 최고의 아파트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물론입니다, 조합장님.”

하지만 분위기가 부드럽게 흘러가는 것과 별개로.

지금의 이 대화들이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곽홍식과 박경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인사치레는 사실 탐색전일 뿐.

본론은 따로 있음을, 양쪽 다 아는 것이다.

물론 서로가 생각하는 본론이 다르기에, 동상이몽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인수 씨, 음료 세 개만 좀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조합장님.”

사무직원이 커피를 한 잔씩 내려오자, 대화는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싸구려 종이컵에 담긴 커피였지만, 맛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경완이 다시 입을 떼었을 때.

“해서 말입니다, 조합장님.”

“예, 말씀하시죠.”

“저희 천웅건설에서 조합에 한 가지 건의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곽홍식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슬슬 본론을 꺼내나 보군.’

드디어 그가 기다리고 있던 이야기를, 경완이 꺼내는 것으로 생각했으니 말이다.

잠시 뜸을 들인 홍식이, 은근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건의라. 어떤 건의입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아무래도 이 수주전을, 공정한 환경 속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흥행시키기 위한 건의겠지요?”

“긍정적인……. 방향이라면?”

뭔가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는 경완의 이야기에, 홍식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저희 천웅에서는 청담 선영 조합에서 ‘클린수주’를 한번 표방해 보시는 건 어떨지 건의 드리러 왔습니다.”

“클린수주라. 당연히 수주는 투명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역시 조합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무, 물론 그렇기는 한데…….”

그리고 당황한 표정이 된 홍식을 향해, 경완이 씨익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 수주전에서, 모든 조합원들을 향한 건설사 일체의 영업을 금지해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뭐……요?”

“당연히 저희 천웅도 예외는 없습니다.”

“아니, 그런 사업장이 대체 어디에……!”

“건설사가 조합원 로비에 쓰는 돈. 그거 사실 다 건축비에 포함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갑자기 쏟아지는 경완의 말에, 잠시 말을 잃은 곽홍식.

“저희 천웅은 그 비용을 아껴, 청담 선영의 고급화와 특화설계에 모든 비용을 쏟아붓고자 합니다.”

경완의 말은 전부 맞는 말이다.

그것을 알기에 홍식도, 순간 말을 잃은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홍식은 쉽사리 그 이야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애초에 별로 마음에 드는 제안도 아닐뿐더러, 지금까지 다른 건설사로부터 먹은 돈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잠시 가만히 있던 홍식은, 천천히 다시 입을 떼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책임님.”

“예, 조합장님.”

“하지만 본래 관행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고, 이것을 쉽게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홍식의 말을 들은 우진은, 속으로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관행을 들먹이며 곤란한 척하지만, 사실 제대로 된 논리조차 없이 제안을 밀어내는 모양새였으니 말이다.

“물론 모든 건설사들이 천웅과 같은 생각을 가졌다면 최고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경완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우진이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꼭, 모든 건설사가 같은 생각일 필요 있습니까?”

그리고 우진의 그 말에, 홍식의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갔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지금 저는 천웅과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번에는 경완이 말했다.

“이 친구 입장도 곧 천웅의 입장입니다.”

홍식이 주름진 눈을 가늘게 뜨며, 경완을 노려보았다.

“그 말씀, 책임지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홍식과 경완의 시선이 다시 우진을 향했다.

그리고 홍식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것을 확인한 우진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담담한 목소리와 별개로, 우진의 이야기는 마치 시한폭탄처럼 홍식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조합장님, 조금 더 솔직해지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미 저희 말고도, 다른 건설사에서 많이 다녀가지 않았습니까?”

“……!”

“이미 받으신 게 있을 텐데 이제와서 클린수주 어쩌고 빗장을 쳐 버리면……. 조합장님 입장이 난처해지는 것 알고 있습니다.”

너무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우진의 이야기는, 경완조차 살짝 당황할 정도였다.

때문에 그 표적이 된 홍식은, 얼굴이 완전히 시뻘게 질 수밖에 없었다.

“어린 친구가, 말씀을 너무 함부로 하시는군.”

“제가 혹시 없는 얘기 했습니까?”

“증거라도 있소? 그저 어림짐작으로 이런 말씀 하시는 것 같은데, 이런 무례가 대체 어디에 있소?!”

당장이라도 책상을 내려칠 듯 꽉 움켜쥔 홍식의 주먹을 보며, 우진은 다시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우진의 입장에선 흥분할 이유가 없었다.

홍식의 이런 반응은 사실, 너무 예상 그대로였으니 말이다.

“증거야 당연히 있습니다. 어림짐작으로 이런 얘기를 할 만큼, 제가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

“하지만 딱히 증거가 필요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뭐요?”

“조합장님께서 다른 건설사로부터 뭘 얼마나 받았든, 그걸 나무라기 위해 온 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오!”

“어느 사업장이나 그런 관례가 있다는 정도는, 저도 당연히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대체 왜……!”

우진의 말을 듣던 홍식은, 순간 말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자신이 그랬다는 것을, 대놓고 인정할 뻔한 것이다.

우진의 페이스에 그대로 빨려 들어갈 뻔한 홍식은 씩씩거리며 분을 삭였고.

그런 그를 향해 우진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우진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지금까지가 어땠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제부터, 모든 건설사의 로비를 전부 다 막아주시면 됩니다.”

우진과 경완이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결국 조합과 딜을 하기 위함이다.

홍식을 자극하고 치부를 들춰내기 위해 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약간의 채찍질을 한 것이었으니, 이제 당근을 쥐여 줄 차례.

가라앉은 분위기에 홍식 또한 조금 누그러진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불쾌감을 감추지는 않았다.

사실 시공사 선정을 앞둔 이 시점.

건설사 미팅 자리에서의 갑(甲)은 바로 조합장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그렇게 해줄 거라고 생각합니까? 이렇게 무례를 저질러놓고?”

하지만 우진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홍식을 타이르기라도 하듯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무례로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오늘 저희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오히려 상부상조하기 위함이니 말입니다.”

“……?”

곽홍식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우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저희는 오늘 조합장님과 딜을 하러 왔습니다. 조합장님은 방금 저희가 부탁드린 클린 수주를 진행해주시면 되고, 대신 저희는 조합장님께서 거부하실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제안을 드릴 예정입니다.”

홍식은 당황했다.

이 새파랗게 어린 녀석과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완전히 페이스가 말려버렸으니 말이다.

‘대체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그리고 홍식이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우진은 다시 한번 훅 치고 들어갔다.

“요즘, 비대위 때문에 골치 아프시죠?”

“비대위? 갑자기 그 얘기는 또 왜 꺼내는 거요?”

“제가 청담 선영 비대위, 싹 정리할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

“이 정도면 오히려, 저희가 손해 보는 장사 아닙니까?”

방금까지의 불쾌감은 어디로 날아가 버리기라도 했는지.

곽홍식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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