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수주전의 시작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포차는 무척이나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성수 포차는 일반 포차와 달리 꽤 넓은 업장이었고.
안쪽 깊숙이 있는 분리된 룸은 조용히 술 한잔하기 괜찮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우진은, 두 아재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말하는 건, 조합장을 입맛대로 움직여 로비를 막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카드를 찾았다는 거지?”
“뭐, 비슷하죠. 사실 강제로 움직이게 한다기보다는, 일종의 딜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딜이라…….”
“소나기를 피해 갈 방법을 알려 주겠다. 대신 클린 수주 슬로건을 내걸고, 모든 건설사의 청탁과 로비를 전부 다 거부해라.”
“대체 그게 뭔데?”
“그거 설명해드리려고 모신 거잖아요. 이제부터 말하려고 했어요. 흐흐.”
영문도 모른 채 경완을 따라 성수 포차에 온 주형은, 처음 새파랗게 어린 우진을 보고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경완이 꼬마라고 하는 것이 키가 작다거나 어떤 외모에 대한 비유인 줄 알았는데.
정말 그들의 앞에 나타난 인물이,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는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지난 주말.
TV 예능에서 봤던 얼굴이었으니까.
‘만나야 한다는 게, 이 친구였어?’
하지만 어째서 경완이 굳이 자신까지 끌고 20대 초반의 애송이를 만나러 온 것인지는.
자리에 앉은 지 10분도 채 지나기 전에 알 수 있었다.
처음에 검은 돈 수주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허풍이라 생각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들으면 들을수록 그럴싸했으니 말이다.
‘대체 이런 내용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청담 선영 조합 내부자라도 되는 건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형은, 그의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그럴싸한 것과 별개로 어쨌든 확인된 사실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경완은 이미 수주전에서 이기기라도 한 양 만면이 활짝 피어있었다.
“야, 이거. 너무 손해 보는 장사 아냐? 그냥 살려줄 테니, 시공사 천웅 찍으라고 하면 안 돼?”
“흐흐,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렇게까진 힘들 겁니다.”
“왜?”
“시공사 투표는, 조합장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아, 흐음. 그런가?”
우진의 이야기들이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하는지,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경완.
그런 그를 보며 주형은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우진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며 경청하였다.
어쨌든 사실을 전제로 한다면.
그 애송이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지금 천웅에 꼭 필요했던 얘기들이었으니까.
심지어 천웅의 영업부장인 주형 자신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그렇다고 조합장이 조합원 전부를 설득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니……. 너무 과욕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네 말이 맞아. 사실 로비전 피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충분히 대박이지.”
천웅이 선택한 WJ 스튜디오의 설계는, 그 어떤 설계안보다도 막대한 건설비가 필요하다.
때문에 영업부에 지원되는 조합원 영업비용은 상대적으로 타이트하게 배정될 수밖에 없었고.
그 상황에서 제운건설, SH물산, 명성건설 등의 영업부서와 경쟁해야 하는 오주형은, 미칠 노릇이라 할 수 있었다.
영업비용이 충분히 배정 돼도 경쟁하기 힘든 매머드급 건설사들을, 평소보다 더 타이트한 비용으로 상대해야 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서우진이라는 애송이 말대로라면, 영업부서는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땡전 한 푼 없어도 다른 건설사들의 영업부와 비벼볼 수 있는 이상적인 판이 깔리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홍보 전단이나 책자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이야 당연히 그대로다.
하지만 그 정도는 기존에 생각했던 영업비용과 비교하면 푼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 넌 어떻게 할 생각인데?”
“일단 조합장이랑 접촉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네가 직접?”
“네. 자리 만들어주실 수 있죠?”
“있지. 아니 있어야지.”
“부장님도 같이 가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이렇게…….”
우진과 경완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주형의 마음속 한쪽 구석에 있던 의심마저 빠르게 씻겨 나갔다.
허풍을 떨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기엔, 너무 짜임새가 완벽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청담 선영의 비대위를 비롯한 사업장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체계적으로 사업장의 현황을 파악 중인 천웅건설의 영업팀보다도 더 빠삭해 보일 정도.
결과적으로 주형은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우진과 경완의 대화를 눈을 껌뻑이며 듣기만 했다.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우진의 말들을 끊을 수 없었으며.
그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속으로 감탄하기 바빴으니 말이다.
‘대체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마치 무슨 흥신소 직원이라도 되는 양, 청담 선영 재건축 조합의 사정을 샅샅이 해부해 가며 솔루션을 제시하는 우진.
그래서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주형은 드디어 우진을 향해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한 마디를, 꼭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저기, 서우진 씨.”
“대표님이라고 해라 짜샤.”
“아, 그래요. 서 대표님.”
“예?”
주형은, 세상 이렇게 궁금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조합 내부정보들은 대체,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그에 우진은 씨익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업장이 어딨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운이 조금 좋았습니다. 그렇게만 알아주세요.”
운이 좋았다.
조금 많이 좋았다.
우진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운이 보통 좋지 않고서는, 이렇게 과거로 돌아올 수 있을 리 없었을 테니 말이다.
* * *
11월 둘째 주가 되었다.
모처럼의 달콤한 휴가를 갔던 WJ 스튜디오의 직원들은, 개운한 마음으로 월요일부터 출근했다.
“다들, 좋은 아침!”
“이거 너무 오랜만에 출근했더니 몸이 찌뿌둥하네.”
“그래? 나는 일주일 쉬었더니 빨리 출근하고 싶던데. ”
“이야, 대표님 계시다고 아부하는 것 좀 보소?”
“아부라니! 난 있는 그대로를 얘기한 것뿐이라고.”
“하하하.”
그리고 오전 회의에서 우진으로부터 공모전 입찰 결과에 대해 들은 직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와, 대박!”
“됐다!”
“될 줄 알았다니까!”
한 달 동안 직원 전체의 피와 땀이 녹아있는 설계가 인정을 받은 셈이니, 기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침부터 기분 좋네요 진짜.”
“크, 우리 설계가 청담동 알짜배기 단지에 시공되다니!”
“김칫국 마시지 마, 송대리. 천웅에서 수주전을 이겨야 시공이 되는 거지.”
“아, 맞다. 아직 수주전 남아 있었지?”
우진은 일부러 직원들에게 공모 결과를 미리 말해주지 않았었다.
휴가 기간 동안 편히 쉬어야 하는 직원들에게, 굳이 부담 주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자, 그래서 오늘부턴 다시 바쁠 거예요. 진태 실장님껜 미리 전달 드려 놨지만, 천웅 설계팀이랑 계속해서 커뮤니케이션 주고받으면서 설계 수정 보완해야 하거든요.”
“예, 대표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좋아요! 11월도 한번 불태워 봐요, 우리!”
그리고 우진의 그런 배려 덕분인지, 시공 설계팀의 의욕은 아침부터 활활 불타올랐다.
하여 그렇게 월요일, 화요일.
시간은 또 다시 빠르게 지나갔고.
다들 프로젝트 진행으로 바쁜 와중에, 우진은 개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설계의 큰 방향성은 이미 잡혀있었기 때문에, 우진의 디렉팅 없이도 일정대로 잘 굴러갔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진은 선영아파트의 조합장을 만나러가기 전에, 경완과 함께 따로 조사 중인 사항들이 있었다.
조합장과 대면할 때 꺼내놓을 무기들을, 확실하게 확보하기 위해서 말이다.
[야, 우진아. 네 말대로다.]
“그래요?”
[선영아파트 재건축 조합 대의원 중의 한 명이, 비대위 회장이랑 친인척 관계야.]
“역시!”
[거기 선영아파트 1층에 엄청 큰 갈비탕 집 알지?]
“네, 당연히 알죠.”
[그 음식점 주인이더라고.]
“아하. 거기 장사 엄청 잘 되지 않아요?”
[맞아.]
“재건축 방해하고 싶을 만하네요.”
[그렇지 뭐. 상가 주인들도 재건축되면 섭섭지 않게 분양이야 받겠지만, 그래도 잃어버린 손님들은 돌아오지 않잖아.]
“조합에서 보상안도 따로 내놓지 않았던가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사람 욕심이라는 게 어디 끝이 있어야 말이지.]
“하긴……. 어떤 상황인지 알겠네요.”
우진과 경완은 지금, 알고 있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역 추적하여 비대위의 뒤를 캐내는 중이었다.
아무 정보가 없었다면 무척 어려웠을 일.
하지만 기본적으로 가닥을 잡은 상태에서 역방향으로 추적하는 상황이기에, 원하는 정보는 금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부장님, 생각보다 더 빨리 찾으셨네요?”
[흐흐. 청담 선영 조합원이 천 명이 넘잖냐.]
“……?”
[잘 뒤져보니까, 지인 중에도 조합원이 있었더라고.]
“아하…….”
[정확히는 한 다리 건너야 하긴 한 데, 네게 들은 얘기 슬쩍 흘리니까 곧바로 술술 털어놓더라.]
“대놓고 얘기하신 건 아니죠?”
[당연하지. 내가 바보냐?]
우진은 경완에게 비대위의 뒷조사를 부탁하는 한편.
선영아파트 재건축 조합의 카페에도 접속해 보는 등, 반대편에서 필요한 정보들을 수집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대략적인 정보수집이 끝난 목요일 오후.
우진은 경완의 연락을 다시 받을 수 있었다.
[우진이, 내일 오전에 시간 좀 비울 수 있지?]
“조합장이랑 미팅 잡힌 건가요?”
[빙고.]
“오전 몇 시요?”
[대략 11시쯤?]
“네. 그 시간이면 가능합니다.”
[좋아. 그럼 시간 맞춰서, 청담 선영 조합사무실 앞으로 오도록 해.]
“넵. 조합사무실, 상가 3층에 있었죠?”
[맞아. 그럼 내일 보자.]
“알겠습니다, 부장님.”
그리하여 경완, 주형과 포차에서 술을 마신 날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인 금요일 오전.
끼익-!
사무실 대신 청담동으로 향한 우진은, 선영아파트 상가에 차를 대고 경완을 만났다.
“왔냐?”
“안 늦었죠?”
“칼같이 딱 맞춰 왔네.”
“그럼요.”
“준비는 됐지?”
“무슨 준비요?”
“혀에 미리 기름칠 좀 했냐 이거지. 노인네 구워삶으려면, 입 잘 털어야 할걸?”
경완의 물음에 우진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칼자루를 전부 다 쥐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만만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당연하죠. 서포트나 잘 해줘요.”
“하긴. 네 주둥이는 꽤 믿을 만하지.”
“전략적 파트너한테 주둥이라니,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그거 칭찬이야, 인마. 입 터는 게 얼마나 힘든 건데. 짜식이.”
우진은 언제나처럼 경완과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상가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상가 안으로 들어오니, 어머니께서 장사하시는 수제비 칼국수 집이 잠시 떠오르는 우진이었다.
‘여기처럼 개포 주공도 빨리 재건축이 돼야 하는데…….’
3층까지 올라서자 복도 끝에 까무잡잡한 철문이 눈에 띄었다.
색이 다 바래고 껍질이 까진, <청담 선영 재건축 조합>이라는 명패가 붙어있는 낡은 철문.
망설임 없이 그 앞으로 다가간 경완이 문을 두들겼고.
똑똑똑-
잠시 후 안쪽에서 칼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시오.”
끼익-!
문을 연 우진과 경완은, 천천히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