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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114화 (114/315)

114화

마음을 움직이려면

월요일에 있었던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경완은 진행자로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가 넋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회의를 진행하면서도, 공모작으로 올라온 설계들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었으니 말이다.

각자 의견을 피력하는 여러 직원들의 이야기들을 경청하면서, 과연 어떤 설계를 선택하는 게 이 수주전에 최선의 선택이 될지 끊임없이 고민한 것이다.

WJ 스튜디오에 자꾸 마음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우진과의 친분 때문인지, 아니면 설계의 높은 퀄리티 때문인지는 몰라도.

회의가 중반 이상 진행될 즈음 경완의 마음은, 이미 WJ 스튜디오 쪽으로 반 이상 기울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우진과의 친분 때문에.

경완은 더욱 자신의 판단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우진과의 친분이 본인의 판단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는 것을, 최대한 경계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오늘 경완이 우진을 만나자고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화요일인 오늘은 임원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고.

회의에서 어느 정도 결과가 도출된 뒤 수요일 오전쯤, 대표이사 천종걸이 경완을 아마 불러올릴 것이다.

그 자리에서 경완이 천종걸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느냐에 따라 공모의 결과가 결정된다고 봐도 무방했으니.

그 전에 우진을 만나보고 싶었던 것이다.

경완은 사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진으로부터 어떤 확신을 얻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가 WJ 스튜디오의 설계를 밀어붙여도 될, 확실한 근거 같은 것을 말이다.

그래서 능글맞게 말을 꺼낸 경완은, 천천히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오늘 내가, 물어볼 게 좀 많아, 서 대표.”

“물어볼 거요? 뭔데요?”

“뭐겠냐. 당연히 공모 입찰 건 때문에 그렇지.”

경완의 대답에 우진의 눈이 반짝였고, 경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넌 어떻게 생각해?”

“자꾸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물어보시면 뭐라고 대답합니까?”

경완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네가 보낸 그 설계 말이야. 현실적으로 경쟁력 있다고 생각해?”

경완의 물음을 들은 우진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가 지금 듣고 싶은 말이 뭔지, 판단해야 했으니 말이다.

‘설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여기까지 날 불러서 밥이나 먹자고 하실 양반은 아니고…….’

우진의 말이 이어졌다.

“저야 된다고 생각했으니 메일 쐈죠.”

“안된다고 생각했어도 일단 쏘긴 했을 거 아냐?”

“아닙니다. 안된다고 생각했으면, 그냥 기권했습니다.”

“흐음, 그래?”

우진의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턱도 없는 설계를 보내서 WJ 스튜디오의 신뢰도만 떨어뜨리느니, 차라리 공모에 기권을 하는 것이 우진의 판단이었을 테니 말이다.

경완은 그런 우진의 진심을 느꼈고, 그래서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사실 네 말이 맞아, 서 대표.”

“뭐가요?”

“나도 네가 보낸 설계 보자마자, 바로 된다고 생각했거든.”

“……!”

“그래서 솔직히, WJ 스튜디오를 밀어보고 싶다. 오늘 널 부른 것도, 그 때문이고 말이야.”

경완은 직원이 따라놓고 간 찻물을 홀짝이며 잠시 침묵했고, 그의 말을 들은 우진은 기분 좋은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모 결과가 결정됐다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담당자인 경완의 마음을 움직인 것만 해도 충분히 고무적인 성과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경완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럼, 밀어주시면 되잖아요? 뭐가 문젭니까?”

어지간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는 우진이었지만, 이번에는 상기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청담 선영아파트의 재건축 설계는, 그만큼 우진도 간절히 바라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문제? 그래. 문제라…….”

애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를 한 젓갈 집어 먹은 경완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서 대표.”

“예?”

“어디 허공에서 건축비 떨어질 데 없냐?”

“네? 갑자기?”

“갑자기라니. 방금 문제가 있다고 했잖아.”

“……?”

“설계는 다 좋아. 멋지고. 깔끔하고. 고급스럽고. 나도 한 채 사서 살고 싶었으니까.”

“에이. 부장님은 이미 아현동 사셨잖아요. 욕심은…….”

“니가 거기 사라고 해서 여기 못 사잖아!”

“그게 이렇게 되는 겁니까……?”

“어땠든. 말이 잠깐 샜는데…….”

경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지는 그거야.”

“다 좋은데, 공사비가 너무 막대할 것 같다는 거죠?”

“그렇지.”

우진의 대답에, 경완이 인상을 팍 쓰며 한 마디 더했다.

“짜식이. 다 알아들었으면서 모른 척을 해?”

“모른 척이라뇨. 방금 이해한 겁니다. 방금.”

“말이나 못 하면…….”

자신 못지않게 능글거리는 우진을 보며, 경완은 한숨을 푹 쉬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놈, 스물둘은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

“너랑 얘기하다 보면, 말리는 기분이야.”

“그런 걸 기분 탓이라고 하는 거죠.”

“휴우.”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커다란 회 접시가 한 대접 식탁 위에 올라왔고, 우진은 그것을 한 점 집어 먹었다.

기름기 좔좔 흐르는 참치 뱃살이, 우진의 혀에 닿자마자 살살 녹아내렸다.

경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느 정도 눈치챈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부장님. 공사비라는 게 뭡니까?”

“뭐긴 뭐야. 공구리 쳐올리는 데 들어가는 돈이지.”

“그거 누가 냅니까?”

“시행사. 아니 조합원이 대지.”

“그럼 비싸진 만큼의 공사비를, 결국 조합원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걸 누가 몰라?”

“그러니까 평당 일이백 더 주고라도 우리 클리오를 선택하라고. 그렇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뭐라 대꾸하려던 경완의 입이, 순간 다시 다물어졌다.

우진의 이야기가, 정확히 경완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으니 말이다.

이렇게까지 얘기했단 건, 어떤 방법이 있다는 얘기.

경완은 우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우진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결국 조합원들이 바라는 건, 자신들이 최대한 큰 이득을 보는 겁니다.”

“그렇지.”

“이득을 보는 방법이, 공사비를 깎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죠.”

“집값이 더 오르면 된다?”

“그게 원론이긴 합니다만…….”

우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불확실성이 큰 미실현 이득에 대한 어필만으로는, 조합원들의 마음을 돌려오기 힘들 겁니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우진이 씨익 웃었다.

“저희에겐, 일반분양분이라는 무기가 있지 않습니까?”

우진이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꺼내자, 경완은 살짝 움찔했다.

하지만 재건축 사업이라는 커다란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위해,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바로 일반분양이었고.

그래서 우진이 꺼낸 얘기는,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도 했다.

“흐음.”

잠시 턱을 만지작거린 경완이, 툭 내뱉듯 말했다.

“더 얘기해 봐.”

* * *

일견 복잡해 보이는 재건축 사업의 구조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일단 사업이 시작되는 이유는 당연히, 낙후된 아파트를 새 아파트로 개선하고 싶은 본질적인 주거, 질 향상에 대한 갈망.

하지만 아파트를 부수고 그 자리에 새 아파트를 더 멋들어지게 짓는 사업에, 돈이 한두 푼 들어갈 리 없었다.

본래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이 공사기간동안 임시로 나가 살 집을 구해야 하는 등. 잡다하게 들어가는 부대비용들을 전부 제외하고 생각해 보더라도…….

애초에 공사 규모 자체가 어마어마했으니 말이다.

그럼 그 돈을 어떻게 조합원들이 충당할까?

그 비밀은 바로 용적률에 있었다.

용적률이란 쉽게 말해, 아파트 모든 층의 면적을 전부 합한 넓이(연면적)가 대지면적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의 비율이 되느냐를 의미하는 수치이다.

삼사십 년 전에 지어진 아파트들은 층수가 낮아 용적률이 150퍼센트 미만인 경우가 많았고.

2010년을 기준으로 건축법상 3종 주거지역에 허용되는 구역은 용적률 상한이 250퍼센트를 넘길 수가 있었으니.

건축 가능한 남은 용적률을 최대한 활용하여 층수를 올리고 세대수를 늘리면, 같은 땅에 지어져 있던 원래 아파트보다 세대수가 훨씬 더 많은 대단지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 세대가 넘는 청담 선영아파트의 경우 부수고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조합원들에게 새 아파트를 한 채씩 나눠준 뒤에도, 외부인들에게 분양할 수 있는 아파트가 수백 채 이상 나오게 된다고 할 수 있었다.

한 채에 십억이 넘을 아파트 수백 채를 팔아 번 돈으로, 공사비를 충당할 수 있으니.

이렇게 대규모로 아파트를 부수고 다시 짓는 재건축 사업이,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파트 분양으로 건축비를 충당한다면, 조합원들이 부담해야 하는 추가 분담금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건 간단한 문제다.

새 아파트 수백 채를 팔고도 공사비가 부족할 때, 추가 분담금이 생기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땅은 넓고 조합원 수는 적은 사업성 좋은 사업장의 경우, 조합원에게 추가 분담금 대신 환급금이 나오거나 아파트 두 채가 생기는 경우도 나올 수 있다.

“일반분양분의 분양가를 올려서 공사비를 충당하면, 결국 조합원이 부담해야 할 돈은 줄어듭니다.”

“그야, 그렇지.”

“공사비가 늘어나는 만큼, 평당 분양가를 올리면 되겠죠.”

우진의 말은 청산유수처럼 이어졌다.

“사실 공사비 올라간 만큼까지 올릴 필요도 없습니다. 분양가로 상승분의 70퍼센트 정도만 충당해도, 조합원들은 기꺼이 나머지 30퍼센트 정도 수용할 테니까요.”

“음…….”

“물론 최대한 올려서 오히려 조합원들 분담금까지 낮춰준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겠죠.”

우진의 말이 끝나고 경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연히 우진의 말을 전부 이해했지만,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 다 좋아. 다 좋은데…….”

경완은 조목조목 따져 묻기 시작했다.

“일단 가장 먼저 생각나는 문제는 분양가 상한제.”

“그건 이제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래. 뭐, 이거야 폐지한다고 발표했으니,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셈이고…….”

입이 마르는지 물을 한 모금 마신 경완이 다시 입을 떼었다.

“그럼 결국 문제는 올린 분양가를 소비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인데…….”

머릿속으로 잠시 계산한 경완이 말을 이었다.

“공사비 평당 백을 단순 계산으로 분양가로 돌리면, 34평 아파트 기준으로 총분양가가 3~4천이 늘어나는 거야. 그렇지?”

“그렇죠.”

“예상보다 몇천 이상 올라간 분양가를, 소비자들이 받아들이고 사갈까? 미분양 되면 그게 더 큰 골치인 거, 너도 잘 알잖아?”

일전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2010년도는 강남이라 해도 미분양이 충분히 날 수 있는 부동산 불경기였다.

시대적 상황이 이러다보니, 시공사와 조합에서 분양가를 어떻게 산정하든 정부에서 크게 터치하지 않는 시기이기도 했다.

정부에서 집값을 잡기 위해 만들었던 분양가 상한제를 폐지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고 말이다.

그래서 경완의 걱정은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재밌게도 우진의 입장에서는 걱정거리조차 되지 않는 문제였다.

우진은 당장 몇 년 뒤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알고 있으니까.

‘청담 선영 재건축은, 미분양 되면 그냥 건설사에서 안고 가도 이득인데…….’

미분양이 막 백 채 이상 나와서 감당되지 않는 게 아니라면, 건설사에서 완공 때까지만 들고 있으면 된다.

금융비용으로 꽤 많은 돈이 깨지겠지만,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완공 시점만 돼도 이곳에 지어질 새 아파트는, 프리미엄이 수억 이상 붙어서 팔려나갈 테니까.

‘돈만 있으면 내가 미분양 싹 다 주워가고 싶네.’

하지만 이런 미래의 사실을 경완에게 공유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우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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