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13화 (113/315)

113화

마음을 움직이려면

화요일 오후.

WJ 스튜디오는 무척이나 평온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많은 인원이 오가는 설계 시공 파트의 직원들이 전부 다 휴가를 나가 있었으니 말이다.

대표 직권으로 행해진 강제 휴가(?)조치.

모형 파트의 직원들은 부러워했지만, 그와 동시에 더욱 의욕을 불태웠다.

결국 시공설계 파트 직원들에 대한 대우가 본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통용되는 것이었고.

그 말인 즉 실적이 커지고 일이 많아지면, 자신들 또한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물론 지금도 매출이 좋은 달에는 인센티브를 받고 있었고 말이다.

“크……. 대표님. 저는 휴가 좀 안 주십니까?”

대표실에 잠시 놀러 온 석현이 커피를 마시며 묻자, 우진이 피식 웃으며 대답하였다.

“이번 달 매출 5억 넘으면, 모형 파트도 일주일 휴가 내줌.”

“응? 이미 넘었잖아.”

“전체 매출 말고, 모형 파트 매출 말이야.”

“야 이……! 나쁜 사장님아!”

시공 파트와 달리 모형 파트는, 영업이익률이 꽤나 높다.

그리고 영업이익률이 높다는 말은, 반대로 매출 크기를 올리기 힘들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해서 WJ 스튜디오의 10월달 전체 매출 중, 모형 파트의 매출 비중은 대략 3억 정도.

그 1.5배가 넘는 수준의 매출을 달성하라는 이야기였으니, 석현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했다.

“왜, 할 수 있잖아, 석구.”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쉰 석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게 바로 지옥의 쳇바퀴인가?”

“그게 무슨 소리야?”

“생각해봐.”

“뭘?”

“일을 쉬고 싶어서 휴가를 요청했어. 그런데 휴가를 가려면 매출을 올려야 한대. 그럼 어떻게?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는 야근을 해야 하지.”

우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빙고.”

“야이, 씨. 너무하잖아!”

하지만 석현의 강력한 반발에도, 우진은 손가락만 까딱일 뿐이었다.

“뭐가 너무하냐. 매출 달성이고 나발이고, 휴가 없는 나는 안 보이냐?”

“……!”

“시공 설계 전부 다 휴가 줬어도, 난 아침부터 출근했잖아.”

“그…… 렇게 말해버리면…….”

“그럼 뭐?”

“제가 할 말이 없어지잖습니까, 대표님.”

“흐흐흐.”

물론 천웅건설의 공모 마감이 끝나고 나니, 우진도 훨씬 여유로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대표라는 자리는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자리.

직원들이 돌아왔을 때 붕 뜨지 않도록 일정을 정리하고 다음 일거리를 준비해 놓으려면, 우진은 오늘도 계속 움직여야만 했다.

커피를 다시 한 모금 홀짝인 석현이, 우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야, 서우진.”

“왜?”

“그러니까 내가 저번부터 말하잖아. 휴학이라도 좀 하라고.”

“너처럼?”

“그래. 나처럼.”

본격적으로 일이 바빠진 뒤.

석현은 일찌감치 휴학 일정을 잡아놓은 상태였다.

원래 다니던 학과가 적성에도 잘 맞지 않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던 선택.

‘언젠가는 졸업장 받겠지 뭐.’

하지만 우진은 석현과 상황이 달랐다.

시간적으로 버겁고 힘들지언정.

우진에겐 아직 학교가 꼭 필요했으니 말이다.

“배워야 할 게 많아서 아직 휴학은 안 돼.”

“어휴, 욕심은 많아서.”

“그래도 학과장님 배려로 내년부턴 훨씬 편해질 거야.”

“어련하시겠어.”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이 석현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사실, 너랑 같이 공부해보고 싶은 분야도 좀 있어.”

“나랑…… 같이? 뭘?”

뜬금없는 우진의 말에, 석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디자인 공부를 공대생인 자신과 함께하고 싶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석현도 과거에는 디자인 지망생이었지만, 이제는 딱히 디자인 공부에 욕심이 있진 않았다.

그는 지금 이곳 WJ 스튜디오에서, 자신이 맡은 모형 파트를 키워나가는 게 너무 재밌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진의 다음 말이 이어진 순간, 석현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진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으니까.

“프로그래밍 쪽을 좀 배워보고 싶어.”

“뭐…… 라고?”

석현은 눈이 휘둥그레져 되물었지만, 우진은 별 것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제대로 된 프로그래밍을 배우겠다는 건 아냐. 내가 어떻게 그것까지 공부하냐? 그게 그렇게 쉽게 겉핥기식으로 배울 수 있는 분야도 아니고.”

“그럼 뭔데?”

“정확히는 알고리즘을 배우고 싶은 거야.”

“알고리즘이라면…….”

“디자인 툴에 쓰이는 알고리즘. 그러니까 라이노에 들어가 있는, 그래스호퍼(Grasshopper) 같은 비주얼 스크립트(Visual Script)*[프로그래밍 된 스크립트 함수를 아이콘화시켜서, 아이콘끼리 연결하는 것으로 알고리즘을 좀 더 쉽게 짤 수 있도록 만들어진 프로그램.]를 좀 공부해보고 싶다는 거야.”

라이노는 우진이 지금 학교에서 조운찬 교수에게 배우는 프로그램인 3D맥스처럼, 3D모델링을 위해 사용하는 프로그램이다.

아직 우진은 다룰 줄 모르는 프로그램이었지만, 2학년부터 공부하게 되는 프로그램.

그리고 그래스호퍼는 라이노와 연결되어있는 플러그인 프로그램인데, 아직 K대 디자인과에서도 조운찬 교수 외에는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2010년도 기준으로는, 수업도 아직 개설되어있지 않은 신문물이었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진이 이 프로그램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당연히 미래를 알기 때문이었다.

‘디지털 건축이 유행하기 시작하면……. 비주얼 스크립트를 할 줄 아는 건 엄청난 무기가 되니까.’

우진은 전생에 해외 설계사무소에서, 이 라이노 그래스호퍼를 활용해 특별한 설계를 뽑아내는 것을 많이 봤었다.

손으로 그릴 수 없는 특별한 패턴이나 구조를, 알고리즘을 활용한 계산으로 만들어내는 디지털 설계.

이것은 우진이 학교를 쉽게 휴학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자, 꼭 배우고 싶은 분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석현은 코딩 실력이 꽤 좋으면서 디자인적인 감각도 있었으니.

석현과 함께 공부한다면 시너지가 날 것이라 생각한 것.

하지만 당연하게도 석현은, 그래스호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라이노야 제품디자인이나 모형제작 분야에도 많이 쓰이는 3D 프로그램이기에 알고 있지만, 그래스호퍼는 라이노에서 서비스하기 시작한 지 아직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프로그램이었으니까.

“그래스호퍼? 완전히 처음 들어보는데? 비주얼 스크립트라고?”

“뭐 지금 당장은 아직 좀 먼 얘기니까,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어.”

“젠장. 넌 대체 그런 걸 어디서 다 알아 오는 거야?”

“대표님은 원래 모르는 게 없지.”

“제이든한테 말투 옮았냐?”

“네가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후우…….”

우진과 석현은, 마주 본 채로 피식거리며 웃었다.

업무 중에 이렇게 잠깐 마주 앉아, 일 얘기를 나누는 것 또한, 일상에 활력이 될 수 있는 소소한 재미.

하지만 그런 휴식도 당연히 길게 이어질 수는 없었다.

석현은 마감이 임박한 모형작업 때문에 다시 움직여야 했고.

우진 또한 저녁 약속이 잡혀 있었으니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일어날까?”

“맞다. 너 오늘 그 박 부장님 만난다고 했지?”

“맞아. 저녁 한 끼 같이 하기로 했어.”

“공모결과……. 들고나오시려나?”

“글쎄. 그거야 가 봐야 알겠지.”

공모 마감일로부터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날짜였기에, 경완이 벌써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심 기대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흐……. 오랜만에 떨리네, 이거.’

그리고 청담 선영 재건축 사업 공모결과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석현도 마찬가지였다.

석현은 우진이 설계한 청담 선영아파트의 조감도와 투시도를 전부 봤었고.

만약 설계팀에서 이 사업권을 따낸다면, 그 조감도로 봤던 멋들어진 아파트 단지 건축모형을 석현이 제작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건 진짜 작업해보고 싶은데…….’

아무리 디테일을 잘 살리고 모형제작 실력이 좋아도, 기본적으로 설계된 디자인에 따라 최종 퀄리티는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이번 청담 선영 아파트 재건축의 모형작업은, WJ 스튜디오 모형 팀에게 최고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줄 수 있는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청담동 프리미엄사업장이라는 특수성이 있는 만큼, WJ 스튜디오의 모형을 더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

때문에 석현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은 당연한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오늘 가서, 싸바싸바좀 잘 해봐.”

“싸바싸바가 뭐냐, 촌스럽게.”

“사업 좀 꼭 따오란 얘기야.”

“나도 그러고 싶어 인마.”

우진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석구, 콩고물에 너무 관심이 많은 것 아냐?”

“콩고물이라니!”

“청담 선영 모형 정도면 1억은 그냥 부를 수 있을 텐데……. 이거로 매출 확 끌어 올려서 5억 만들려고 하는 건…….”

“어? 음……. 그게…….”

정곡을 찔린 석현은 딴청을 피우며 고개를 돌렸고, 우진은 그런 석현의 옆구리를 쿡 쿡 찌른 뒤 옷걸이에 걸려있던 코트를 꺼내 입었다.

이럴 때 보면 단순해서 귀여운 구석이 있는 석현이었다.

“그거 설령 따오더라도, 매출은 이번 달에 안 잡힌다. 알지?”

“뭐?! 왜!”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우리가 공모작으로 선정되더라도 산이 하나 더 있어 인마.”

“음……?”

“조합원 투표에서 천웅이 최종 결정돼야, 모형을 만들든 말든 하지 바보야.”

“아, 맞네.”

생각지 못했던 난관에, 석현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석현도 이제 업계에서 일한지 반년이 넘어가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모형 파트가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것이다.

우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러니까 일단 공모 당선되고, 수주전까지 다 끝나고 나면 최소 12월.”

“으윽.”

“수주전까지 승리해서 청담 선영 사업장 따내고……. 이 건이 모형 파트 매출에 1억으로 잡히든 2억으로 잡히든, 네 휴가와는 무관하다는 말씀이지. 내가 조건으로 내 걸은 건, 11월 매출이니까.”

“홀리 씻!”

슬픈 표정을 한 석현을 뒤로한 채, 우진은 가방까지 챙겨서 대표실을 나섰다.

“그래도 오늘 경완 아재 만나서, 혹시 사업장 또 받아올 거 없는지 한 번 물어볼게. 수도권에 몇 군데 있는 거로 아니까.”

우진의 마지막 말을 들은 석현은, 그가 나가는 방향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믿쑵니다, 대표님!”

“우리 석구, 유연하네. 폴더폰마냥 허리도 잘 접히고.”

“열심히 하겠쑵니다!”

“크크, 있다 봐. 미팅 끝나고 연락 줄게.”

석현의 씩씩한 배웅을 뒤로 한 채, 우진은 빠르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퇴근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기에 서울 시내에도 차는 그리 막히지 않았고.

천웅건설이 있는 종각역까지는, 삼십 분도 채 지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진이 차를 발렛 직원에게 맡기고 들어선 음식점은, 과거 박경완과 처음으로 사업 이야기를 시작했던 고급 일식집.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많이 왔네. 서우진.’

우진은 새로운 감회를 느끼며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고, 경완의 이름을 대자 직원이 친절히 그를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선, 먼저 온 박경완이 씨익 웃으며 우진을 맞아주었다.

“빨리빨리 못 다니나, 서 대표.”

“일찍 오셨네요?”

“일하기 싫어서. 좀 일찍 나왔지.”

우진이 자리에 앉자, 경완은 음식을 주문하였다.

두 사람이 이곳에 오면 항상 주문하는 메뉴가 있었기에, 주문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쪼르륵-

이어서 잠시 직원이 따라주는 찻물을 지켜보던 경완이, 특유의 능글맞은 표정으로 우진을 향해 입을 떼었다.

“서 대표.”

“예?”

“오늘, 왜 보자고 했을 것 같아?”

우진의 심장박동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