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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112화 (112/315)

112화

설계 공모

원래 천웅건설의 전무급 이상 임원들은, 어지간한 전체회의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회의를 결과보고 형식으로 브리핑받은 뒤.

결재 위주로 업무를 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회의 안건인 청담 선영아파트 재건축 사업은 워낙 중요도가 높았고.

때문에 정은철 상무는, ‘전무보’*[상무가 ‘전무’ 직급으로 승진하기 전, 중간 단계의 직급]로 진급이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이 회의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회의에 참석한 보고자의 브리핑만으로 각 설계에 대한 판단을 하기엔, 걸려있는 것이 너무 많은 사업권이었으니까.

‘흠. 얼핏 봤을 때도 전반적인 퀄리티가 상당했던 것 같긴 한데…….’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정은철의 표정은 꽤나 심각해 보였다.

뭔가 고민이 있는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의 표정이 심각한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지금 정은철 상무는, 조금 애매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후우. 마음이 이렇게 무거운 것도 오랜만이군.’

지금 그가 들어와 있는 회의의 안건인 <청담 선영아파트 재건축 사업>.

그의 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유지헌 부장을 위해서라면 이 사업이 어그러져야 맞다.

하지만 회사 차원에서 대승적으로 보면, 이 사업권을 따내는 것이 어마어마한 이득으로 돌아올 게 분명했다.

단순히 금전적인 이득을 말함이 아니다.

청담동이라는 상징적인 부촌에 클리오 브랜드를 건 프리미엄 리버뷰 아파트를 시공할 수 있다면.

브랜드 밸류가 수직상승 할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정은철은 당연히, 박경완 부장이 이 사업권을 따내길 바랬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내년이면 회사를 떠나게 될지도 모르는 유지헌 부장이, 계속 눈에 밟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조금만 비중 낮은 사업권이었으면, 한번 어떻게 해 보는 건데…….’

어떻게 자신의 라인을 챙기기 위해 회사의 이익에 반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겠냐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회사라는 집단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앞에서 끌어주는 것만큼이나 뒤에서 밀어주는 것도 중요했으니 말이다.

이번에 정은철이 전무보로 승진하게 되는 데에 유지헌 부장의 도움이 크기도 했으며.

승진 이후에도 1년 단위 계약직인 임원 자리를 지키며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오랜 기간 다져온 유지헌과의 관계가, 꽤 아쉬운 것은 사실이었다.

‘흐으음…….’

그래서 정은철 상무는, 회의가 시작될 때까지도 복잡한 심경이었다.

‘지헌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겠어. 어차피 박 부장도 김 전무님 라인이니, 나로서는 손해 볼 것도 없고.’

복잡한 사내정치를 잠시 떠올리던 정은철은, 곧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복잡하고 무거운 마음과 별개로 본격적인 설계에 대한 브리핑이 시작됐을 땐, 누구보다 더 집중하여 프레젠테이션의 내용을 경청해야 하니 말이다.

그가 상황에 휘둘려 업무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무른 성격이었다면, 지금 이 자리까지 결코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었다.

곧 박경완의 프레젠테이션은 시작되었고, 회의실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어떤 목적을 가진 프레젠테이션이라기보단 정보전달에 초점을 맞춘 브리핑에 가까운 발표였기 때문에, 회의장의 분위기 자체는 무척이나 담담하였다.

“자, 다들 사업장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계실 테니, 서론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박경완이 레이저 포인트를 누르자, 화면이 넘어가면서 첫 번째 건축사무소인 라는 이름이 떠오른다.

그것을 시작으로, 꽤 길게 이어질 설계 공모에 대한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 * *

좋은 주거란 살기 좋은 집을 의미한다.

그리고 재건축 사업장의 조합원이 원하는 ‘새 집’ 또한, 결국 살기 좋은 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청담 선영아파트 재건축 사업장의 사업권을 따기 위해서는, 그들 조합원이 원하는 살기 좋은 집을 설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본질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일 뿐.

좀 더 현실적이고 원색적인 관점에서 재건축 사업장 조합원들의 입장을 대변한다면, 바로 다음과 같은 두 줄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어떤 시공사에게 공사를 맡겨야, 가장 집값이 많이 오를 것인가?

둘째.

어떤 시공사가 가장 저렴하게 집을 지어줄 것인가?

하지만 이 두 가지 이유 중에서도 일반적인 사업장의 조합원들이 가장 많이 따지는 부분은, 바로 두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시공비의 절감은 곧 새 아파트를 얻기 위해 필요한 조합원의 분담금이 줄어든다는 의미였고.

보통 낙후되어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에 사는 입주민들은, 수천에서 억 단위가 넘어가는 추가 분담금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WJ 스튜디오의 설계안은, 너무 ‘이상’ 만 좇은 설계도였다.

한눈에 봐도 멋들어지는 외관 디자인에, 호화로운 커뮤니티가 필요 이상으로 들어간 설계안.

적어도 유지헌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고 할 수 있었다.

‘딱 봐도 업계 돌아가는 것 잘 모르는……. 신생업체에서 보내온 제안서로군.’

만약 공사비 등 현실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본다면.

가장 멋진 설계안을 가져온 회사는 다니엘 제이콥이 설립한 해외 사무소인 크라티카 스튜디오와, 이름조차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신생업체인 WJ 스튜디오였다.

그리고 그 둘 중에서도 설계의 창의성이나 혁신성만 놓고 보자면, 놀랍게도 WJ 스튜디오의 설계가 더 뛰어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유지헌은, 이 WJ 스튜디오의 설계도야말로 수주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피해야만 하는 설계도라고 생각했다.

대충 살펴봐도 이 도면대로 건물을 올리고 마감 공사를 하려면, 어마어마한 공사비용을 책정해야 했으니 말이다.

‘이 정도면, 평당 공사 가격이 최소 100만 원은 올라갈 거야.’

수주전에 승리하려면 공사비 절감은 물론, 조합원들의 금융비용을 일부 부담해 줄 각오까지 해야 할 정도로 출혈을 감수해야 했는데.

그런 정도의 출혈을 감수하기 위해서는, 결코 이런 무리한 도면을 제시해선 안 됐다.

‘스카이 브릿지에 인피니티풀 뷰라……. 미쳤군. 미쳤어. 이러면 관리비는 대체 어떻게 감당하라고?’

물론 청담동은 부촌이고, 때문에 선영아파트의 조합원들은 프리미엄 설계를 원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헌이 생각하기에 이건 가도 너무 갔다.

조합원들이 원할 프리미엄이란 최소한의 비용 내에서 시공 가능한 특별한 설계요소들이지, 이렇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공사비를 올리면서까지 공사해야 하는 특별한 설계는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천웅건설에서 부장 자리까지 올라오면서 수많은 사업장을 경험한 지헌은, 이렇게 확신하였다.

이 도면을 들고 수주전에 나간다면, 천웅건설은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공사비에 이 정도까지 때려 박으면……. 조합원들 영업은 제대로 해 볼 수도 없을 거고, 이주비 지원 같은 부분도 거의 나가기 힘들겠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헌은 WJ 스튜디오를 선택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큼은 천웅건설이 이번 수주전에서 실패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었고.

이 도면을 밀어서 수주전에 올릴 수 있다면, 수주전에 실패할 확률이 대폭 올라간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디자인, 설계가 괜찮으니 명분도 충분하고…….’

그래서 지헌은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자, WJ 스튜디오를 밀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바로 이사진의 입에서 WJ 스튜디오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나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WJ 스튜디오……. 여긴 신생인데도 설계 퀄리티가 대단하군.”

사실상 이 회의에 들어와 있는 임직원들 중 가장 직급이 높은 김진표 전무의 입이 떨어지자마자, 재빨리 그 말을 받아 옆에서 푸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전무님. 저도 오전에 검토하다가 깜짝 놀랐다니까요?”

“하하, 유지헌 부장도 그렇게 느꼈나?”

“공모 설계인데 투시도까지 이 정도로 뽑아 온 회사도, 여기뿐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유지헌의 말을 듣던 정은철상무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유 부장 이야기 대롭니다. 신생이라 큰 기대 없어서 그런지, 설계 내용이 더욱 놀랍더군요.”

지금 이 천웅건설의 회의장에는, 무려 오십 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해 있다.

과장급부터 시작해서 임원까지, 이번 프로젝트와 관련된 모든 인원이 참석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용하게 대화가 오갈 수 있는 건, 회의장에서의 발언권 때문이었다.

이렇게 전무까지 참석해 있는 회의장에선, 부장급 이상의 직급이 아니라면 입을 열 수 없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이렇게 임원들 사이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결국 전반적인 회의의 흐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것이 곧 회의의 결과와 직결되는 것이다.

정은철 상무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정 상무, 말해보시게.”

“이미 다들 인지하고 계시겠지만……. 공사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는 것이죠.”

정은철 상무의 말에, 모든 임직원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특화설계. 프리미엄 설계에 항상 따라올 수밖에 없는 고질적인 문제.

그것은 WJ 스튜디오의 설계에 필연적으로 언급될 수밖에 없는 문제였고, 그래서 정은철이 아닌 누구라도 반드시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갈 만한 것이었다.

해서 누군가 이 이야기를 꺼내길 기다렸던 유지헌이, 재빨리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건축비의 증액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 사업장은 청담동이 아닙니까?”

“그렇지.”

“아마 선영아파트의 조합원들은, 강남에서도 최고의 아파트를 갖길 원할 겁니다.”

임직원들의 시선이 유지헌을 향했고, 마른 침을 삼킨 그가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클리오 브랜드를 런칭하기 전이라면, 저도 좀 무리한 선택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프리미엄이라는 이미지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건축비를 올리고 특화설계를 제시한다면, 조합원들이 쉽게 납득하지 못할 테니 말입니다.”

유지헌의 말은 일리 있었고, 그래서 다들 집중해서 경청하였다.

“하지만 다들 어려울 것이라던 아현 뉴타운에서, 클리오가 결국 성공했습니다. 게다가 프리미엄이라는 이미지까지 완벽히 구축했지요.”

누가 보더라도 완벽히 회사를 위한 발언으로 보이는, 유지헌의 이야기들.

“때문에 오히려 이번 청담 선영 사업장에서 저희가 어중간한 프리미엄 설계를 내어놓는다면, 아마 조합원들은 실망할 테고……. 차라리 조금 무리하더라도 최대한 특별한 설계를 제시해서 조합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저희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닌가 합니다.”

유지헌의 이야기를 듣던 김진표 전무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자네는, 이 WJ 스튜디오의 설계가 마음에 든다는 건가?”

김 전무의 노골적인 질문에, 유지헌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그건……. 노 코멘트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게. 뭐, 어차피 이곳에서 바로 설계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니 말이야.”

오늘 회의가 끝나면, 회의에 참석했던 모든 임직원들이 투표를 한다.

그리고 그 투표를 바탕으로 임원 회의가 다시 열리게 되며, 거기서 최종 설계안이 결정되게 된다.

결국 최종 결정이야 대표이사인 천종걸이 하겠지만, 이 모든 회의의 내용과 이사진의 견해가 천종걸의 판단에 근거가 되어 줄 것이다.

발언권 있는 임직원들의 적극적인 토론과 함께, WJ 스튜디오의 설계에 대한 논의는 꽤 길게 이어졌다.

WJ 스튜디오에 대한 논의는 마지막 순서였지만, 가장 긴 시간이 할애된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얼추 정리된 뒤, 경완의 최종 브리핑과 함께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무려 다섯 시간이 넘게 진행된, 이례적일 정도로 길었던 회의.

그런데 이 회의가 끝날 즈음, 누구보다 열심히 회의에 참여했던 유지헌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 잘한 거 맞겠지……?’

사실 회의가 끝난 시점에도, 어떤 회사의 설계가 최종 낙점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WJ 스튜디오의 설계가 제법 이슈화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회사들의 설계에 비해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분위기까지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최소한 임원들이, 인지도 낮은 신생회사를 다른 회사들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있게 된 수준.

그래서 어느 정도는 계획대로 된 느낌이었지만, 그게 뭔가 조금 기분이 묘했다.

임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WJ 스튜디오 설계의 장점에 대해 어필하다 보니, 거꾸로 자신마저도 설득당한 느낌이랄까?

“젠장.”

“왜 그러십니까, 부장님?”

“아, 몰라. 퇴근들이나 해. 일곱 시가 넘었는데 안 가고 뭐 하고 있어?”

괜히 부하직원에게 툴툴댄 유지헌은,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오늘은 아무래도, 소주라도 한잔해야 할 것 같았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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