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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111화 (111/315)

111화

설계 공모

보통 어떤 종류의 ‘공모’가 개최될 때에는.

대대적으로 공모에 대한 마케팅을 태우는 등, 최대한 많은 공모 작품을 받아보기 위한 홍보가 선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번 천웅건설의 <청담 선영아파트 재건축 설계 공모>는, 외부에 전혀 홍보되지 않은 비공식 설계 공모였다.

애초에 천웅 내부적으로 실력 있고 역량 있는 설계 사무소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제안을 넣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공모가 이렇게 진행된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 설계는 <청담 선영아파트 재건축>을 수주하기 위한 설계였고.

이 수주전에 참여하는 건설사는 천웅 말고도 여러 곳이 더 있었으니.

공개적으로 설계를 공모하는 것이, 경쟁 구도에서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공개적인 설계 공모를 하면 당연히 당선작이 공개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경쟁사에 필연적으로 천웅건설의 설계가 노출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어쨌든 그런 이유로 비공개 진행된 천웅건설의 설계 공모는, 바로 어제가 마감이었다.

오늘은 11월 1일

천웅에서 공모 제의를 보낸 업체는 해외 업체를 포함하여 총 일곱 곳이었으며.

그 중 날짜에 맞춰 설계도를 보내온 업체는 다섯 곳이었다.

그리고 출근하자마자 메일함을 확인한 경완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메일을 보내온 업체 목록 안에, WJ 스튜디오의 이름이 가장 먼저 박혀있었으니 말이다.

‘흐흐. 그럼 기대 좀 해 볼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경완이 가장 기대하는 설계는 당연히 WJ 스튜디오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파심사를 할 생각은 없었다.

경완의 역할은 우진에게 기회를 주는 것까지였고, 마지막 선택은 결국 회사에 가장 이득이 되는 선택이어야 했으니 말이다.

‘물론 WJ 스튜디오의 설계가 가장 좋기를 바라겠지만…….’

게다가 경완이 이 설계 공모의 담당자인 것과 별개로, 그에게 결정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번 프로젝트를 맡은 모든 팀원들과 마찬가지로, 한 표의 선택권이 있을 뿐이었다.

딸깍-

다섯 통의 메일을 차례대로 열어 설계 제안서를 인쇄한 경완은, 오전 회의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오늘은 오전에 있을 사업부의 사전회의부터 시작해서, 오후에 잡혀있는 과장급 이상의 회의까지.

하루 종일, 이 설계 공모에 대한 회의만 계속될 예정이었다.

* * *

천웅건설 경영1실의 실장인 유지헌은, 최근 기분이 별로 좋지 못했다.

얼마 전 그의 상사인 정 상무로부터, 허탈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실장.]

[예, 상무님.]

[아무래도 이번 TO는, 자네가 가져가기 힘들 것 같네.]

[예……? 그게 무슨…….]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잖나.]

[내정자가……. 벌써 생긴 겁니까?]

[그건 아니야.]

[그럼……?]

[얼마 전에 3분기 결산 나온 건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자네 경쟁자의 실적이, 너무 압도적이더군.]

[음…….]

[어지간히 차이가 나야 내가 밀어볼 텐데, 나로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수준이라네.]

경영1실장인 유지헌의 직급은 부장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인사명령에서 승진한다면, 상무급이 되어 임원을 달게 되는 것.

올해를 마지막으로 그의 직속 상사인 정 상무는 ‘전무’로의 승진이 확정된 상태였고.

그래서 지헌이 노리던 자리는, 바로 정 상무가 올라가고 남은 빈자리였다.

그리고 사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지헌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 비게 될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하아…….’

심지어 그것이 근거 없는 확신도 아니었다.

현재 천웅건설의 부장급 중 가장 연차도 높고 힘 있는 직책을 가진 것이 바로 그였던 데다.

그가 과장이던 시절부터 잡고 있던 라인의 상사가 바로 정 상무였으니.

정 상무가 후임자로 자신을 추천하기만 한다면, 상황상 어지간하면 진급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어지간한 변수가 아니라면, 지헌의 진급이 거의 확정적이었던 상황.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유지헌의 속이 멀쩡하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라 할 수 있었다.

‘제길! 이번이 정말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연차가 거의 다 차가는 유지헌은, 내년까지 진급에 실패하면 높은 확률로 정년퇴직을 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올해 이 좋은 기회를 놓친 순간, 정년퇴직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더 속이 쓰린 이유는, 정 상무의 입에서 나온 그 ‘경쟁자’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짐작되기 때문이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정말 눈부실 정도로 막대한 실적을 내고 있는 한 사람.

‘아무리 실적 차이가 나도 그렇지. 날 밀어내고 박 부장을 상무로 올리겠다고?’

그는 분명, 까마득한 후배 기수인 박경완일 것이었다.

‘후우……. 경완이가 실력이 좋은 건 인정하지만…….’

유지헌이 가장 못마땅한 것은, 경완의 나이가 아직 어리고 연차도 짧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후배가 자신을 제치고 임원이 되는 것이 못마땅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유지헌도 수많은 선배들을 제치고 이 자리까지 올라왔으니까.

다만 유지헌이 이사진에게 서운한 부분은, ‘기회’ 차원에서의 문제였다.

아직 정년까지 최소 10년은 남은 박경완에겐 올해가 아니라도 임원이 될 기회가 많이 남아있었지만.

이제 정년이 코앞으로 다가온 유지헌은, 올해가 거의 마지막 기회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회사의 입장에서는, 그런 지헌의 사정을 봐 줄 이유가 어디에도 없는 게 사실이었다.

‘하, 지랄 맞네, 정말.’

그래서 오늘 오후.

회의실로 향하는 유지헌의 기분은, 완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다.

애초에 일하고 싶다는 의욕도 전부 다 사라진 데다.

지금 참석해야 하는 회의의 진행자가, 심지어 그의 임원승진 기회를 앗아간 박경완으로 명시되어 있었으니까.

덜컹-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간 지헌은, 구석의 한쪽 자리에 터덜터덜 걸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단 일정이 잡혀있어 오기는 했지만, 오늘 회의가 무슨 회의인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과장급부터 시작해서 임원진까지 들어오는, 꽤 중요한 회의라는 사실 정도였다.

‘후, 대충 시간이나 때우다가 나가야지.’

지헌이 회의실에 도착한 시간은 회의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이었다.

때문에 그가 자리에 앉은 뒤 1분도 채 지나기 전.

꽤 널찍한 회의실의 모든 자리는 전부 참석자들로 가득 들어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임원진까지 회의실에 들어오자, 진행을 돕기 위해 들어온 대리 하나가 참석자들에게 회의 자료를 쭉 돌리기 시작하였다.

“부장님, 여기 있습니다.”

“고맙네.”

그런데 그 회의 자료를 받아 무심코 확인한 그 순간.

<청담 선영아파트, 재건축 설계 공모 개요>

초점 없이 축 처져 있던 지헌의 두 눈이, 별안간 크게 확대되었다.

‘어……?’

오늘 회의 안건이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깨달음과 동시에, 정 상무로부터 들었던 한 가지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으니 말이다.

[이제 자네에게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야.]

[그게…… 뭡니까?]

[이번 청담 선영 수주전에서, 박 부장이 완전히 참패를 당하는 것.]

[……!]

[아마 대표님께선 이 수주전을 박경완이 출사표로 생각하셨을 테고, 여기서 녀석이 만약 처참한 성적을 거둔다면……. 아무리 지난 실적이 좋아도, 이번 인사이동에 그를 승진시키진 않으실 테니 말이지. 그게 대표님 방식이니까.]

사실 이 이야기를 정 상무에게 들었을 당시, 유지헌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너무 큰 충격에 이미 정신이 혼미했으며, 완전히 멍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막상 전체회의에서 회의 자료를 받아드니, 지헌은 다시 정신이 들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박경완이가 제운이나 SH에 탈탈 털리면, 다시 내게도 기회가 생긴다는 말이지?’

죽어있던 유지헌의 두 눈동자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아직 이 수주전을 어떻게 해야겠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 회의에 집중해서 참여할 이유 정도는, 확실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자세를 고쳐 잡은 유지헌은, 단상 위로 천천히 올라서는 경완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응시하였다.

‘그래.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지.’

지헌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고 있었다.

오전 일찍 사내메일로 들어왔던 설계 공모작들을, 미리 꼼꼼히 살펴보지 못했던 것이 아쉬운 지헌이었다.

* * *

경완이 참석했던 오전 회의는, 이번에 <청담 선영아파트 재건축 수주전>을 위해 임시로 결성된 TF팀의 회의였다.

이 TF팀은 전부 다 경완의 손에 의해 꾸려진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러니까 이 회의는, 오후에 있을 전체 회의때 브리핑할 자료들을 정리하기 위한 ‘사전회의’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 오후 회의에 참여할 임직원들도 공모된 설계들을 개략적으로 확인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이 사업의 주체가 될 경완과 그의 팀원들이 가장 빠삭하게 모든 설계들을 파악하고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특히 오후 회의에는 임원진이 절반 이상 참여할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모 설계들에 대한 경완의 브리핑이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다.

“자, 다들 지금부터 뭘 해야 하는지는, 따로 설명 안 해도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물론이죠.”

“우리는 오늘 오전 내로, 이 설계 제안서 다섯 개를 전부 분석해서 장단점을 정리해야 해.”

“옙!”

“각자의 주관이 어쩔 수 없이 섞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객관적인 정보 위주 분석이 되어야 한다. 오케이?”

제안서는 총 다섯 종으로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꼼꼼히 살피기 위해선, 한나절 정도의 시간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해서 경완을 비롯한 팀원들은, 최대한 집중해서 그것들을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최고 기대주는 APC건축사무소겠죠?”

“APC도 당연히 괜찮겠지만, 전 솔직히 크라티카 스튜디오가 제일 기대됩니다.”

“아, 거기가 다니엘 제이콥이 작년에 차린 설계사무소지?”

“맞습니다, 부장님. 다니엘 제이콥이 작년에, 프리츠커 수상 후보에도 오르지 않았습니까.”

“뭐, 그런 건 사실 기억 안 나는데……. 다니엘이 최상급 건축디자이너라는 정도는 확실히 알고 있지.”

설계 분석이 시작되자 공모에 참여한 설계사무소들의 이름이 하나씩 나오고 있었지만, 그중에 WJ 스튜디오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TF팀 안에 WJ 스튜디오에 대해 아는 인원은 경완과 재준 밖에 없었고.

WJ 스튜디오는 아직, 이름도 생소한 신생업체였으니 말이다.

물론 클리오 브랜드 런칭에 WJ 스튜디오가 기여하긴 했지만, 그 실사에 가까운 모형을 만들었던 업체가 이번엔 설계 공모까지 참여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을 제외한 다른 팀원들에게.

‘WJ 스튜디오’라는 영세 업체의 설계 제안서는, 자연스레 가장 마지막 순서로 검토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흐흐. 역시 다들, 해외 업체부터 먼저 검토하는군.’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경완이 가장 먼저 펼쳐 든 것은, WJ 스튜디오의 제안서였다.

우진의 WJ 스튜디오가 해외 유명업체들보다 확실히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냥 우진의 설계가 가장 궁금했고, 가장 기대됐을 뿐이었다.

우진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그를 놀라게 해왔으니까.

‘오호. 일단 개요는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고…….’

첫 페이지를 확인한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

두 번째 페이지를 확인한 경완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그 페이지에 인쇄되어있는 풀컬러의 외관 조감도가, 한눈에 봐도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놀라운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도저히 평범한 아파트라고 생각할 수 없는, 파격적이고 신선한 디자인까지.

‘그래. 이래야 서우진 답지.’

물론 외관 조감도를 그럴듯하게 뽑았다고 해도,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일 수도 있다.

구체적인 설계 차원에서 그 멋진 조감도가 깔끔하게 풀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예쁜 그림에서 그치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떠나서 WJ 스튜디오의 조감도는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고.

그것은 분명 강력한 가산점을 줄 만한 요인이었다.

그래서 경완은 더욱 기대감 넘치는 표정으로, WJ 스튜디오의 제안서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경완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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