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10화 (110/315)

110화

설계 공모

시간은 본래, 바쁘면 바쁠수록 빠르게 흘러가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진의 시간은 총알 같았고.

공모 마감 날인 10월 31일은, 어느새 우진의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10월의 마지막 날은 일요일이었지만, 우진은 오늘도 <우리 집에 왜 왔니>를 시청할 수 없었다.

본 방이 시작되는 9시가 되어갈 즈음에도, WJ 스튜디오의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으니 말이다.

“김 실장님, 입면도 빠진 것 없나 다 체크 했죠?”

“네, 대표님. 방금 수량 확인 끝났습니다.”

“그냥 일련번호 확인만 하신 것 아니고, 도면 한 장씩 꼼꼼하게 다 체크 하신 것 맞죠?”

“물론입니다. 틀렸다가는 대표님께 무슨 소릴 들으려고요.”

“오케이. 그럼 이쪽은 됐고…….”

직원 숫자에 비해 광활한 WJ 스튜디오였지만, 오늘만큼은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꽉 차 보일 정도로 붐비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의 모든 직원뿐 아니라 몇몇 외주업체의 직원들도 사무실에 나와 있었으니 말이다.

상주 인원도 평소보다 많았던 데다 다들 정신없이 사무실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으니.

붐비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진태에게 맡겨뒀던 업무를 한 차례 점검한 우진이, 이번에는 회의실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회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곳에, 중요한 손님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 유 팀장님. 많이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대표님. 저희야 뭐 방금 도착했는데요.”

우진이 맞이한 중요한 손님이란, <퓨처스 디자인>이라는 상호를 가진 디자인 업체의 팀장이었다.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에서 이 <퓨처스 디자인>의 역할은, 바로 우진이 디자인한 아파트의 조감도와 투시도를 3D컷으로 뽑아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퓨처스 디자인은, WJ 스튜디오와 외주계약을 체결한 곳인 것.

그리고 이 업체는, 우진이 조금 특별한 사람으로부터 소개받은 곳이었다.

그 인물은 바로 우진에게 3D 디자인을 가르쳐주는 교수인, 조운찬 교수였다.

[흐음……. 실력 좋은 업체가 필요하다고?]

[예, 교수님.]

[그걸 왜 내게서 찾지?]

[이 분야에 한해선……. 교수님께서 제가 아는 한 가장 뛰어난 전문가 시니까요.]

[하하. 입바른 소리 하기는.]

[진짭니다!]

[흠, 설마 내가 내준 과제를 업체에 맡기려는 건 아닐 테고…….]

[제가 아무리 바빠도, 그런 반칙은 안 씁니다, 교수님.]

[알아, 알아. 그냥 해 본 말이야. 과제를 업체에 맡길 생각이었으면, 최소 내게 업체를 추천받으러 오진 않았겠지.]

[그러니까요.]

[왜 필요한데?]

[저희 회사에서 이번에 일 하나 따야 할 게 있거든요.]

[페이는 어느 정도 생각하고?]

[실력만 좋으면, 페이는 최대한 맞춰드릴 겁니다.]

[서 대표, 통 큰데?]

[그만큼 중요한 일이어서 그러죠. 통 크긴요. 저 짠돌이예요.]

[하하. 여튼 실력 좋은 3D업체라. 괜찮은 곳이 한 곳 있기는 한데…….]

조운찬 교수는 우진이 아는 사람 중 가장 3D실력이 뛰어난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워낙 바쁜 데다, 교수에게 학생이 3D 외주를 맡기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못했으니.

그가 아는 가장 실력 좋은 업체를 연결해 달라 부탁한 것이다.

조운찬의 입에서 실력 좋다는 말이 나올 만한 업체라면, 업계 최상급의 실력을 가진 곳이라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리고 유 팀장은 조운찬 교수가 추천해 준 그 퓨처스 디자인 안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하나였다.

“한 시간 전쯤 투시도 나온 거 받아서 확인했습니다.”

“하하, 어떻습니까? 마음에는 좀 드시던가요?”

물론 운찬에게 일 년 가까이 3D를 배우고 있는 우진 또한, 이제 꽤 괜찮은 실력을 갖췄다.

모델링이야 처음부터 수준급의 실력이었지만, 이제 랜더링 실력도 꽤나 올라온 것이다.

당장 다른 디자인회사에 입사해 3D 실무에 투입되어도, 충분히 괜찮은 퍼포먼스를 뽑아낼 수 있는 수준.

하지만 이번 <청담 선영아파트 재건축>프로젝트의 중요도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우진은 업체를 써야만 했다.

외주 비용 몇 푼 아끼자고 직접 작업하기에는, 리스크도 있는 데다 본인의 시간까지 적잖이 투자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잖아도 감탄했습니다, 팀장님. 교수님께서 강력하게 추천하신 이유가 있더라고요.”

“흐흐. 신경 좀 써달라고 하시기에……. 오랜만에 힘 좀 빡 줘봤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승산이 좀 더 올라가는 것 같네요.”

“감사는요. 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그래도요.”

“그리고 서 대표님이 요즘 이쪽 업계에서 확 뜨고 있는 유망주 아니십니까. 미리미리 커넥션을 만들어 놔야지요.”

“에이, 유망주는요.”

우진은 손사래를 치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유 팀장의 말은 진심이었다.

전례 없을 정도로 눈부신 속도로 성장 중인 WJ 스튜디오는, 업계에 알음알음 알려지는 중이었고.

특히 TV에도 출연 중인 우진은, 최근 업계에서 떠오르는 이슈가 아닐 수 없었으니까.

“자, 그럼 사적인 이야기는 이쯤 하고, 최종 점검을 시작해 보실까요?”

“그러시죠. 저희도 이제 마감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으니까요.”

벽걸이 시계를 슬쩍 확인한 우진은, 양손을 살짝 비비며 회의실 자리에 앉았다.

자정까지는 모든 작업을 완료해서 천웅건설의 메일로 쏴야 했으니, 이제 남은 시간은 세 시간 정도뿐이었다.

“저기, 우석 님!”

“예, 대표님!”

“그쪽에 USB 하나 얹혀 있죠?”

“옙!”

“이쪽으로 가져와서 세팅 좀 해 줘요.”

“알겠습니다!”

우진이 부르자 쏜살같이 달려온 신입 조우석이, USB를 컴퓨터에 꼽고 빔프로젝터를 세팅하였다.

그러자 <퓨처스 디자인>에서 보내온 조감도와 투시도들이, 차례대로 화면에 비치기 시작하였다.

한눈에 보아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라운 퀄리티로 제작된 투시도 작업들.

사진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완벽하게 구현된 이미지들을 보며, 우진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한 번씩 확인했던 이미지들이지만, 정말 돈이 아깝지 않은 작업물들이었다.

“남은 시간 내로 수정요청 가능한 모델링 작업은 없는 거, 아시죠?”

“그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세 시간 남았는데……. 랜더 한 컷 돌릴 시간도 안 되겠네요.”

“아, 서 대표님께서도 3D만질 줄 아신다고 하셨죠? 제가 잊고 있었네요.”

지금 우진이 퓨처스 디자인 관계자와 미팅을 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최종 점검을 위해서였다.

퓨처스 디자인에서 뽑아 온 많은 투시도와 조감도 중, 우진의 디자인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줄 수 있는 구도로 작업 된 이미지를 선별하기 위한 최종작업인 것이다.

물론 단순히 선별작업만을 위해 팀장급이나 되는 디자이너가 직접 WJ 스튜디오에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선별된 이미지들은 이제 천웅건설에 보낼 판넬과 피피티에 삽입되어야 했는데.

WJ 스튜디오가 제작한 판넬 디자인에 맞춰, 유 팀장이 직접 ‘리터칭’까지 해주기로 한 것이었으니까.

리터칭이란 3D 프로그램으로 작업 된 랜더링 컷 위에 포토샵으로 각종 효과를 입혀, 이미지를 더 멋지게 만드는 마감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3D컷에 대한 리터칭이면 몰라도 판넬 디자인까지 고려한 최종 리터칭은 3D업체의 일이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3D작업이라기보단 2D작업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퓨처스 디자인의 노하우가 WJ 스튜디오보다는 훨씬 더 뛰어나다 보니 우진이 특별히 부탁하였고.

조운찬 교수와 특별한 친분이 있던 유 팀장이, 기꺼이 회사까지 왕림하여 도와준 것일 뿐이었다.

물론 리터칭에 대한 외주 비용은 따로 지급하지만, 그래도 현장까지 직접 나와서 작업을 도와준다는 것은 우진의 입장에서 고맙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일단 서 대표님도 메인 컷은, B타입이랑 E타입으로 셀렉하셨죠?”

“네. 그 부분이야 저도 이견 없는데, 커뮤니티 센터 쪽 투시도를 어떤 부분부터 보여줄지 고민이네요.”

“커뮤니티 센터요?”

“네.”

우진의 대답에, 유 팀장이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거야말로 고민도 할 것 없죠!”

“그래요?”

“저 같으면 무조건 여기. 인피니티 풀뷰(Infinity pool view)*[수영장(pool)이 강 또는 바다와 이어져, 무한히 펼쳐지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드는 풍경(view).]로 들어갑니다.”

“역시, 실용성보다는 보기 좋은 걸 선택해야 하는 걸까요?”

“당연하죠. 3D컷은 무조건 클라이언트를 현혹시키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기능성? 실용성? 그런 건 설계랑 평면에서 보여주자고요.”

“흐음…….”

유 팀장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솔직히 대표님이 보내주신 설계로 작업하다가, 이쪽 수영장 컷 찍으면서 저희 쪽 직원들도 감탄했거든요.”

“그래요?”

“30층에 이어진 스카이브릿지 위에서 펼쳐지는 인피니티풀 뷰! 크으으……! 3D컷으로 봐도 이 정도 느낌인데, 실제로 시공되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유 팀장은 단순히 리터칭만 도와주는 것이 아니었다.

우진에게 3D컷을 활용한 제안서 작업의 노하우들을 아낌없이 이야기해줬던 것이다.

“이 부분부터 이 부분까지 컷은, 유선으로도 말씀드렸지만 일부러 제외했습니다.”

“네. 제외됐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는데……. 혹시 그 이유도 알 수 있을까요?”

“이렇게 협소하고 시야가 한정적인 공간은, 3D컷으로 뽑혔을 때 느낌이 잘 안 살거든요.”

“아하.”

“이쪽은 오히려 투시 안 들어간 입면컷으로 그려서, 2D디자이너들에게 예쁘게 꾸미라고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작업을 지금 하기에는 시간이…….”

“아, 물론 지금 하시라는 이야긴 아니죠. 그렇게 금방 되는 작업은 아니니까요.”

“그럼……?”

“어차피 공모에서 채택되시면, 시공사 합동 설명회 날까지 싹 다 재정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죠.”

“그때 천웅이랑 작업하실 때, 팁을 드리는 겁니다.”

유 팀장의 말을 듣던 우진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가 하는 이야기는, 결국 이 공모에서 채택돼야 가능한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저희……. 공모 선정되나요?”

웃으며 이야기하는 우진을 향해, 유 팀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유 팀장님이 꽂아주십니까?”

“하하, 제가 그런 게 가능했으면, 디자인회사에서 영업이나 뛰고 있진 않겠죠.”

잠시 뜸을 들이던 유 팀장이, 눈을 빛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다만 저희가 설계를 거의 다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솔직히 놀랐습니다.”

“왜요?”

“아파트 설계도면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요.”

유 팀장의 감탄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고, 우진은 그게 어떤 의미에서의 감탄인지 대충 느낄 수 있었다.

우진의 설계들에는, 현시점에 도입되지 않은 새로운 방식의 설계들이 여기저기 녹아있었으니 말이다.

종전에 언급됐던 인피니티 풀뷰만 해도 그렇다.

해외 고급 호텔들에나 있을 법한 호화로운 시설을 아파트에 특화설계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2010년도에는 상상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전문가든, 비전문가든, 결국 좋다고 느끼는 부분은 비슷합니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투시도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며, 유 팀장이 기분 좋게 웃었다.

“제 3자인 제 눈에도 정말 좋았으니, 아마 천웅 관계자들 눈에도 확 들어올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유 팀장이 눈을 찡긋하며 한 마디 덧붙였다.

“잘 되면 제 지분도 조금은 있는 거, 기억해 주셔야 됩니다?”

우진은 다시 한번 기분 좋게 웃었다.

“물론이죠. 제가 바쁜 거 좀 지나가면, 조운찬 교수님까지 모시고 거하게 한 번 대접하겠습니다.”

“크핫! 기대 하겠습니다!”

투시도와 조감도 선택이 전부 다 끝나자, 우진은 다시 다른 파트로 이동하였다.

워낙 프로젝트의 규모가 크다 보니,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체크 해야 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여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시간이 더 지났을까?

대략 11시 30분 정도가 되었을 무렵.

모든 작업물을 꼼꼼히 패킹한 우진은, 직접 그것을 천웅건설의 메일로 쏘아 보냈다.

딸깍-!

[메일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어서 전송 완료 메시지를 확인한 그는, 후련한 표정이 되었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어.’

결과야 나와 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우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직원들을 향해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드디어 지난 한 달간의 대장정이 끝난 것이다.

“자, 그럼……. 오늘 근무는 여기까지!”

그리고 우진의 말이 떨어진 순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사무실 여기저기에서 박수 소리가 가볍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짝- 짝짝짝-

“휴우! 고생하셨습니다!”

주말까지 풀타임으로 근무했지만, WJ 스튜디오 직원들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뿌듯한 표정이랄까.

일이야 분명 힘들었지만, 그만큼 보람 있는 프로젝트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진은 회사가 성장하는 만큼 충분한 인센티브를 아낌없이 지급하는 오너였기 때문에, 다들 제 일처럼 열심일 수밖에 없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주말까지 정말 애들 쓰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달 동안 빈번했던 철야 작업을 이대로 퉁 칠 수는 없는 법.

우진은 짐을 챙기려던 직원들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하나 더.”

“……?”

그 목소리에, 직원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그를 향해 모인다.

좌중을 한 차례 둘러본 우진이, 씨익 웃으며 다시 말했다.

“WJ 스튜디오 시공, 설계파트는, 다음 주 한 주, 문 닫겠습니다. 당직만 기존대로 유지해 주시고, 다들 푹 쉬고 돌아오세요.”

우진의 말이 떨어진 순간, 사무실이 터져 나갈 정도로 쩌렁쩌렁한 환호성이 울려 퍼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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