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10월의 피날레(Finale)
오랜만에 모국 스페인에 돌아갔던 브루노 산체스(Bruno Sanzchez)는, 보름 정도의 휴가 끝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가 설계한 ‘글래셜 타워’의 시공조율이 전부 끝나서 휴가를 갔었지만, 슬슬 마감 공사가 시작되면 다시 감리를 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보름 만에 돌아온 것은, 사실 원래의 일정보다 훨씬 더 빠른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보름이 아니라 한 달 정도를 쉬고 돌아와도 일정에 충분한 여유가 있었으니까.
그가 일찍 돌아온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갑작스럽게 잡힌 미팅.
이번에 그에게 들어온 디자인 의뢰는, 역세권의 복합 쇼핑몰이었다.
‘복합 쇼핑몰이라……. 쇼핑몰 설계는 또 처음인데 말이지.’
사실 아직 그가 설계를 맡게 되는 것이, 확정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이번 건은 워낙 덩치가 큰 사업이다 보니 설계의뢰가 한 곳에 들어간 게 아니었으니까.
브루노는 단지, 의뢰를 받은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었다.
물론 설계가 채택되든 되지 않든, 컨셉 디자인과 제안서에 대한 어느 정도의 피(Fee)는 받게 된다.
하지만 그 소정의 수수료나 받자고, 브루노가 보름이나 일찍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의뢰는 설계에 대한 어떤 대가를 떠나, 개인적으로 욕심나는 프로젝트였다.
‘설레는군. 한국에서 이런 기회를 얻게 될 줄이야.’
브루노는 어떻게든 이번 설계권을 따고 싶었다.
복합 몰의 위치부터가 서울의 중심지인 왕십리였으며.
잘만 설계하면 서울의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만큼 규모도 컸으니까.
게다가 결정적으로.
브루노는 언젠가 이런 대형 몰(Mall)을 설계해보고 싶다고, 꽤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더 다양한 건축물로 채우고 싶은, 건축디자이너로서 욕심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팅까지는 3일 정도 남았으니까, 준비할 시간은 충분해.’
드르륵-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비행기에서 나오는 브루노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작년에 오픈했다는 이 ‘인천국제공항’은 그가 경험한 세계의 그 어떤 공항보다도 편리하고 아름다운 것 같았다.
‘입국 심사도 간편하고…….’
입국심사장까지 통과해 나온 브루노는,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마시며 로비 의자에 앉았다.
공항에 그를 데리러 나오기로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잠시 앉아 시간을 때워야 했다.
시계를 확인한 브루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도착이 지연된 적은 있어도, 예정시간보다 20분이나 빨리 도착하다니……. 이런 건 또 처음이네.”
딱히 할 일도 없었던 브루노의 두 눈이, 자연히 로비 정면에 설치되어있는 커다란 스크린을 향했다.
그곳에서는, 한국 예능인 듯 보이는 TV 프로그램이 재방송 중이었다.
“흠…….”
브루노는 한국말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업체와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자연스레 한국어를 조금씩은 배우게 된 것이다.
간단한 대화 정도는 어눌하게나마 할 수 있었으며, 듣는 것만 놓고 보자면 일상적인 수준의 이야기들 정도는 거의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
그래서 가끔 공부 겸 한국 TV프로들을 보곤 했던 브루노는, 자연스레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시 후.
“으음……?”
뭔가 의외의 것을 발견했는지, 브루노의 주름진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잠깐. 저 친구, 어째서 낯이 익는 거지?’
브루노의 시선이 닿은 곳은, 화면 안에서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한국의 연예인들을 잘 알지 못하는 그로서는, 화면 안의 남자가 낯익은 것이 의아할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브루노의 고민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화면이 그의 얼굴을 좀 더 크게 확대한 순간, 낯익음의 정체에 대해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하. 그때 그 디자이너!”
브루노가 스페인으로 휴가를 다녀오기 전.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공모전 SPDC에서, 그를 무척이나 놀라게 해 주었던 한 젊은 디자이너.
휴가 동안 잊고 있었던 그 얼굴이, 어렵지 않게 떠오른 것이다.
브루노는 그의 이름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하. 그래, 맞아. 우진이라는 친구였었지.”
그의 얼굴을 TV에서. 그것도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브루노는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잊고 있던 한 가지 약속이 떠올랐다.
‘이번 미팅이 끝난 뒤에는, 우진과 그의 친구들을 사무실로 초대해야겠어.’
오랜만에 한국의 어린 디자이너들과 만날 생각에, 조금 더 기분이 좋아진 브루노였다.
* * *
제이든은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꼭 자신의 집에서 홈 파티를 연다.
사실 홈 파티라고 해 봐야,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불러 치킨 피자를 시켜다 놓고 게임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것은 제이든에게 꽤 중요한 월례행사였다.
“와썹 Bros!”
“제이든. 콩글리쉬 할 거면 그냥 영어나 한국어 둘 중 하나만 쓰랬지.”
“시룬데! I’m British Korean! 이게 내 정체성이라고.”
“정체성? 그게 뭔데?”
“Identity.”
“젠장. 어려운 한국말을 제법 잘 하는군. 피자는 시켜뒀지?”
“물론!”
“페페로니 토핑 추가에 윙봉도?”
“Okay.”
“좋아. 완벽해.”
친구들이 하나씩 집에 도착할 때마다, 제이든의 기분이 한 계단씩 상승했다.
사실 제이든은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이었다.
부모님이 영국으로 넘어가신 뒤로 칠십 평도 넘는 넓은 집에서 혼자 살다 보니, 어쩌면 제이든의 외로움은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최근에는 베스트 프랜드가 된 석현이 제집 드나들 듯 제이든의 집에 놀러 오곤 했지만, 그것으로 제이든이 만족할 리 없었다.
“자, 미리 말했지만, 오늘은 로즐리가 나랑 한 팀이야.”
“좋아. 그럼 나는 루시우랑 팀이군.”
“Good.”
항상 제이든의 홈 파티에 빠지지 않고 오는 3인방은, 제이든과 마찬가지로 영국 국적을 가진 친구들이었다.
제이든처럼 혼혈인 친구도 있었으며, 완전히 영국인이지만 한국에 정착해서 사는 친구도 있었다.
제이든이 졸업한 고등학교는 국제학교였고, 그래서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함께 수업을 들었지만.
그래도 가장 친해지게 된 친구들은, 같은 학년 중 영국인이었던 이 세 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지는 팀은, 저녁을 먹은 후에 디저트를 사러 다녀와야 해.”
“좋아.”
“오늘 디저트 메뉴는 뭐지?”
“치즈 케잌 어때.”
“코스트코 치즈 케잌을 말하는 거겠지?”
“Of Course.”
“가장 큰 사이즈로. 계산은 진 팀이.”
“콜!”
토핑이 잔뜩 올라간 거대한 페밀리 사이즈의 피자 두 판에, 후라이드 치킨도 두 마리나 시켜져 있었지만.
혈기왕성한 영국 청년들의 위장은, 이것으로 전부 채워질 수 없는 듯 보였다.
“자, 킥 오프!”
“Go go!”
각자 피자를 한 조각씩 입에 문 네 사람은, 푹신한 빈백에 반쯤 드러누운 자세로 조이스틱을 격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사람이 모일 때마다 하는 게임은 다름 아닌 축구게임.
탁- 타다다다닥-!
피자를 우물거리며 축구게임을 하다 보면, 두세 시간쯤 후딱 사라지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Yes!”
“Goal! Gooooooooooooooal!”
“Shit! 제이든에게 골을 먹히다니, 이건 가문의 수치야.”
“분발하자 루시우. 제이든한테 질 수는 없지.”
“물론이야.”
그리고 이렇게 피자가 동날 때까지 축구를 하고 나면, 그다음에 네 사람이 향하는 곳은 제이든의 컴퓨터 룸이었다.
고사양 컴퓨터가 무려 다섯 대나 설치되어있는, 제이든 표 PC방이라고나 할까.
제이든이 컴퓨터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다섯 대를 놓은 이유는, 그가 즐겨하는 게임이 한 팀에 다섯 명으로 구성되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열 대를 놓고 5:5 게임을 하고 싶었지만, 제이든과 게임을 해 줄 친구가 10명이나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제이든.”
“응?”
“석현갓에게 연락은 미리 해뒀겠지?”
컴퓨터방으로 이동하는 길.
친구 루시우의 은근한 물음에, 제이든이 과장된 표정으로 날뛰었다.
“대체 왜! 우리 집에 와서 석현을 찾는 거야?”
제이든의 옆에 있던 로즐리도 한마디 거들었다.
“제이든이라는 구멍을 메워 줄 초고수가 한 명 필요할 뿐이야.”
루시우가 동의했다.
“맞아. 석현이라면 제이든이 싼 똥을 치워줄 수 있지.”
“오, 친구들. 난 게임하면서 똥을 싸지 않아. 어린애가 아니라고.”
“네 변명은 필요 없어, 제이든. 우리 팀엔 석현이 필요할 뿐이야.”
“어서 우리의 ‘Korean secret weapon’을 불러오라고.”
“제길!”
제이든은 투덜거리며 컴퓨터에 앉아 게임을 켰다.
석현은 이미, 게임에 접속 중이었다.
[조선제일검객 : 석현. 우리의 게임에 특별히 널 초대해줄게.]
[석구석구돌리고석구 : 특별히 날 초빙한 게 아니고?]
[조선제일검객 : 그건 오해야, 석현. 석현이 없어도 상관없지만, 아주 특별히 불러주는 거라고.]
[석구석구돌리고석구 : 그럼 나 혼자 큐 돌림.]
석현이 제이든과의 대화방에서 나가자, 영국인 친구들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제이든.”
“당장 석현 님께 사과하라고!”
“제길!”
그래서 결국 제이든은, 비굴하게 다시 대화창을 열 수밖에 없었다.
[조선제일검객 : 사실 거짓말이었어, 석현. 우리 팀에는 석현이 꼭 필요해.]
[석구석구돌리고석구 : 특별히 한 번만 용서해 주도록 하지.]
[조선제일검객 : 역시 석현은 대범해.]
하여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팀 게임.
석현까지 온라인으로 합류하자, 정확히 5인 파티가 결성되었다.
“좋아. 석현이 왔으니까 끝났어.”
“우린 오늘 모든 게임에서 이길 거라고.”
“제이든이 있어서 힘들지 않을까?”
“하긴. 제이든만 없으면 정말 다 이길 텐데.”
“Bloody Hell!”
시끌벅적한 제이든과 친구들은, 치킨 한 박스를 아직 뜯지도 않았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흥분해서 게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첫판부터, 아주 가볍게 승리하였다.
[- Victory -]
“크, 역시 석현!”
“무슨 소리야, 이 제이든 님이…….”
“Shut up!”
“너 때문에 질 뻔했잖아!”
“제길!”
석현은 한국 서버에서도 상위 0.1퍼센트 수준의 랭커였고 제이든의 친구들은 평범한 게이머였으니.
아무리 제이든이 게임을 못했다고 한들, 석현이 파티에 합류한 순간부터 승리가 보장된 것은 당연지사.
덕분에 제이든의 파티는 두 번째 판까지 깔끔하게 승리했지만, 변수는 그다음에 찾아왔다.
[석구석구돌리고석구 : 오늘은 여기까지야 친구들.]
게임 속을 누비며 팀을 이끌던 석현이, 갑자기 로그아웃을 선언했으니 말이다.
[조선제일검객 : What?! 뭐라고?]
[Lucioo : 말도 안 돼! 이제 고작 8시 45분이라고!]
[Rosle127 : 제이든 네가 너무 못해서 석현이 도망가잖아!]
[조선제일검객 : 내가 잘못 했어 석현 T.T 다음 판은 더 잘 해볼게.]
제이든과 친구들은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파티에서 나가는 석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석현이 나가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석구석구돌리고석구 : 오늘은 어쩔 수 없어, 브로들. 왜냐하면 오늘은, TV에 대표님이 나오시는 날이거든.]
[조선제일검객 : What?]
[석구석구돌리고석구 : WJ스튜디오의 넘버2로서,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시청해야할 의무가 있지.]
오늘은 일요일.
그리고 일요일 9시는, <우리 집에 왜 왔니>가 방영되는 날이었다.
물론 제이든은 방방 뛰었지만, 소용없었다.
[조선제일검객 : 거짓말! 유리아를 보고 싶은 거잖아!]
[석구석구돌리고석구 : 내 충심을 왜곡하지 마, 제이든. 그럼 난 이만.]
석현은 <우리 집에 왜 왔니>를 한 주라도 보지 않으면, 시름시름 앓는 병에 걸렸으니 말이다.
[석구석구돌리고석구님이 접속을 종료하셨습니다.]
그리고 석현이 그렇게 게임을 떠난 뒤…….
“제이든! 제이든! 거기서 대체 왜! 끄아악!”
“Holy shit! 제발 눈을 뜨고 게임 해줬으면 좋겠어, 제이든.”
“Surrender. 난 항복할 거니까, 동의나 해 친구들.”
“젠장. 우린 석현 없이 게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어.”
“동의해. 석현이 없을 땐, 그냥 공이나 차야겠어.”
15분 만에 처참하게 게임에서 패배해 버린 제이든과 아이들은, 미련 없이 컴퓨터를 끄고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패배로 인한 분노의 화살은, 게임을 말아먹은 제이든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얼른 뛰어나가서 치즈 케잌이나 사 오도록 해, 제이든.”
“What?! Why me?! 아까 축구게임은 니들이 졌잖아!”
“그거랑은 별개야.”
“맞아, 제이든. 방금 전에 네가 싼 똥을 생각해.”
“크흑!”
물론 석현덕에 이긴 판이 진 판보다 훨씬 많았지만, 원래 마지막 판의 승패여부가 그날의 기분을 좌우하는 법.
게임에 대한 흥이 식은 제이든의 친구들은, 그대로 거실 소파에 둘러앉아 TV를 켰다.
이어서 그들의 우상(?) 석현이 시청한다는, <우리 집에 왜 왔니>를 시청하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