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전생에 목수였습니다만?
우진의 목공작업은, 마치 목공모형 패키지의 부품들을 제작하는 작업과 같은 것이었다.
머릿속에 디자인되어 있는 가구의 각 부위들을 미리 만들어 두고.
실제 촬영 때는 그것들을 빠르게 조립해서, 순식간에 가구를 완성 시키려는 생각.
본래 목공가구를 제작하는 것은 긴 시간과 인내. 그리고 세심한 작업들이 필요한 과정이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영상에 그대로 담는다면 다큐가 될 뿐이고, 예능에서 시청자들에게 보여줘야 할 부분은 ‘흥미로운’ 장면들이다.
보는 것만으로 어떻게 가구가 만들어지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고 감탄할 수 있는 부분들.
그런 의미에서 공PD는, 우진의 이야기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우진 씨.”
“네?”
“혹시 연출 공부한 적 있는 건 아니죠?”
“뜬금없이 그게 무슨…….”
“아니면, 제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갔다던가…….”
“칭찬이죠?”
“당연하죠. 우진 씨 덕에 오늘 촬영, 제 생각보다 두 배는 빨리 끝날 것 같거든요.”
우진이 준비해 둔 자재들과 작업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은 공PD는, 촬영이 시작되기 전부터 요란스럽게 감탄하고 있었다.
그의 설명만 들어도 오늘 촬영분을 어떻게 편집해서 만들어야 할지,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촬영이 빨리 끝날 것 같다는 공PD의 말에, 우진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흐흐. 가구가 그렇게 뚝딱 만들어지는 건 줄 아시나.’
우진이 사전작업을 아무리 기가 막히게 해 뒀다고 한들, 아직도 해야 할 공정이 태산같이 남아있었으니까.
아마 우진이 생각한 모든 가구들을 전부 완성하려면, 새벽까지 꼬박 촬영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 이틀로 나눠서 촬영하는 게 나을지도.’
그래서 우진은 촬영팀이 전부 모이자, 곧바로 공PD를 독촉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할 거 진짜 많거든요 피디님.”
“그냥 뚝딱뚝딱 조립하면 끝 아녜요?”
“……아뇨. 절대 그렇지 않으니까, 빨리 시작하셔야 할 겁니다.”
“음…….”
“그럼 뭐부터 시작할까요?”
“일단 제가 재단 작업 일부러 좀 남겨뒀거든요.”
“재단이라면, 나무 자르는 거요?”
“네. 뭐, 그런 거.”
팔을 다시 걷어붙인 우진이, 목공용 장갑을 끼며 말을 이었다.
“제가 팀원들에게 나무 재단을 가르쳐주는 것부터 시작하면, 그림이 괜찮겠죠?”
“오호. 좋아요. 그렇게 시작하죠, 그럼.”
우진과 공PD가 대화하는 사이, 촬영 준비를 마친 출연진들이 두 사람의 옆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대충 들어서인지, 재엽을 비롯한 출연진들은 재밌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진의 옆에 다가온 재엽이,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야, 오늘 우리가 진짜 가구를 직접 만드는 거야?”
“그렇다니까요, 형.”
이어서 다가온 수하 또한,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입을 열었다.
“이거 무슨 목공 원데이클래스 같아.”
“원데이클래스요?”
이번에는 리아가 거들었다.
“막 있잖아. 취미로 배우는 만들기 수업 같은 거.”
그녀 또한 목재가구를 제작한다는 컨텐츠 자체가 재밌어 보이는지, 무척이나 의욕 넘치는 표정.
그에 우진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하하.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정말 재단부터 시작해서 마감 공정까지, 하루 만에 싹 다 가르쳐드릴 예정이니까요.”
우진은 겉으로는 가볍게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아주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신기하다는 듯 공방을 둘러보기 시작하는 출연진들이, 다가올 어두운(?) 미래를 알지 못하는 어린 양들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딱 두 시간만 지나면 제발 쉬자고 할 것 같은데…….’
하지만 의욕 넘치는 팀원들의 사기를, 미리부터 깎아놓을 필요는 없는 것.
“자, 그럼 재단은 누구부터 배워보실래요? 역시 팀장인 재엽이 형부터?”
출연진들이 대화하는 사이, 촬영 팀의 카메라들은 자연스레 켜졌고.
그것을 아는 우진은,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였다.
“좋아! 내가 또 한 손재주 하지.”
“거짓말. 오빠는 말대로면 못하는 게 대체 뭐야?”
“재엽 오빠? 원래 저 오빠, 웃기는 것 빼고 다 잘해 언니.”
“아하.”
“조용조용!”
세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며 피식 웃은 우진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우선 세 분 다 보세요. 제가 먼저 시범을 보일 테니까요.”
그리고 다음 순간.
“……!”
우진을 제외한 모든 출연진과 촬영팀들은, 정확히 한 시간 전까지 재성이 짓고 있던 표정과 똑같은 표정이 되었다.
* * *
수하는 오늘, 자신의 코디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으, 언니는 왜 이렇게 하늘하늘한 옷을 입혀 놔서.’
단순히 예능 촬영이라고 생각하고 코디를 부탁했던 게 문제였다.
수하의 코디는 오늘 그녀가 무슨 노가다를 하게 될지 당연히 알 리 없었고.
그래서 최대한 여성스럽고 예쁜 여배우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한 옷차림과 메이크업을 해줬던 것이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말이다.
하지만 그 덕에 수하는, 적잖이 고전해야 했다.
“여기서, 이렇게 밀어 넣으라고?”
“아니. 누나. 그렇게 허리 뒤로 쑥 빼고 밀면 힘이 안 들어가잖아.”
“그럼?”
“테이블에 딱 붙어서 정확히 맞춰서 밀어야지.”
“으, 으으……! 원피스에 톱밥 다 묻는데…….”
“그러니까 오늘 가구 만든다는데, 이런 옷을 입고 오면 어떡해?”
원래부터 편한 추리닝 복장을 하고 왔던 재엽과, 그나마 편한 면바지에 후드를 입고 온 리아는 상황이 좀 나았다.
하지만 수하의 원피스는 더러워지는 것을 떠나서 몸을 움직이는 것도 불편한 복장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열불이 나기 시작했다.
‘아으, 몸 사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사실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하는 좀 괄괄한 성격이었다.
평소에 운동도 즐겨 하고, 몸 쓰는 일도 딱히 싫어하지 않는.
오히려 매번 이렇게 여성스러운 복장을 코디 받는 것도, 그런 수하의 성향을 아는 소속사의 주문 때문이었다.
수하의 외모가 워낙 여성스러워서인지, 소속사에서는 처음부터 그런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다가가길 원했던 것이다.
물론 수하가 싫다는데 소속사가 억지로 강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 또한 오랜 무명시절을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고, 그래서 오히려 소속사에게 더 부탁했던 것뿐.
하지만 결국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고집하는 건, 그녀의 성향과 잘 맞지 않는 일이었다.
“저, 피디님.”
“네?”
“옷 좀 갈아입고 와서 다시 촬영해도 될까요?”
“옷을…… 갈아입으시겠다고요?”
수하의 발언에 가장 놀란 것은 매니저인 송지호였지만, 다른 출연진들도 조금은 당황하였다.
어차피 공PD도 여배우인 수하에게 그렇게까지 리얼한 목공작업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데.
옷까지 갈아입고 오겠다는 열정적인 태도를 보여주니 말이다.
“구, 굳이 그렇게까지는 안하셔도 되는데…….”
하지만 수하는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었고.
“으, 제가 너무 불편해서 그래요. 옷 갈아입고 오면 더 잘할 수 있어요.”
“뭐……. 알겠어요. 갈아입으실 옷은 있어요?”
“네.”
후다닥 목공방 밖으로 튀어 나갔다.
“야, 임수하. 뭘 입으려는 거야. 너 편한 옷 따로 챙겨온 거 없어.”
촬영장에서 같이 튀어나온 송지호는 허둥지둥한 표정으로 얘기했지만, 수하는 이미 생각해 둔 옷이 있었다.
“편한 옷이 왜 없어. 나 맨날 입는 그거 있잖아.”
“뭐? 설마…….”
“시청자들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더 좋아할 거야. 몸 사리면 이미지만 나빠진다고.”
“아니, 그냥 그 원피스 입고 열심히 하면 안 돼?”
“더러워지잖아.”
“더러워져도 돼. 그거 협찬받은 옷도 아니고 그렇게 비싸지도 않아.”
“싫어. 불편해.”
“야, 임수하!”
벤으로 뛰어 들어간 수하는, 후다닥 추리닝으로 갈아입었다.
심지어 그 추리닝은, 수하가 정말 편한 복장으로 막 입기 위해 장만해 놓은 헐렁한 운동복.
그 모습을 확인한 지호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탁 짚을 수밖에 없었다.
“야, 차라리 내가 빨리 튀어 나가서 제대로 된 트레이닝복이라도 사 올게.”
“됐어. 운동복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리아 씨 입고 온 스포츠웨어 못 봤어? 차라리 그런 거라도…….”
“됐어. 나 때문에 촬영 지연되는 건 싫어.”
“아으, 진짜!”
말릴 새도 없이 후다닥 다시 공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수하를 보며, 지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쉴 수밖에 없었다.
“후우우우……. 임수하 저거 진짜…….”
최근 유명세를 조금씩 얻으면서, 수하의 성격이 많이 온순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오랜만에 컨트롤되지 않는 본색이 나오니, 매니저로서는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실장님께 내가 좀 깨지면 되지 뭐.”
하지만 이때만 해도 송지호는 알 수 없었다.
수하의 이 선택과 오늘 보여줄 그녀의 열정적인 모습이, 앞으로 그녀의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줄지 말이다.
* * *
“제이든.”
“응?”
“대출 좀 부탁해.”
“대출? Oh. 나 돈 없쒀, 소연.”
“아니, 그 대출 말고. 대리출석.”
“What? 내가 소연의 대리출석을 어떻게 해. 내 목소리는 굵고 아름답다고.”
“후우…….”
우진에게 대리출석을 부탁받은 소연은, 그 임무를 제이든에게 떠넘길 수밖에 없었다.
여자인 그녀의 목소리로 우진의 대리출석을 한다는 건 애초에 어불성설이었고.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 중 우진과 가장 친한 남학생이 제이든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제이든의 한국어에 약간의 혀굴림 발음이 들어가긴 하지만, ‘네!’라는 한 단어 정도는 문제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 말고. 네 보스가 대리출석을 부탁했어.”
“Boss? 누가 내 Boss인데?”
“모른 척하지 마, 제이든. 우진이지 누구겠어.”
“Oh Shit! 이런 악덕 업주!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을 정말 뼛속까지 빨아먹는군!”
“너처럼 건방진 프롤레타리아가 어디 있냐?”
“후우. 이런 Cheating은 정직한 제이든과 어울리지 않는데…….”
볼을 잔뜩 부풀린 제이든을 향해, 소연이 한 마디를 추가로 던졌다.
“오빠가 저녁에 마장동 데려간 데.”
그러자 제이든의 표정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Bloody Hell! 이 제이든에게 맡겨달라고!”
마장동에는 서울 최대 규모의 축산물시장이 있다.
때문에 축산시장의 정육식당에서 파는 한우들은, 값싸고 맛있기로 유명하다.
WJ 스튜디오가 있는 성수동과 무척이나 가깝기 때문에, 회사 회식으로 종종 가는 곳.
그래서 못마땅한 표정이던 제이든은 곧바로 의욕 넘치기 시작했다.
고기 매니아인 소연과 친하게 지내서인지, 최근 제이든의 한우 사랑도 남다른 수준이었다.
“제이든. 오바하지 말고, 대답만 해야 해. 알지?”
“물론이지. 제이든은 연기파 디자이너라고.”
“…….”
어쨌든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교수님이 강의실에 들어왔고.
여느 때처럼 앞번호부터 하나씩 출석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김지현!”
“네!”
“나유진.”
“네에!”
그리고 마장동이라는 단어에 잔뜩 흥분한 제이든은, 눈까지 반짝이며 우진의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대리출석 한 번으로 최상급 한우를 얻어먹을 수 있다면, 이건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그렇게 기다렸던 서우진의 출석 차례가 왔을 때.
“서우진!”
제이든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큰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다.
“Yes Sir!”
덩치 큰 동기의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인 것까진 좋았지만, 완벽한 원어민 발음으로 예썰을 외쳐버린 것이다.
장내에는 당연히 정적이 흐를 수밖에 없었고.
“…….”
잠시 후 교수님의 나직한 목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제이든, 나와.”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