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98화 (98/315)

98화

전생에 목수였습니다만?

수요일 아침.

우진은 홀로, 을지로로 향했다.

[뭐? 오늘 학교 안 온다고?]

“응.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자체휴강.”

[오늘은 같은 소리 하네. 누가 들으면, 정말 오늘만 빠지는 줄 알겠다. 수업 빠지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면서.]

“그러니까 부탁해, 소연 님.”

[뭘 부탁한다는 거야? 난 모르겠는데?]

“저……. 그러니까. 있잖아. 그거.”

[그게 뭔데?]

“대출……. 이랄까.”

[빌려드릴 돈 없습니다, 고갱님.]

“치사하게 자꾸 그럴래?”

[쳇. 알겠어. 그래도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교수님께 걸리면 나도 학점 깎인다고!]

“알겠어, 알겠어. 진짜 마지막!”

소연에게 은밀한 부탁(?)까지 완료한 우진은, 가벼운 마음으로 촬영장에 도착했다.

아직 출연진은 물론 촬영팀조차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우진은 약속 시간보다 거의 두 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여, 서 대표 왔나?”

“예, 반장님!”

“일찍 왔구만, 그래?”

“제가 미리 와서 준비 좀 해야죠.”

“하하, 지난주에 방송은 잘 봤다고.”

“오, 본 방 보셨어요?”

“그럼, 그럼. 우리 서 대표님이 방송 타셨는데, 궁금해서라도 봐야지.”

“지난 방송 때는 저 안 나왔는데요?”

“그러게. 서 대표 없어도 재밌더만.”

“저 나오면 더 재밌을 겁니다.”

“하하하. 기대함세.”

오늘 <우리 집에 왜 왔니> 재엽팀의 촬영장은, 을지로 깊숙한 곳에 있는 목공방이었다.

WJ 스튜디오의 단골 거래처이기도 하면서, 우진과 개인적인 친분도 있는 목수 고재성이 운영하는 목공방.

고재성은 우진이 전생에 친분이 있었던 인물은 아니었지만, 꽤 유명해서 들어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거래를 틀 때, 우선적으로 찾아갔던 인물이었고, 그 다리를 놔준 것은 진태였다.

고재성은 진태가 목공을 배우면서 모셨던, 스승 중 한 명이었다.

“근데 대체 뭘 만들려고 나무를 이렇게 많이 사다 놓은 거야?”

“이것저것이요. 책장도 만들어야 하고, 선반도 만들어야 하고…….”

“그걸 자네가 혼자 다?”

“뭐, 혼자는 아닙니다. 방송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팀원들이 있다고요. 하하.”

“설마 자네와 같은 팀이 될 거라던 그 연예인들?”

“네. 당연하죠.”

“팀원은 무슨……. 짐짝만 주렁주렁 달고 작업 하겠구만.

고재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껄껄 웃었다.

사실 연장 한 번 제대로 만져보지 못한 일반인들은, 조수 역할도 제대로 못 할 테니 말이다.

하물며 그중 가녀린 여자 연예인들도 섞여 있으니.

사실상 우진 혼자 싹 다 작업해야 하는 것.

물론 우진은, 팀원들을 어떻게든 써먹을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나 혼자 다 해서는, 방송 분량 안 뽑힐 테니까.’

퉁- 퉁-!

외투를 벗어 구석에 걸어 둔 우진은, 고재성이 빌려준 연장들을 하나씩 점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런 우진의 근처에 앉은 재성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우진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나저나 자네, 목공은 얼마나 두들겨 본 거야?”

우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대충 21년?”

목소리 자체는 농담조였지만, 결코 농담 아닌 우진의 대답.

하지만 당연히 농담으로 받아들인 재성은,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걸음마 시작하자마자 망치부터 잡은 게로군.”

“망치는 돌잡이 때 잡았고……. 아마 두 돌 때는 타카질 시작한 것 같은데요.”

“크하핫,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서 대표 진짜 재밌다니까.”

재성은 우진의 실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직접 우진이 목공 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친한 목수 몇 명과 그의 제자나 다름없는 진태로부터, 우진의 실력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을 뿐이다.

‘뭐, 진태가 그만큼이나 칭찬할 정도면……. 어지간히 잘하기야 하겠지만.’

그래서 재성은, 우진이 실제로 목공 하는 것을 눈앞에서 한번 보고 싶었다.

진태를 비롯한 다른 목수들의 말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과 호기심은 별개였으니 말이다.

퉁- 퉁- 퉁-!

꼼꼼히 연장들을 점검하는 우진을 지켜보며, 재성의 기대감이 좀 더 커졌다.

‘일단 기본은 된 것 같고…….’

하지만 다음 순간, 우진이 본격적으로 재단 작업을 시작하자.

지이이잉-!

단순히 흥미만 담겨 있던 재성의 두 눈이, 점점 더 크게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지이잉- 툭-!

지이이잉-! 툭-!

공방 한편에 설치된 슬라이딩 테이블쏘(Sliding Table saw)*[테이블 위에 목재를 올려놓고 재단할 수 있도록, 날카로운 원형 전동톱날이 테이블 가운데 설치되어있는 목공기계.]위로, 능숙하게 목재들을 올려서 슥슥 잘라내는 우진의 모습.

커다란 판재들을 손쉽게 테이블 위로 올리고, 우진이 그것을 쭉 쭉 밀어 넣을 때마다.

오차 하나 없이 정확히 재단된 일정한 크기의 나무판들이, 우진의 옆으로 툭 툭 떨어져 쌓였으니 말이다.

‘저거 지금, 제대로 도면은 보면서 자르는 거야?’

사실 테이블쏘를 사용해서 목재를 자르는 것은, 숙련자가 아니더라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워낙 기계들의 성능도 좋아졌고 사용법도 간단한 편이다 보니.

말 그대로 정확한 위치에 가져다 대기만 하면, 쓱 잘려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간단한 작업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조작과 움직임으로 정확한 크기의 나무판들을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것은.

목공만 수십 년 한 고재성이 보기에도, 감탄스러울 만한 숙련도라고 할 수 있었다.

‘나라고 못 할 건 아니지만…….’

시작부터 기대 이상의 실력을 보여주는 우진의 모습에, 묘한 호승심마저 생기는 고재성.

하지만 그의 감탄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흠. 300에 600짜리는 이 정도면 충분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구조를 짜볼까?”

돌연 작업을 멈춘 뒤 재단이 끝난 판자를 세어 본 우진이, 테이블쏘의 세팅을 별안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드륵- 탁-!

드르륵-!

오늘 재성의 목공방에서는 처음 작업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제 연장들을 만지는 것처럼 능숙하게 세팅을 바꾸는 우진.

이어서 우진은 또다시 목재들을 재단하기 시작했고, 이번에야말로 ‘묘기’라고 할 만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지이이잉-!

맹렬히 회전하는 톱날 위로, 쉴 새 없이 빨려 들어가는 우진의 목재들.

“……!”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그 광경을 보던 재성은, 잠시 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우진이 잘라내는 목재들의 사이즈가, 전부 제각각이었으니 말이다.

‘뭐, 뭐 하는 거지?’

테이블쏘에 한번 사이즈를 세팅해 두면, 보통 한 가지 사이즈의 판재만 연속해서 재단해 내는 것이 보통이다.

아무리 숙련된 실력자라 해도, 테이블 위에 세팅된 자의 도움 없이 정확한 재단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은 분명, 여러 가지 사이즈의 판재들을 연속해서 뽑아내고 있었다.

당연히 자를 대지 않고 자르는 것은 아니다.

테이블쏘 위에 세팅해 놓은 설정값들은 최대한 활용하되, 그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다양한 비율과 크기를 응용해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우진이 만들어내는 판재들의 크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고.

금세 그것을 알아챈 재성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재단계획을 짜서 이렇게 작업한 거라면……. 정말 보통 숙련공이 아닌데.’

우진의 작업방식은 놀랍도록 깔끔했으며, 그만큼 효율적이었으니까.

재성은 우진의 실력보다도 영리함에 더욱 놀랐다고 할 수 있었다.

“자네, 도면은 다 외워서 작업하는 건가?”

작업을 잠시 멈춘 우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네, 뭐……. 어차피 제가 짠 도면이니까, 사이즈는 다 기억하고 있어서요.”

“역시 젊음이 좋구먼.”

“네? 갑자기 젊음은 왜…….”

“나는 늙어서 그런지, 1분 전에 확인한 사이즈도 매번 까먹거든.”

“하하. 제가 기억력이 좀 좋긴 합니다.”

“그나저나 진태 녀석이 칭찬하기에 잘할 줄은 알았지만…….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실력이 깔끔하구만 그래.”

“감사합니다.”

“허구한 날 술 퍼마시는 아들놈 대신에, 내 공방이라도 물려주고 싶을 정도야.”

“흐흐, 마음만 받을게요, 마음만.”

재성의 칭찬에 기분 좋은 표정이 된 우진은, 다음 작업을 위해 목재들을 한 번 정리하였다.

‘생각해보면 내가 전생에서부터……. 기억력 하나는 꽤 좋았단 말이지?’

우진은 손재주가 좋다.

하지만 우진의 목공작업을 보며 다른 목수들이 항상 가장 감탄하던 부분은, 다름 아닌 우진의 어마어마한 작업속도였다.

남들이 5 정도 작업할 때, 혼자서 10 이상을 뚝딱 해치워 버리는 미친 속도.

심지어 5 이하를 하는 사람들보다 정확도도 훨씬 더 좋았으니, 감탄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미친’ 속도의 근원은, 우진의 타고난 공간지각능력과 기억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번 본 공간을 순식간에 도면으로 풀어내는 능력.

도면을 몇 번 보지 않고도 연속해서 작업을 해 낼 수 있는 기억력.

어쩌면 도면을 볼 때 극대화되는 우진의 이 기억력은, 타고난 공간 감각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인지도 몰랐다.

삼차원 공간 자체를 정확하게 머릿속으로 이해하고 기억할수록.

그 부속품이나 다름없는 치수들도 더 손쉽게 외워질 테니 말이다.

어쨌든 남들이 도면과 작업물을 대조하며 치수를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동안, 우진은 거침없이 작업을 속행할 수 있었고.

지금 재성의 앞에서 우진이 보여주는 놀라운 속도의 목공작업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이이이잉-!

그런데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우진의 작업을 지켜보던 재성은, 문득 뭔가를 깨달았는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나저나 이 친구, 언제까지 재단만 할 셈이지?’

이미 우진의 옆에는 각종 사이즈로 재단된 목재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재성이 볼 때 이 정도의 양이면, 이미 가구 하나 정도는 충분히 만들어내고 남을 정도였다.

그런데 계속해서 테이블쏘 위에 나무판자만 밀어 대고 있으니.

본격적인 가구 제작을 위한 작업들은 언제부터 할 생각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재성은 우진에게 물어보았다.

“대체 무슨 가구를 만들려고, 이렇게 어마어마한 양을 자르는 건가?”

하지만 그 질문에, 우진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한 개 만들 분량이 아니니까 그렇죠.”

“으음?”

“오늘 만들 가구가 총 다섯 개 정도 되는데, 그거 싹 다 재단부터 해두려고 그럽니다.”

“굳이……?”

우진의 말을 들은 재성은, 더욱 의아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작업물을 위한 자재들을 미리 다 잘라놓는 것은 효율 측면에서도 분명히 좋은 것이었지만.

이렇게 한 번에 여러 작업물의 재료를 미리 재단해 두는 것은, 오히려 작업에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효율을 추구하다가 오히려 역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우진도 그 부분을 당연히 알고 있었고, 때문에 이러한 작업방식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방송에서 이렇게 지루한 장면들만 찍어갈 수는 없잖아요.”

“뭐……?”

“미리 싹 다 잘라놓고 촬영 때는 재밌는 작업들만 보여줘야, 방송이 살 것 아니에요.”

“…….”

우진에게 그 이유를 들은 재성은, 아예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재성이 보기에는 그냥 우진이 나무 자르는 것만 찍어도 재밌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거의 한 시간 가깝게 멍한 표정으로, 우진의 작업만을 지켜보고 있었던 자신이 바로 그 증거.

‘지금도 재미있다고, 이 괴물 같은 놈아!’

하지만 우진은 재성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든, 본인의 작업에 더욱 열을 올릴 뿐이었다.

위이잉- 지이이잉-!

하여 그렇게 삼십여 분 정도가 더 지났을 무렵.

<우리 집에 왜 왔니> 의 촬영팀이, 하나둘 공방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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