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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97화 (97/315)

97화

출사표

천웅건설은 아직 객관적으로, 업계 최상위에 자리 잡고 있는 제운건설이나 SH물산. 명성건설 등과 덩치 차이가 크다.

1위인 제운건설을 기준으로 놓고 비교하면, 시공능력 평가액이 거의 두 배 정도 차이나는 수준이니 말이다.

그래서 완전히 같은 조건에서 3사와 함께 총력을 다 해 경쟁한다면, 천웅이 이길 확률은 높게 잡아줘야 5%미만이다.

그리고 경완은, 이러한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제운이나 명성에서 더럽게 나오기 시작하면……. 답이 없긴 하지.’

때문에 경완이 이번 ‘청담 선영아파트 재건축 사업’에 출사표를 던진 데에는, 나름대로의 계산과 근거가 있었다.

전체적인 업계의 흐름과, 최상위권 건설사들의 상황.

현재 순풍에 돛 단 듯 쭉쭉 성장하고 있는, 천웅건설의 상승세까지.

이 모든 상황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가능성이 몇 배 이상 올라가니 말이다.

“부장님. 진짜 괜찮으시겠습니까?”

부하직원 우재준의 물음에, 경완이 피식 웃으며 답하였다.

“괜찮아. 충분히 할 수 있다니까?”

“가만히 계셔도 요즘 같은 흐름이면 몇 년 안엔 임원 다실 것 같은데……. 이거 괜히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닙니까?”

“천웅 최연소 임원 타이틀 한 번 달아보려고 그런다, 왜.”

“임원 빨리 달아서 뭐합니까. 임원 되면 언제 잘릴지 모르는데…….”

“악담을 해라, 악담을.”

“임원이 원래, 임시직원 줄임말인 것 모르세요?”

임원은 사원과 달리 계약직이다.

1년 단위로 연봉을 재협상하며, 실적이 안 좋으면 언제든 목이 떨어질 수 있는 계약직.

재준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만, 경완은 코웃음 칠 뿐이었다.

“잘하는데 자르겠냐? 5년 내로 연봉 다섯 배쯤 튀겨서 너한테 자랑할 거니까. 배 아플 준비나 해.”

“어우, 욕심쟁이…….”

“뭐, 인마?”

경완의 나이는, 올해로 마흔둘이다.

그러니까 이번 프로젝트 수주로 임원 진급이 확정되면, 마흔셋으로 넘어가는 2011년의 인사이동에 임원 타이틀을 다는 것이다.

오너 일가를 제외한다면, 역대 천웅건설 최연소 상무가 마흔다섯이었으니…….

내년에 상무를 달 수 있다면 말 그대로 최연소 타이틀을 빼앗아 오는 것.

하지만 경완이 정말 그 최연소 타이틀에 눈이 멀어 무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경완이 움직인 것은, 그의 눈에 보이는 가능성에 대한 순수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가능하긴 한 겁니까?”

여느 때처럼 자판기 우유를 뽑아 든 경완이, 재준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야, 생각해 봐.”

“뭘 말입니까?”

“지금 제운이랑 SH물산, 죄다 중동으로 파견 나가 있지?”

“음, 그렇긴 한데……. 거기 쫄딱 망해서 이제 싹 다 들어오지 않습니까?”

“들어온다고 누가 그래.”

“두바이월드에서 작년 말에 모라토리엄*[국가적 차원에서 긴급 사태가 발생한 경우에, 국가 권력의 발동에 의하여 일정 기간 금전 채무의 이행을 연장시키는 일.(채무지불유예)] 선언하면서……. 국내 건설사 전부 다 발 뺀 것 아니었습니까?”

한때 중동의 허브로 발돋움하며, 건설업계에서 ‘약속의 땅’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던 곳인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하지만 해외자본의 의존도가 높았던 두바이는 미국발 경제위기(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함께 몰락의 길을 걸었고.

급속도로 개발되는 두바이 부동산에 뛰어들었던 국내 건설사들은, 썰물처럼 두바이 사업장에서 빠져나왔다.

한창 두바이에 건설사들이 뛰어들 당시, 역량이 부족했던 천웅건설이 합류하지 못했던 것이 다행일 정도.

이 사실은 업계 관계자라면 거의 다 아는 사실이었고.

그래서 재준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하지만 경완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두바이가 망한 거지, 오일 머니(Oil money)가 망한 건 아냐.”

“그게 무슨……?”

“너 작년에 제운건설 베이스캠프, 아부다비로 옮긴 것 모르냐?”

“베이스캠프라면, UAE지사 말씀이세요?”

“그래.”

“으음…….”

“SH물산도 마찬가지고……. 모르긴 몰라도, 명성건설도 다를 바 없을 거야.”

“그렇군요.”

“그러니까 이게, 첫 번째 근거.”

“천웅이 수주전 이길 수 있다는 근거 말입니까?”

“그렇지.”

국 내․외로 천웅보다 훨씬 더 많은 사업장에 힘을 쏟고 있는 경쟁사들.

반면에 지난달을 기점으로 거의 모든 수주전이 마무리된 천웅.

여러 사냥감을 한 번에 노리려는 호랑이보다, 단 하나의 목표물을 정확히 노리려는 승냥이의 사냥 성공률이 더 높은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경완이 볼 때 지금 이 시기는,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럼 두 번째 근거도 있는 겁니까?”

흥미로운 표정으로 묻는 재준을 향해, 경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 홀짝인 경완은, 다시 말을 이었다.

“너 혹시 월말 결산 회의 참석했었냐?”

“했었죠.”

“그럼 그때, 클리오 브랜드 결산보고서 봤어?”

“음, 보긴 했는데…….”

경완은 말꼬리를 흐리는 재준을 향해, 장난스럽게 주먹을 들어 보이며 핀잔을 주었다.

“야 씨, 일 제대로 안 하냐, 우재준.”

“부장님 이거 사내 폭력입니다!”

“내가 때렸냐? 때렸냐고!”

“위협을 느꼈지 말입니다!”

“휴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박경완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어쨌든 그 결산보고서 보면 알 수 있을 건데, 브랜드 인지도 성장세가 미친 수준이야.”

“미친 수준요? 그 정돕니까?”

“그래. 리서칭 결과가 완벽히 정확하진 않겠지만, 벌써 CW턱밑까지 쫓아왔어.”

“네……?”

경완의 말에, 재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CW는 천웅이 십 년 넘게 키워온 브랜드였고, Clio는 이제 런칭한 지 세 달도 채 되지 않은 브랜드였건만.

브랜드 인지도 평가 점수가 벌써 그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기존 CW의 인지도를 등에 업고 있긴 하겠지만…….’

그리고 현재의 인지도 점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승세.

세달 만에 인지도 7위급인 CW의 턱밑까지 따라붙었다는 것은, 다음 달이나 그다음 달이면 최상위권까지 뚫고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다는 소리였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9월 말부터 딱히 수주전이 없었어.”

“예, 부장님.”

“그런데도 마케팅 팀에서, 브랜드 홍보에 태우는 비용을 오히려 늘린 이유가 뭐겠냐. 돈이 썩어나는 것도 아니고.”

“진짜 미쳤네요. 이 정도일 줄은…….”

솔직히 경완이 첫 번째 이유를 들었을 때만 해도, 재준은 반신반의 했었다.

물론 경완의 분석은 충분히 유의미한 것이었지만, 그게 수주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결정적인 근거가 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브랜드 인지도는 다르다.

실제 건설사 도급순위나 규모가 어떻던, 소비자들이 보는 것은 결국 브랜드였고.

그 인지도 측면에서 제운건설의 더빌리지(The Village)나 SH물산의 아르티아(ArtiA)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설 수 있다면…….

‘정말 될 수도 있겠는데?’

경완의 출사표가, 더 이상 무모한 도전으로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크으……! 맛 좋다.”

자판기 우유를 홀짝이면서, 마치 맥주라도 마신 듯 오버하는 경완을 보며, 재준이 은근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럼 세 번째 근거는 뭡니까?”

“뭐? 세 번째?”

“설마 두 번째가 끝이었던 겁니까?”

재준의 물음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슬쩍 구부렸고.

“마지막 근거는 나야 인마.”

“네?”

“이 박경완이가 곧 근거라고.”

경완의 그 농담 아닌 농담에, 재준은 진저리를 치며 대답했다.

“아, 제발. 부장님.”

“왜, 뭐.”

“자기애가 너무 넘치시는 것 아닙니까.”

경완은 말없이 종이컵에 들어있던 우유를 전부 다 입에 털어 넣은 뒤, 휘적휘적 걸어갔다.

이어서 뒤로 재준이 따라오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짜식아, 이거면 충분해. 뭘 더 바래?”

“잘 되시겠죠 뭐. 이렇게까지 자신감 넘치시는데.”

“그래. 그러니까 설계 마감 끝나면, 발바닥에 불나도록 뛰어다닐 준비나 해.”

“예, 예. 물론입죠.”

너스레를 떠는 재준을 보며, 경완은 한 번 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이거면 충분하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경완에게는 한 가지 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믿는 구석이라기보다, 은근히 기대하는 구석.

‘서우진. 요놈도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경완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설계는 걱정 말라며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던 우진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 * *

10월도 슬슬 중순에 접어들었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새파랗고 투명한 하늘.

따뜻한 가을 햇살이 쏟아지는 수요일 오전, KBC의 촬영팀은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오늘 촬영, 을지로라고 하셨죠, PD님?”

“네, 재한 님. 시간 좀 남았으니까, 너무 서두르지는 않으셔도 돼요.”

“옙, 알겠습니다!”

햇살은 촬영팀의 차량 창문 안으로도 기분 좋게 내리쬐고 있었으며, 오늘 공PD의 표정은 그 햇살만큼이나 무척 밝았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제작기간 동안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화사한 표정.

오늘 공PD의 표정이 이렇게 밝은 것은, 사실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그녀가 모든 것을 갈아 넣는다는 각오로 촬영한 <우리 집에 왜 왔니>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적을 보여주었으며.

오늘은 그 기분 좋은 첫 방영 이후, 처음 있는 촬영 날이었으니 말이다.

“오늘은 촬영 끝나면 회식인 것 알죠?”

“오, 진짜요?”

“‘오늘은’이라뇨 피디님. 우리, 지난번에도 회식했잖아요?”

“그땐 출연진 다 모인 기념 회식이었고. 오늘은 첫 방 대박 기념 회식이고!”

“오오!”

“국장님이 법카 주셨으니까, 다들 쓸데없이 군것질은 삼가시길!”

“법카! 법카!”

“소고기! 소고기!”

법카라는 단어가 대체 왜 소고기로 치환됐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덕분에 촬영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기분 좋은 분위기 속에서, 촬영팀은 금세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근데 오늘 을지로에서, 대체 무슨 촬영 하는 거예요, 피디님?”

옆에 앉아있던 촬영보조의 질문에, 공PD가 웃으며 대답하였다.

“말했잖아요. A팀 인테리어 준비과정 촬영한다고요.”

촬영팀 내부에서는, 재엽팀을 A팀, 두영팀을 B팀이라고 부른다.

“A팀 인테리어 준비라시길래 압구정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을지로로 오니까 이상해서요.”

A팀이 인테리어 공사를 할 곳은, 팀장인 재엽의 집.

재엽의 집은 압구정에 있었으니, 촬영보조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뭐, 나도 오늘 무슨 그림이 나올지는 감이 잘 안 오니까…….’

하지만 공PD는 구체적인 대답 대신 웃으며 둘러 말했다.

“뭐, 곧 보시면 알 거예요.”

“음…….”

“재한 님! 여기 이쪽 공영주차장에 차 대죠. 안쪽으로 걸어서 들어가야 해요.”

“네, 피디님! 알겠습니다!”

차량을 대고 촬영 장비를 전부 꺼낸 <우리 집에 왜 왔니> 촬영 팀은, 곧 장비들을 가지고 을지로 골목길로 들어섰다.

이어서 차도 다니지 못할 정도로 좁은 골목길을 십 분이 넘게 걸어 들어간 촬영 팀은, 허름한 공장 같은 비주얼의 컨테이너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제법 넓은 부지 위에 지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간판 하나 붙어있지 않은 오래된 건물.

드르륵- 드르륵-

쿵-!

묵직하고 요란한 소리가 나는 그 건물 안으로, 촬영 팀은 조심히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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