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출사표
언제나 그랬듯 우진의 이야기는, 청자로 하여금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묘하게 확신에 찬 어조부터 시작해서, 말 한마디 한마디에 들어간 단단한 주관까지.
정신없이 우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회의실에 앉은 WJ 스튜디오의 직원들이 바로 그러하였다.
주거설계의 고급화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우진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할 듯,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려’라는 것은,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 시발점은 바로, 불편함에 대한 고찰입니다.”
“우리들이 아파트라는 주거공간에 살면서, 조금이라도 불편함을 느꼈던 모든 것들에 대한 고찰.”
“예를 들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아까운데……. 어떻게 이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을까?”
“현관에서 나갈 때, 집 안의 모든 불을 버튼 하나로 끌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집안에 평소 쓰지는 않지만 한 번씩 필요해서 버릴 수는 없는 물건들이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데. 이런 것들을 집 밖에 보관해 둘 공간이, 세대별로 따로 있으면 좋지 않을까?”
“너무나도 번거롭고 귀찮은, 음식물 쓰레기의 처리. 그냥 주방에서, 전부 다 해결해버릴 수는 없을까?”
그리고 우진의 이야기가 설득력 있는 이유는.
그것이 전생에서부터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건축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전생의 우진은 항상 디렉팅을 받는 입장이었으며, 그래서 매번 시키는 것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럼에도 우진은 한순간도 꿈을 놓은 적이 없었고, 그래서 언제나 질문을 던지곤 했었다.
상급자에게.
유명한 건축물에게.
눈앞의 설계 도면에게.
멋지게 디자인된 공간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물론 그렇게 던진 모든 질문들의 답을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고의 과정들은 전부 우진의 내면에 쌓였고.
그것이 한데 모여 건축과 디자인에 대한 통찰력을 만들어주었다.
“이런 귀찮음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배려가 하나둘 쌓일 때마다, 거주자들은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며 이 아파트가 특별한 공간이라고 느낄 수 있게 되겠지요.”
“하지만.”
탁-
우진이 탁자 위에 놓여있던 마우스를 클릭하자, 화면이 바뀌며 다음 키워드에 대한 이야기들이 명시되었다.
누구를 설득하기 위한 프레젠테이션이 아닌 원활한 회의를 위한 마인드맵 같은 것이었기에.
화면에 떠오른 이미지는, 우진이 흰 종이 위에 써 내려간 아이디어 스케치 같은 느낌이었다.
“이러한 배려들이 ‘고급화’와 ‘프리미엄’이라는 가치를 전부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편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심에는 상한선이 없기 때문이죠.”
“아무리 편리한 설계가 나와도 그 안에서 결국 인간은 또 다른 불편함을 찾아낼 것이고.”
“그 ‘배려’에 완벽히 적응하고 난 뒤에는, 또 다른 특별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진이 레이저 포인트로, 스크린 위에 떠 올라있는 가장 큰 단어를 가리켰다.
그것은 바로 ‘과시’였다.
“남에게 과시할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말이지요.”
‘과시’란, 사전적 의미로 ‘남에게 자랑하여 보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자랑하여 보일만 한 무언가는, 당연히 특별할 수밖에 없다.
“지난여름, 천웅건설의 새 브랜드 ‘클리오’가 성공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포 클리오 프레스티지에서 메인 디자인으로 밀었던 특화설계……. 동과 동 사이를 잇는 스카이 브릿지(Sky Bridge).”
“지인들이 하룻밤 묵어갈 수 있도록 공용시설로 설계해 둔, 프리미엄 게스트 하우스.”
“이것들이 과연, 주거의 편리를 위해 꼭 필요한 시설들일까요?”
우진의 질문에, 직원들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스카이 브릿지는 사실 멋진 외관을 위한 디자인적 구조물일 뿐, 편의성 차원에서 꼭 필요한 공간이 아니다.
굳이 다른 동과 동 사이를 고층에서 직접 움직일 이유가 없으니까.
공사비용과 시공 난이도를 생각한다면, 선택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디자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프리미엄 게스트 하우스는 또 어떠한가.
굳이 거주민들이 자신들의 관리비를 들여가며,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할 이유는 없다.
물론 필연적으로 손님들이 묵어가야 할 때, 집 대신 독립된 공간을 내어줄 수 있다는 부분은 편리하지만…….
사실 손님은, 외부의 숙박 시설에 묵어도 전혀 관계가 없으니까.
다만 단지 내 게스트 하우스가 있다면, 그들에게 과시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좋은 집에 산다.’는 것을 말이다.
“오늘의 회의에서 저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자합니다.”
“정말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아이디어라도 상관없습니다.”
“일단 싹 다 꺼내놓고, 실현 가능성은 그다음에 따지도록 하죠.”
말을 마친 우진은, 남아있던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쉬지 않고 말을 이은 탓에, 적잖이 목이 마른 것이다.
그리고 우진의 이야기가 끝난 이 순간을 기점으로.
WJ 스튜디오의,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 * *
종각역 천웅건설 사옥의 최상층엔, 일반 사원들은 거의 걸음 할 일 없는 프라이빗 한 공간들이 있다.
협력업체의 VIP들이 방문했을 때나, 중요한 임원 회의가 있는 날이라거나.
그럴 때가 아니면 잘 쓰이지 않는, 특별한 공간 말이다.
그리고 오늘 박경완은, 꽤 오랜만에 이곳에 올라왔다.
그를 부른 사람은 바로 천종걸 대표이사.
경완은 근 십 년 동안, 천종걸 대표이사와의 독대가 처음이었다.
또르륵-
두 개의 찻잔이 맑은 찻물로 채워지자, 직원이 가볍게 목례한 후 룸에서 나갔다.
서울 도심 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천웅건설의 종각역 사옥 최상층.
창가의 넓은 방 가운데는 고급스럽고 작은 탁자가 하나 놓여있었고.
그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아있었다.
먼저 찻잔을 든 천종걸이, 경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일세, 박 부장.”
“예, 대표님.”
“지난번에 봤던 게 아마……. 올해 시무식(始務式)때였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천종걸의 나이는 50대 후반이다.
하지만 머리를 새하얗게 염색해서인지, 멀리서 보면 그 나이를 가늠하기가 힘든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다부진 덩치.
항상 깔끔한 수트를 입고 다니는 그의 체격이 하얀 머리와 대비되면서,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외모 덕에 천종걸은 어떤 자리에서도 눈에 띄었는데, 신입사원조차도 그를 처음 본 순간 대부분 알아볼 정도라고 하였다.
“하하. 자네와는 언젠가 이 자리에 마주 앉게 될 줄은 알았지.”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그날이 올 줄은 몰랐어.”
“…….”
“내가 아무래도, 자네를 과소평가했던 모양이야.”
천웅건설의 대표이사인 천종걸은, 천웅그룹의 회장이자 창업주인 천명철의 장남이다.
하지만 천명철은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지가 오래였고.
사실상 천웅그룹 전체의 실질적인 1인자가 바로, 천종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박경완이 신입사원이던 시절.
천종걸은 그가 근무하던 부서의, 팀장급으로 일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후계자 수업의 일환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박경완은 신입사원 때부터, 천종걸과 거의 5년 정도를 함께 일했고.
천종걸이 박경완의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탁-
찻잔을 들어 그 맛을 잠시 음미한 천종걸은, 곧 다시 경완과 눈을 마주쳤다.
오늘 그가 경완을 이곳에 부른 이유는 바로 경완의 임원승진 때문.
천웅그룹은 임원승진심사가 있을 때, 항상 계열사의 대표이사가 사전에 대상자와 독대를 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이것은 심사 대상자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행사라고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승진심사의 등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이 오너와의 독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완은 긴장하지 않을 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천웅건설에서 잔뼈가 굵은 그에게도, 천종걸은 어려운 인물이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박경완이, 담담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걸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대표님.”
“운이라…….”
“제게 실적을 쌓을 수 있는 기회들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계속 찾아왔으니……. 그게 운이 아닐 수는 없겠죠.”
“하하.”
천종걸의 낮은 웃음소리에, 박경완의 표정이 조금 더 진지해졌다.
“하지만 그 모든 기회를 전부 제 것으로 만든 건, 오롯이 제 실력이라고 자부합니다.”
천종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렇겠지. 준비되지 않은 얼간이들은, 보통 기회가 온 것조차 모르고 지나가니 말이야.”
원래 기업의 임원진은, 주주총회나 이사회에 의해 선출된다.
그리고 그러한 선출방식은, 천웅건설이라 하여 다르지 않다.
다만 천웅건설의 지분구조는 천명철과 천종걸이 거의 다 틀어쥐고 있었고.
때문에 사실상 천종걸의 의지가 곧 임원승진으로 이어지는 것일 뿐이었다.
“좋아. 오랜만에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니, 옛날 생각도 나는구만 그래.”
천종걸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경완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회사일과는 크게 관련 없는,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천종걸에게는 오늘, 경완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가 명확히 있었으니 말이다.
“자네가 임 전무에게, 출사표를 던졌다고 들었네. 맞나?”
종걸의 입에서 나온 ‘출사표’란, 얼마 전 경완이 제출했던 3분기 보고서를 의미했다.
정확히는 그 안에 담겨 있던, ‘청담 선영아파트 재건축 사업장’의 수주와 관련된 제안서들.
그리고 경완은 이 제안서를 쓸 때, 확실히 한 가지를 알고 있었다.
만약 이 사업장을 따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으로 자신의 임원승진이 확정될 것임을 말이다.
그래서 이것은 출사표였다.
이사진도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경완의 그러한 생각과 의도를 정확히 알아챌 테니까.
때문에 경완은 오늘 종걸에게 불려 온 순간, 이 말이 나올 것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할 수 있었다.
그것이 정말 출사표가 맞냐는, 대표이사 천종걸의 확인 질문에 말이다.
“맞습니다, 대표님.”
종걸이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무려 청담동 알짜배기 사업장이야. 너무 무리한 출사표는 아니겠나?”
경완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시기상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도 제운이나 SH물산을 눌러야 한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지.”
종걸은 검지손가락을 들어, 탁자를 가볍게 두들겼다.
이것은 그가 기분이 좋을 때, 한 번씩 나오는 습관이었다.
잠시 뜸을 들인 경완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임 전무가 총력을 다 해 지원하겠다 하였습니다.”
“회사에서 지원할 수 있는 건, 재무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의 금전적인 지원일 뿐이네.”
“그 말씀은…….”
“결국 조합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건, 그 지원을 바탕으로 운전대를 잡을 자네라는 말이지.”
원론적인 얘기다.
이야기를 하는 종걸도, 그것을 듣는 경완도.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것은, 종걸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정말 해보겠느냐.
그렇다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라는.
그리고 종걸이 이렇게까지 말했다는 것은, 실패에 대한 책임도 분명히 물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후우.’
하지만 이미 경완은 기호지세.
여기서 물러선다면, 처음부터 칼을 뽑아 들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욱 확고하게 대답하였다.
“결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
“내년 이맘때쯤엔, 청담동 한복판에 제 삽을 꽂아 넣고 오겠습니다.”
건설업계에선 공사의 시작인 착공을, ‘삽을 뜬다.’는 은어로 많이 표현한다.
때문에 청담동에 자신의 삽을 꽂아 넣겠다는 말은, 그때 즈음엔 공사를 시작하겠다는 뜻.
그 말을 들은 종걸은, 아주 호쾌하게 웃어 젖혔다.
“으하하핫.”
경완이 발을 빼리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확신 있게 이야기할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좋아. 박경완이. 그럼 자네를 한 번 믿어보도록 하지.”
종걸의 주름진 눈에, 깊은 안광이 내려앉았다.
그는 경완의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보다 ‘책임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