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95화 (95/315)

95화

출사표

학교에서 오전 내내 시달린 우진은, 수업이 끝난 뒤 진이 다 빠진 채 사무실로 출근 중이었다.

‘으, 뭐한 것도 없는데 벌써 피곤하네.’

동기들부터 시작해서 선배들. 게다가 수업에 들어오는 교수님까지.

어제 방영된 <우리 집에 왜 왔니>를 다들 시청한 것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우진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시청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리적인 피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휴우.”

운전대를 잡은 채 한숨을 푹 쉬는 우진을 보며, 조수석에 앉은 소연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땅 꺼지겠어, 오빠.”

“이게 연예인들의 고충이겠지?”

“연예인은 무슨. 오바하지 말고.”

“쳇.”

소연이 우진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우진의 사무실이 곧 소연의 집 바로 옆이나 다름없었으니.

겸사겸사 우진의 출근길에, 소연도 얹혀가는 것이다.

덕분에 요즘 하교 시간이 1학기보다 훨씬 빨라진 소연이었다.

그리고 우진의 차 뒷좌석에는 시끄러운 영국인도 한 명 앉아있었는데, 그는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계속 투덜거리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우진은 연예인 병에 걸린 것 같아, 소연.”

“그러게.”

“멍청한 KBC에서는 대체 왜 이 제이든 님을 두고 우진을 섭외한 거지?”

아마도 학교 모든 사람의 관심이 우진에게만 쏠린 게, 불만의 원인으로 추정되었다.

“제이든. 넌 대체 왜 내 차에 탄 거야?”

“그야 난, WJ 스튜디오의 넘버3이니까.”

“넘버1이랑 2는 누군데?”

“우진, 석현. 바로 다음이 나지.”

“진태 형은?”

“오우, Shit! 생각해보니 숫자를 잘못 세었어.”

“진태 형한테 말해줘야겠군.”

“그러지 마, 우진. 의리 없게 그럴 거야?”

제이든의 집은 용산구지만, 어쩐 일인지 항상 하교 시간만 되면 우진의 차를 타려고 하였다.

개강 이후에는 딱히 WJ 스튜디오서 알바를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굳이 성수동에 왔다가는 제이든이었다.

한번은 매일 WJ 스튜디오에 출석 도장을 찍는 것이 귀찮지는 않은지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제이든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WJ 스튜디오는 이 제이든 님이 없으면 굴러가지 않지.]

[그러니까, 이제 알겠지? 이 제이든 님이, 얼마나 자비로운지 말이야.]

제이든의 그 대답을 문득 떠올린 우진은, 운전을 하다가 또다시 한숨을 푹 쉴 수밖에 없었다.

헛소리도 이 정도 창의적이면, 어떤 하나의 경지로 인정해줘야 할 것 같았다.

끼이익-!

성수동에 도착한 우진은, 사무실 건물에 가기 전 소연의 집 근처 대로에 잠깐 멈춰 섰다.

“소연이는 여기서 내리지?”

하지만 어쩐 일인지, 소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오늘은 오랜만에 나도 사무실 가볼래.”

“그래? 뭐 하러?”

“그냥. 할 게 좀 있어서.”

“음……?”

우진은 조금 의아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이제 아는 사람도 많으니, 인사라도 하러 가려나 보다 한 것이다.

‘어차피 다들 바빠서 인사도 제대로 못 받아줄 텐데…….’

하여 사무실 주차장에 차를 댄 우진은, 소연과 제이든을 데리고 14층으로 올라갔다.

* * *

WJ 스튜디오는 설립된 이후로 단 한 번도 한가했던 적이 없다.

대표인 우진이 쉴 새 없이 일을 물어다 가져오니, 한가할래야 한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요즘은, 지금까지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바쁜 일정이라 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안정화된 모형 파트보다, 최근 들어 일이 쏟아지는 시공 파트의 직원들이 더욱 바빴고 말이다.

“어, 진태 형! 미팅 잘 다녀왔어?”

“물론. 생각보다 수월하게 잘 풀려서…….”

우진의 뒤에 딸려 들어온 두 혹(?)을 발견한 진태가, 말을 하다 말고 피식 웃으며 아는 척을 했다.

“여, 제이든! 소연이도 왔네?”

“요 Bro! 오늘도 이 제이든 님을 기다리고 있었군?”

“안녕하세요, 오빠. 오랜만에 왔죠?”

“제이든 너는 금요일에도 왔으면서, 오늘은 왜 또 왔냐?”

“이 제이든 님이 없으면, 진태 횽이 슬퍼하니까.”

“헛소리는 달나라 가서 하라고 했지?”

“젠장. 진태 횽은 제이든의 가치를 몰라.”

진태의 구박(?)이 시작되자, 제이든은 슬쩍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WJ 스튜디오에서 제이든의 유일한 천적이, 바로 진태라고 할 수 있었다.

웃으며 그 모습을 보던 우진이, 코트를 옷걸이에 걸면서 진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형. 나 숨 좀 돌리고, 우리 회의 시작할까?”

“다들 이미 준비는 다 됐어. 회의실 세팅해둘 테니, 5분 뒤에 그쪽으로 넘어와.”

“오케이!”

우진에게 오더를 받은 진태는, 바로 회의실로 넘어가 회의 자료들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제이든과 소연 또한, 약속이라도 한 듯같이 우진의 집무실을 나갔다.

“너희는 모형 파트 쪽 가려고?”

우진의 물음에, 소연이 먼저 답했다.

“아니, 안 갈 건데?”

우진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안 간다고? 그럼 여기서 뭐하게?”

우진의 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차피 5분 뒤 회의에 들어가면 시공 파트 모든 직원이 자리를 비울 텐데.

다들 회의하는 동안 빈 사무실에서, 두 사람이 뭘 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이든과 소연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서 아주 자리를 잡으려는지, 각자 노트북까지 펴서 코드를 연결하였다.

두 사람이 자리를 펼친 곳은, 멋지게 꾸며진 로비의 바 테이블.

그제야 우진은 깨달을 수 있었다.

전공 수업 하나를 같이 듣는 소연과 제이든이, WJ 스튜디오의 로비를 호화로운 팀플 장소로 결정했다는 것을 말이다.

“뭐야, 니들 여기 과제 하러 온 거였어?”

우진의 물음에, 제이든이 아주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쓰지 않는 이 휑한 로비를, 이 제이든 님이 특별히 써주는 거야.”

“…….”

“맞아 오빠. 이렇게 비싼 돈 주고 해 둔 인테리어가, 매번 비어있으면 아깝잖아?”

할 말을 잃은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섬주섬 탁자 위의 서류들을 챙겼다.

생각해보면 조용하고 쾌적한 이 로비가, 어지간한 카페나 비즈니스룸보다 과제 하기 쾌적한 장소였다.

로비에 아주 짐을 싹 다 펼쳐두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회의가 끝날 때까지도 여기 있을 모양인 두 사람.

그런 둘의 모습에 피식 웃은 우진은, 회의서류들을 들고 그들의 옆을 지나쳤다.

“그래. 뭐, 니들이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있다가 저녁에 밥이나 같이 먹자.”

제이든이 반색하며 되물었다.

“우진, 당연히 법카겠지?”

“맞아. 법카야. 너만 빼고 다 같이 먹을 예정이지.”

“Holly shit!”

제이든이 뒤에서 구시렁거렸지만, 우진은 신경 쓰지 않고 회의실로 향했다.

* * *

회의실에 들어온 우진의 손에, 한가득 들려있는 것은 인쇄된 도면들이었다.

“와, 이제 우리 회의실도 사람 꽤나 북적북적하네요.”

회의실에 앉아있는 열 명 정도의 인원을 확인한 우진은, 뿌듯한 표정이 되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우진의 옆자리인 진태가, 웃으며 얘기했다.

“다음 달부터는 아마 다섯 명 정도 더 늘어날 겁니다, 대표님.”

“괜찮은 사람들로 뽑혔나요?”

“네. 다들 의욕도 있고, 경력도 좋고……. 신입도 둘 정도 있는데, 확실히 괜찮은 사람들로 뽑힌 것 같아요.”

방금 전까지 편하게 대화하던 우진과 진태는 서로 존댓말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대화는 무척 자연스러웠다.

물론 처음부터 자연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처음 진태가 직원들 앞에서는 존대해야 한다며 대표님이라 부를 때는, 우진도 몹시 어색했었으니까.

하지만 지나고 보니, 회사를 키워나가야 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진태의 이야기가 맞다는 것을 우진은 최근 들어 느끼고 있었다.

우진의 실제 정신연령이 어떻든 지금 스물두 살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진태가 업무 중에 우진을 편하게 대한다면, 직원들도 무의식중에 우진이 어리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됐을 터였다.

하지만 항상 직원이 있을 때는 깍듯하게 대해 준 진태 덕분에, WJ 스튜디오의 직원들은 누구도 우진이 어리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진은 WJ 스튜디오의 직원들에게, 능력 좋은 대표님일 뿐이었다.

“다들 오늘 회의 안건은 잘 알고 계시죠?”

“네, 대표님!”

“물론입니다!”

다들 초롱초롱한 눈으로 우진을 바라보았고, 우진은 들고 들어온 도안들을 직원들에게 나눠주었다.

도면은 당연히 전부 같은 것이었고, 그 구석에는 <청담 선영아파트 재건축 설계>라는 프로젝트 네임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회의가 시작되자, 우진의 눈빛은 그 어느 때 보다 날카로워졌다.

소연이나 제이든과 농담 따먹기를 할 때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제가 지난주에도 회의 때 말씀드렸지만……. 저희가 이번에 제안해야 할 설계는, 말 그대로 고급화의 끝이어야 합니다.”

지금 시점에서 우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프로젝트.

그리고 성공시킬 수만 있다면.

WJ 스튜디오의 설계․시공 파트를, 한 단계 껑충 성장시켜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커다란 프로젝트.

오늘 WJ 스튜디오의 회의에서 다뤄질 것은, 바로 재건축될 청담 선영아파트의 설계와 디자인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우진이 진태를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김 실장님.”

“예, 대표님.”

“아파트의 고급화를 생각할 때, 가장 크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진의 말에 진태는 잠시 생각에 잠겼고, 다른 직원들도 각자 골똘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들에게, 진짜 완벽한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 WJ 스튜디오 시공 파트의 직원들은 현장업무에 특화된 인원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디자인이나 설계의 방향성에 대한 부분들은, 거의 우진의 디렉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것은 진태라고 해서 다른 직원들과 다를 게 없었고.

해서 진태의 대답이 나오기 전에, 우진의 말이 먼저 이어졌다.

“물론 고급화라는 카테고리 안에 들어갈 키워드는 수없이 많습니다.”

“주거의 고급화를 위해선, 생각해야 할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 대부분의 것을 아우를 수 있는 두 가지의 단어가. 바로 ‘배려’와 ‘과시’라고 생각합니다.”

우진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회의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의 말에 담긴 내용들에 대해 생각이 필요하기도 했으며, 어떤 말이 이어질지 궁금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잠시 말을 멈춘 우진은, 직원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우진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한 표정인 직원도 있었으며, 어렵다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는 사람도 있었다.

우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일단 ‘배려’라는 키워드부터 한번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건 제가 일전에 클리오 브랜드 홍보관 시공 때도 언급했던 적 있는 말인데…….”

우진은 탁자 위에 올려 있던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홀짝였다.

“고급화. 그러니까 ‘프리미엄화’라는 것은 결국. 유저가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것까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과도한 배려들이 담긴 설계는, 유저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회의실의 분위기는, 점점 더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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