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93화 (93/315)

93화

첫 방영

일요일 저녁의 호프집은, 꽤나 한산한 편이었다.

월요일에 수업이 없는 대학생이라던가. 혹은 하루 앞으로 다가온 월요일을 격렬히 부정하고 싶은, 미몽에 빠진 사람들이라던가.

그런 일부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일요일 저녁은 술을 마시기에 그리 좋은 시기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K대학교 영상디자인과의 1학년 학생인 세영은, 그중 월요일이 공강인 케이스였다.

“역시, 공강은 월공강이 꿀이지!”

“목요일엔 금공강이 부럽다며.”

“어쨌든! 금요일이나 월요일이나. 주말에 붙어있는 공강이 꿀인 것이야.”

쨍-!

오랜만에 학교 인근 맥주집에서 친구들과 만난 세영은, 기분 좋게 맥주잔을 부딪치며 안주로 나온 코다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남들 다 일할 때 노는 것이 두 배는 즐거운 휴식인 법.

결국 조삼모사나 다름없는 이야기였지만, 세영은 행복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캬-!”

“세영이 너 요즘 왜 이렇게 보기가 힘들어?”

“그야, 바쁘니까 그렇지…….”

“아직 시험 기간도 아닌데, 바쁠 일이 있어?”

“그러니까 말이야. 세영이는 왜 이렇게 학교에서 사는 거야?”

“맞아. 술집도 굳이, K대 앞으로 골라서 오라고 하고.”

“디자인과가 원래 그래.”

“슬픈 얘기군.”

“술맛 떨어지게, 자꾸 학교 얘기할래?”

학교 앞에 모인 친구들 중, K대 디자인학부에 다니는 사람은 세영뿐이었다.

다른 친구 중에도 K대학생이 하나 있긴 했지만, 그녀의 전공은 일반적인 인문계열.

디자인학부와 일반 인문계 사이에는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괴리감이 존재했기에, 친구들이 세영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 이번 겨울에 다 같이 여행 가기로 했잖아.”

“맞아, 맞아.”

“수다는 조금 있다가 떨고, 그거 계획부터 먼저 세우는 게 어때?”

“옳소. 이러다가 오늘도 또 아무 계획 못 세우고 흩어지면, 겨울 계획은 완전히 나가리야, 나가리!”

이미 작년 겨울, 올해 여름까지.

단 한 번도 여행계획을 성공시킨 적 없는 그녀들이었지만, 오늘도 신나서 코다리를 뜯으며 계획을 짜기 시작하였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그녀들은, 친구들끼리만의 여행에 어떤 로망이 있을 만한 시기였다.

그런데 한참을 비현실적인 여행계획에 열을 올리던 세영의 눈에.

문득 조금 전부터 아무 말 없이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친구 인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이 무리 안에서 유일하게 자신과 같은 K대학교에 재학 중인 친구였다.

“야, 인영! 뭐해?”

“아, 어어. 응?”

세영의 부름에도 멍한 표정으로 계속 어딘가를 응시하던 인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며 대답하였다.

“지금 여행계획 짜는데, 너 혼자 뭘 보고 있는 거야?”

“아, 그게…….”

인영은 멋쩍은 표정이 되어,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방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무 생각 없이 잠깐 TV 봤다가, 예능이 너무 재밌어서 계속 보고 있었어.”

“예능?”

이번에 대답한 것은, 세영이 아닌 다른 친구였다.

세영과 인영의 대화에 호기심이 생긴 것인지, 친구 다섯 명은 전부 TV를 향해 시선을 돌린 상태였다.

“저거, 무슨 예능인데?”

“우리 집에 왜 왔니?”

“뭐지? 제목 좀 신선한데?”

방금 전까지 진지하게(?) 여행계획을 짜고 있던 사람들이 맞는지, 소녀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예능으로 넘어와 버렸고.

먼저 그 예능을 보고 있던 인영이, 신이 나서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이거 오늘이 첫 방인가 봐.”

“우와, 그래?”

“아직 정확히 뭐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윤재엽 진짜 개 웃겨. 대박.”

떠오르는 예능의 블루칩인 윤재엽의 등장만으로도, 소녀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한 소스였다.

때문에 그녀들은 어느새 집중해서 예능을 시청하기 시작했고, 갈수록 점점 더 빠져들었다.

“오, 윤재엽 압구정 살았어?”

“우와, 저기 인영이네 바로 옆집이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최소 두 블록은 차이 나겠고만.”

“그 정도면 옆집이지. 지구촌이 얼마나 넓은데.”

“헛소리 마셔, 유세영.”

“맞아. 이상한 소리 할 거면 조용히 좀 해. 소리 안 들리잖아.”

호프집은 평소보다 훨씬 조용한 편이었다.

애초에 손님이 많지 않기도 했지만.

몇몇 테이블을 채운 손님들도 전부 TV를 시청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세영은, <우리 집에 왜 왔니>라는 이 예능이 꽤 재밌나보다 생각하였다.

호프집 한쪽 벽면에 보기 좋게 스크린 TV가 설치되어 있기도 했지만, 예능이 재미없었다면 벌써 다들 관심을 돌렸을 게 분명하였으니 말이다.

“와, 윤재엽 집 엄청 넓어.”

“50평대라잖아.”

<우리 집에 왜 왔니> 시즌1의 첫 장면은, 바로 메인MC인 윤재엽의 집이었다.

압구정동의 낡은 대형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그의 집에, 유리아가 놀러 가는 장면이 1회분에 방영되는 첫 장면이었던 것이다.

[와, 오빠. 집 진짜 잘해놨네.]

[다 쓰러져 가는 집에, 이렇게라도 해 놔야 덜 우울하지.]

그리고 윤재엽의 집값이 떨어진 것은, 사실 첫 장면부터 그가 써먹은 개그 소재였다. 조금 슬프게도 말이다.

[뭐야. 갑자기 표정 왜 그렇게 침울해.]

[이 집, 사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갑자기……?]

[야, 네가 떨어진 집값을 마주한 하우스푸어의 심정을 알아?]

물론 재엽과 리아의 케미가 상황이나 개그와 잘 맞아떨어졌기에, 시청 중이던 호프집 손님들은 다들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뭐야, 윤재엽 자학개그 왜 이렇게 웃긴 데?”

“아니 왜 예능까지 나와서 자기 집값 떨어진 걸 홍보하고 있냐고.”

하지만 재엽의 집이 배경이 된 그 장면 자체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재엽과 유리아의 잡담에 이어 가벼운 집 소개로 금세 첫 씬이 마무리되었고.

두 사람이 한 팀이라는 것을 제작진에게 듣게 됨과 동시에, 바로 미션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것은 바로, 제작진이 섭외한 몇몇 전문가들의 명단과 함께.(명단은 시청자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을 팀원으로 섭외하라는 미션.

해서 그다음에 곧바로 이어진 장면이, 어느 설계사무소를 찾은 윤재엽과 유리아의 모습이었다.

명단으로 받은 전문가들 중 두 사람 모두 이름을 알고 있던 유학파 인테리어 전문가 김기성이 있었고.

그 김기성의 설계사무소에, 윤재엽과 유리아가 찾아간 것이다.

[선생님 사무실, 여기 맞지?]

[그렇대도? 내가 확실히 검색했어. 들어가 보자.]

하지만 두 사람은 거기서, 김기성을 섭외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윤재엽의 상대팀인 MC박두영이, 이미 김기성의 사무실에 먼저 와 그를 섭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 두영이 형! 뭐 이렇게 행동이 빨라?]

[내가 날렵한 게 아니고, 재엽이 네가 배가 부른 거지.]

[뭐?]

[여튼, 이미 김 쌤은 내가 침 발랐어. 그러니까 다른 데 알아보셔!]

물론 이것은 전부 대본에 의한 전개지만, 윤재엽은 크게 실망하며 우울한 표정으로 유리아와 함께 고민한다.

김기성은 이미 대중에 알려져 있을 만큼 유명한 인기 디자이너였고.

그래서 윤재엽과 박두영이 경쟁적으로 그를 섭외하려 했던 구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둘이 카페에 앉아, 고민하던 그때.

돌연 유리아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한다.

[어? 수하 언니! 웬일이에요?]

유리아에게 갑자기 걸려온 전화는, 다름 아닌 임수하로부터 온 것.

한창 집중해서 시청 중이던 세영의 친구 중 한 명이, 반색하며 아는 척을 시작하였다.

“우와! 임수하 배우님이 나온다고? 예능에?”

“그게 누군데?”

“있어. 내가 진짜 좋아하는 영화배우.”

“이름 보면, 여배우?”

“맞아. 연기 진짜 잘하고, 얼굴도 짱 예쁜 배우님!”

소녀들은 다시 TV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스크린에선 리아와 수하의 통화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단 처음 통화내용은, 수하가 재엽팀에 합류한다는 이야기.

그런데 잠시 후, 수하가 추천할 만한 전문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집중해서 보던 세영과 친구들은,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통화내용 안에, 그녀들이 너무 잘 아는 키워드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언니, 그래서 어디로 가면 그분을 찾을 수 있는데?]

[K대 캠퍼스?]

[응? 거기 대학교잖아?]

[나도 더는 잘 몰라.]

[왜! 지인이라며!]

[지인이긴 한데, 그냥 아주 조금 아는 정도라서. 사실 K대 가면 만날 수 있을 거란 것도, 제작진이 알려준 거야.]

지금 그녀들이 TV를 보고 있는 이 호프집이 애초에 K대 인근에 있는 술집이었고.

다섯 명의 무리 중 두 명이나 K대의 신입생이었으니.

생각지도 못했던 K대의 언급에,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박! K대래!”

“미친! 얼마 전에 디자인학부에서 찍었다는 예능이, 이거였구나!”

K대라는 단어에 호기심과 기대감이 충만해진 세영과 친구들은, 더욱 집중해서 스크린을 시청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바로 이어진 씬이 리아와 재엽이 K대의 캠퍼스로 향하는 장면이었으니.

그녀들은 더욱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세영이 너, 혹시 찍힌 거 아냐?”

“그건 아닐 거야. 방학 때 촬영 팀 왔다 갔다는 얘길 들었는데, 난 방학 시즌에 절대 학교에 가지 않거든.”

“저 날은 좀 가지 그랬냐.”

“그러게. 흑흑.”

그녀들이 신이 나서 떠드는 동안, <우리 집에 왜 왔니>는 더욱 흥미롭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재엽과 리아를 알아보고 우르르 몰려드는 인파를 뚫으면서.

두 사람은 ‘우진’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인테리어 전문가라고 했으니까, 건축과에 있겠지?]

[아냐, 오빠. 디자인과에 있을지도 몰라. K대는 디자인학부가 유명하거든.]

K대 디자인학부가 유명하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띠는 세영.

그런 그녀의 표정을 발견한 친구들이, 실실 웃으며 놀리기 시작하였다.

“쟤 썩소 짓는 것 봐.”

“좋댄다, 유세영.”

하지만 친구들이 비난하던 말던, 세영은 더욱 예능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그 ‘우진’이라는 사람이, 디자인학부 어디에서 나타날지 몹시 궁금했으니 말이다.

‘인테리어가 컨텐츠인 것 같으니까……. 우진이라는 사람은 공간디자인과에 있겠지? 혜진이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면 알려나?’

그런데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그때.

세영은 문득,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우진’이라는 이름이, 뭔가 낯익게 느껴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뭐지? 난 공디쪽 수업 들은 적이 없는데……. 우진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봤더라? 그냥 흔한 이름이라 그런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떠오르는 건 없었고, 그러는 사이 예능 속의 재엽과 리아는 디자인학부 건물을 이 잡듯 뒤지고 있었다.

물론 계속해서, 허탕을 치고 있었지만 말이다.

[우, 우와! 리아 언니다!]

[대박! 어떡해! 재엽 오빠도 있어!]

[하, 하하. 안녕하세요, 사실 저희가 지금 <우리 집에 왜 왔니>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촬영 중인데요.]

[오와……! 예능 재밌겠다!]

[지금 저희가 사람을 좀 찾고 있거든요.]

[사람이요?]

[혹시 두 분, 디자인학부 학생이신가요?]

[네, 언니! 맞아요! 저희 디자인과 2학년이에요!]

재엽과 리아가 계속 허탕만 치는 이유는 간단했다.

물론 대본과 설정의 일환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K대에서 ‘교수 서우진’을 찾았던 것.

[그럼 혹시……. 서우진 교수님 혹시 아세요?]

[음, 아……뇨? 혹시 어떤 과 교수님이신데요?]

[리아 바보야. 디자인 학부 안에도 과가 엄청 많잖아. 그걸 먼저 물어봐야지.]

[아, 맞다!]

그리고 이때 까지만 해도, 세영 또한 서우진 교수가 누군지 계속해서 골똘히 고민 중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이 이어진 순간.

세영은 너무 당황하여 뒤로 자빠질 뻔하였다.

‘우진’을 찾던 재엽과 리아는 결국 공간디자인과의 교수님 하나를 찾아 질문하기에 이르렀고.

[하하하. 두 분께서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군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설마 서우진 선생님이, 공간디자인과의 교수님도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자신을 공간디자인과의 학과장이라 소개한 ‘윤치형’ 교수로부터, 드디어 우진이라는 전문가의 정체가 밝혀졌으니 말이다.

서글서글한 눈매의 호남형인 윤치형 교수는, 껄껄 웃으며 우진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으며…….

[우진이가 저희 과 소속인 건 맞는데……. 교수는 아니니 말입니다.]

[그럼……?]

[우진이는 자랑스러운 저희 과, 10학번 신입생이지요.]

[시, 신입생이요?]

[아마 저희 과에서 요즘, 가장 유명인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하핫.]

그 말을 들은 순간, 세영은 OT 날 아침 혜진과 함께 지하철에서 만났던, 한 명의 신입생이 떠오른 것이다.

‘그래, 왠지 익숙한 이름이다 했더니!’

K대에서의 촬영씬은 여기서 마무리되었고, 다시 카메라 시점은 ‘두영’팀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세영은 꽤 큰 충격을 받은 것인지, 잠시 멍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잠깐. 나, 당장 전화 좀 해봐야겠어.”

“야, 어디가 유세영!”

“혜진이랑 통화 좀 하고 올게.”

“갑자기?”

“저 서우진이라는 사람, 누군지 알 것 같단 말이야!”

예능 자체가 너무 재밌어서 다 같이 몰입해서 보고 있던 세영의 친구들도, 우진을 알 것 같다는 그녀의 말에 적잖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정말?”

“오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예능에서 눈을 떼지 못한 그녀들은 다시 TV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세영이 혜진과 통화하러 나간 사이, <우리 집에 왜 왔니>의 첫 방영은 마무리되었다.

1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재엽과 리아가 우진이 있다는 현장으로 향하는 장면.

그리고 2화의 내용이 맛보기로 나오는 예고편이 바로, 수하와 우진을 포함한 네 사람이 전부 모이는, ‘카페 프레스코’ 씬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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