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기회는 어디에서나 찾아온다.
우진의 오늘 마지막 일정이었던 석중과의 미팅은, 카페 프레스코가 아닌 석중의 사무실에서 진행되었다.
미팅의 주요 안건은, 드디어 조율이 끝난 인테리어 공사 장기계약에 관한 건.
가맹점 인테리어 공사를 위한 최종 계약서에 오늘 사인을 할 예정이었던 데다.
잡다한 부속계약서도 꼼꼼하게 검토해야 했으니, 카페에서 진행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던 중요한 미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우진과 석중의 대화는, 사전에 정해뒀던 주제와 조금 다른 내용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리아 씨한테 이렇게 제안했다는 말이지?”
“네, 형님.”
우진의 대답에, 석중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리아 씨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셨고?”
“예. 그러니까 이렇게 제가 얘길 꺼내죠.”
“으음…….”
생각에 잠긴 석중을 향해, 우진이 살짝 힘주어 이야기했다.
“형님, 이거. 아무리 봐도 남는 장사예요.”
우진이 먼저 꺼낸 이야기는 바로.
낮에 우진이 리아에게 제안했던, 그녀의 가맹점 유치에 관한 건.
“흠. 확실히 가맹 수수료를 받지 않는 정도로 리아 씨의 유명세를 빌릴 수 있다면……. 남는 장사인 것 같긴 한데…….”
이 또한 가맹점과 관련된 이야기였으니, 본격적인 계약조율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 맞았고.
그래서 우진이 먼저 이 이야기부터 꺼내게 된 것이었다.
“그냥 남는 장사가 아니죠. 오픈 날에 리아 씨 포스팅 한 방에, 사람 몰린 거 보셨잖아요.”
그리고 석중에게 던지는 우진의 제안은, 낮에 리아에게 이야기했던 것보다 한층 더 구체적으로 발전되어 있었다.
연예인인 리아와 달리 석중은 사업가였고.
그에게는 좀 더 명확한 이야기를 해야, 제안에 매력을 느낄 테니 말이다.
우진의 제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우선 리아는 카페 프레스코에서, 리아의 건물에 대대적으로 2호점을 런칭 했다는 사실을 마케팅에 활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다.
“사실 리아 씨 개인 홈페이지부터 시작해서 일거수일투족이 다 광고판이잖아요?”
“그렇지.”
“해서 리아 씨가 떡밥만 좀 뿌려주면, 우린 그걸 주워 담으면 되는 거예요.”
“어떻게?”
“뭐 기사화된 내용들을 은근히 마케팅에 사용한다거나……. 방법이야 많죠.”
그리고 석중은 그 대가로, 가맹 수수료 없이 그녀의 건물에 카페 프레스코 2호점을 내어준다.
수수료가 없다는 말이, 인테리어 공사비용이나 원료값을 안 받는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본래 가맹점은 영업이익의 n퍼센트를 수수료로 지불해야 하는데, 그 비율을 받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그럼 난 리아 씨의 가맹점에서는, 계속해서 가맹료를 받지 않는 건가?”
“그건 아니에요.”
“음?”
“당연히 계약 기간은 명시해야죠.”
“어떤 식으로?”
“제가 볼 때 한 1~2년 단위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첫 번째 계약이 끝날쯤, 리아 씨를 정식으로 광고모델로 모셔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호.”
“그러면서 모델료를 조금 싸게 지불하고, 대신 가맹 수수료 무료 계약을 더 연장해 드리는 방식으로 가는 거죠.”
“그거 괜찮네.”
우진이 볼 때 이 제안은, 양쪽 모두에게 윈-윈 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양쪽 다 실질적으로는 손해 봐야 하는 부분이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리아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가로수길에 건물을 샀고, 거기에 카페를 차렸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해서 이미지에 흠이 될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반대로 석중의 입장에선, 어차피 가맹점을 내지 않았다면 없었을 수수료 추가 수입을 받지 않는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우진이 계약 기간이라는 괜찮은 솔루션도 던져줬으니.
석중은 더더욱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식으로 모델계약을 하기 전까진, 리아 씨의 사진이나 관련 이미지 같은 걸 대놓고 쓰는 건 안 될 거예요.”
“그야 당연하지.”
“하지만 말씀드렸듯 간접적인 협조만 받을 수 있어도, 효과는 아마 상당할 거예요. 이미 아시다시피, 리아 씨는 <우리 집에 왜 왔니>에도 출연하니까요.”
석중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우진의 꾐에 넘어가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손해 볼 게 전혀 없는 제안이었다.
“좋아. 그럼 구체적인 논의는, 다음에 미팅을 한 번 더 잡아서 얘기하도록 하자.”
“좋습니다, 형님. 그런 의미에서 오늘 논의하려고 했던 2호점에 대한 이야기는, 3호점으로 바꾸는 게 어떨까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가로수길에 있는 리아 씨의 건물에 입점할 매장이, 2호점이 되는 게 여러모로 그림에도 좋으니 말이죠.”
“하하. 그 부분까진 생각 못 했네. 좋아, 그거야 뭐 어려운 부분도 아니지.”
리아와 관련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레 원래 미팅 건으로 넘어갔다.
우진은 준비해 왔던 서류들을 본격적으로 꺼내며 새 매장에 적용할 디자인과 인테리어 패키지에 대해 설명했으며, 석중은 진중한 표정으로 그 브리핑을 꼼꼼히 검수하였다.
“두 번째 매장은……. 아니, 세 번째 매장은 1호점과 달리 부지는 50평 정도로 작고 층수가 3층까지 있는 구조로 가니까……. 필연적으로 공간배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어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1호점에선 1층 센터에 뒀던 그 커피와 관련된 디피들이, 이번 매장에서는 좌측면에 일관성 있게 배치될 예정이에요.”
“로스팅 기계들은?”
“어쩔 수 없이 규모 자체는 좀 줄여야죠. 넓이가 차이나니…….”
원래 한 시간 정도로 예정되어 있던 미팅은, 여러 가지 첨가된 내용들 때문에 거의 세 시간 정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제가 리아 씨 건물부지랑 리모델링 계획에 대해 조금 들었는데, 형님께서 구해두신 3호점 건물이랑 거의 조건이 흡사해요.”
“그래?”
“이번에 패키지 잘 짜서 비슷하게 디자인하면, 인테리어 비용도 많이 아낄 수 있을 거예요.”
“디자인을 비슷하게 한다고 비용이 절약돼?”
“규모의 경제죠 뭐. 자재를 떼 올 때, 한 번에 더 크게 떼어올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진은, 기대했던 대부분의 것을 얻어낼 수 있었다.
“좋아. 오늘은 이 정도면 된 것 같아.”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아냐. 내가 우진이 너한테 매번 고맙지.”
우진이 생각했던 대부분의 디자인 컨셉을 관철시켰으며, 리아와의 콜라보도 거의 확답을 받은 셈이었으니까.
때문에 석중과 헤어져 주차장으로 향하는 우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카페 프레스코를 나설 수 있었다.
‘원래 석중 형님이 얘기하셨던 2호점만 해도 꿀인데, 리아 누나 건물까지 한 번에 진행되면……. 매출이 더블이네.’
아마 이번 가맹점 오픈이 성공하면, 그다음부터 카페 프레스코의 확장은 훨씬 더 가속화될 것이다.
이번에 석중이 소심하게(?) 한 곳만 계획했던 이유는, 이것이 첫 가맹점 오픈이기 때문이었으니까.
물론 1호점이 성공했지만, 그것이 꼭 가맹점의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프랜차이징(Franchising) 프로세스가 제대로 체계화되지 않는다면, 1호점이 아무리 잘 나가도 가맹점은 실패할 테니까.
하지만 이 첫 시도가 성공으로 이어져서 프로세스가 확립된 뒤라면.
석중은 훨씬 더 과감하게 매장을 늘릴 생각을 할 것이다.
애초에 자본도 충분한 인물이다 보니, 직접 건물이나 상가를 임대해서 직영점을 차리려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우진은 훌륭한 캐시 카우가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 이제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었으니, 변수는 없다고 봐도 되고…….’
한층 가벼워진 우진의 발걸음이, 다시 카페 프레스코를 향했다.
오늘. 이제 우진에게 남은 유일한 고민은, 소연과 함께 어떤 맛있는 고기를 먹은 뒤 귀가할 것이냐는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 * *
10월은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예민한 시기다.
바로 다음 달인 11월.
보통은 셋째 주 목요일.
모든 수험생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수능 날이, 바로 한 달 앞으로 다가오는 달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대학입시에 손을 완전히 놓은 일부 학생들에겐 별 의미 없는 행사였지만.
적어도 반에서 1등. 전교에서도 항상 10위권을 유지하는 모범생인 가연에겐, 올해 있는 그 어떤 날보다 중요한 날이 바로 수능 날이라 할 수 있었다.
“휴우, 피곤해.”
그래서 일요일인 오늘도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독서실에 있던 가연은, 거의 9시가 다 되어서야 주섬주섬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언니 소연이 치킨을 사다 놓고 기다리겠다고 한 날이었으니, 조금 더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운 가연이었다.
독서실에서 집까지는 설렁설렁 걸어도 5분 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기에.
“치킨……. 눈꽃치킨…….”
열심히 치킨 주문을 외는 동안, 그녀는 금세 아파트 1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띵-!
그리고 20년이 넘은 낡은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서는, 방금 다녀간 게 분명한 아름다운 치느님의 잔향이 남아있었다.
‘우리 집이겠지?’
절로 침샘을 자극하는 그 냄새에, 가연은 후다닥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번호키를 눌렀다.
띠띠띠- 띠- 띠링-!
순식간에 비밀번호를 누르자 현관문이 열렸고.
집안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는, 다행히 그녀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이얏! 언니 왔어?”
가연이 집에 도착하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반갑게 그녀를 맞아주는 귀여운 막내.
“그래, 왔다.”
“요! 이제 가연 언니 왔으니까, 치킨 먹어도 되지 소연쓰?”
그리고 안쪽에서는, 언니 소연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연쓰가 뭐냐, 언니한테.”
“친근함의 표현이야.”
“됐다. 치킨이나 뜯어라.”
아무래도 언니를 오매불망 기다린 이유는 조금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가연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한 가지. 조금 불안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야, 한아연. 언니 옷 갈아입기 전에 다 먹어버리면 안 된다?”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며 얘기하는 가연의 목소리에, 아연 대신 다시 소연이 대답하였다.
“걱정 마, 한가연. 오늘은 세 마리 시켰으니까.”
그리고 치킨이 세 마리라는 이야기에, 가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정말이야?”
“너희 둘이 달려들면 두 마리 그냥 사라지니까. 나도 좀 먹어야 할 것 아냐.”
“아, 세 마리면 살찌는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느새 입꼬리가 귀에 걸린 가연.
그런 동생을 보며, 소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여리여리한 체구에 이런 식탐이 있다고는, 모르는 사람은 아마 상상하기 힘들 것이었다.
물론 가연의 식탐은, 치킨에만 한정되지만 말이다.
“치킨이 세 마리인 거랑, 살찌는 게 무슨 연관이 있어? 그냥 적당히 먹고 남기면 되지.”
소연의 핀잔에, 가연은 옷을 갈아입는 와중에도 흥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치킨을 남긴다고? 그럴 순 없어, 언니.”
이미 치킨을 뜯고 있던 아연도, 한 마디 덧붙였다.
“맞아, 큰언니. 그건 범죄야. 범죄라고.”
삼 형제도 아니고 세 자매가 사는 집구석에, 치킨을 세 마리나 시켜야 한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지.
소연은 한숨을 푹 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알겠어. 많이들 먹어라, 어휴.”
하지만 겉으로만 그런 것일 뿐.
소연은 한편으로 뿌듯하기도 했다.
오늘 주문한 치킨은, 아버지께 양육비로 받은 돈이 아닌, 그녀가 벌어서 모은 돈으로 시킨 것이었으니까.
‘이것들 먹여 살리려면, 내가 더 열심히 일해야지.’
두 동생들을 한 번씩 번갈아 흘겨본 소연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발끝으로 리모컨을 눌렀다.
“아, 큰언니 진짜. 더럽게 발가락으로 뭐 하는 거야?”
“괜찮아. 깨끗이 씻었어.”
“으, 저질.”
이어서 발가락으로 리모컨을 슥 끌어온 뒤, 손으로 집어 들어 채널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평소에는 TV를 그렇게 즐겨보지 않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봐야 할 프로가 하나 있었다.
그 때문에 일부러 딱 9시쯤, 치킨을 시켜놓은 것이고 말이다.
집구석에서 TV를 마음 놓고 보려면, 수험생인 가연의 입에 치킨을 물려놓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디 보자. KBC라고 했지?’
소연이 채널을 옮겨 KBC를 틀자, 아연이 치킨을 우물거리며 관심을 보인다.
“우움, 언늬! 오눌 KBC에서 뭐 해?”
“다 먹고 말해 다 먹고.”
TV에서는 광고가 나오고 있었지만, 한쪽 구석에는 곧 방영될 프로의 로고가 떠올라 있었다.
<우리 집에 왜 왔니>라는, 캐주얼한 폰트가 새겨진 발랄한 로고.
그 로고를 확인한 아연이, 이번에는 콜라를 마시며 아는 척을 하였다.
“아! 나 저거 알아!”
“그래?”
사실 오늘 갑자기 소연이 TV를 챙겨보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우리 집에 왜 왔니>의 첫 방영분에, 그녀가 매일같이 등하교하는 K대. 그것도 디자인학부 건물이 등장한다는 소문.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우진이 이 <우리 집에 왜 왔니>에 고정 패널로 출연한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이유는.
평소 예능에 관심도 없던 소연이 본방 사수를 하게 만들 만큼, 충분히 흥미로운 것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거 윤재엽 나온다는 새 예능이잖아.”
“오, 유명해?”
소연의 눈이 살짝 반짝였다.
우진과 함께 출연한다는 예쁜 연예인들은 좀 거슬렸지만.
그래도 기왕 우진이 출연하게 된 방송이라면, 인지도 있는 방송이었으면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연의 은근한 질문에, 아연은 콜라를 먹다 말고 한숨부터 푹 쉬었다.
“아, 진짜. 언니 왜 이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워?”
“……이 예능 모르면, 세상 물정에 어두운 거야?”
“당연하지! 대충 인터넷 서핑만 조금 해도, 하루에 두세 번은 저 예능 광고 뜨던데.”
“오호, 그래?”
막내동생의 이야기에, 소연은 조금 더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호기심으로 본방 사수를 생각했다면.
이제는 그 호기심이, 좀 더 기대감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우진 오빠는 대체 예능에 나와서, 뭘 한다는 거지?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도 하나?’
그리고 소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우리 집에 왜 왔니> 첫 방송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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