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91화 (91/315)

91화

기회는 어디에서나 찾아온다.

“뭐야, 아는 친구야?”

“네, 형. 친한 과 동기인데……. 얘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네요.”

우진은 정말 반가운 표정으로, 소연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자 조금 떨어져 있던 재엽을 비롯한 일행들도, 자연스레 그녀의 앞에 다가섰다.

물론 갑작스런 상황에, 소연은 더욱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되었지만 말이다.

“이야, 우진이 너. 여자친구 아니야? 엄청 예쁘신데?”

“아, 형!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소문 나면, 저 얘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요.”

소연이 자리 잡고 앉았던 곳은 인적이 드문 구석진 곳이었고.

때문에 연예인들이 나타났음에도, 딱히 손님들의 관심이 모이지는 않았다.

물론 재엽과 수하는 캡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리아는 박스 핏 후드티에 달린 커다란 모자로, 얼굴까지 반쯤 가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 안녕하세요! 그……. 윤재엽 씨 맞죠?”

소연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자, 재엽이 밝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와우! 미녀가 알아봐 주시니, 이거 기분 엄청 좋은데요.”

옆에 있던 리아가, 재엽에게 핀잔을 주며 다가왔다.

“진짜, 오빠! 자꾸 아재 티 낼래?”

재엽은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왜! 내가 뭐 했다고!”

“말투가 아재잖아, 말투가!”

뒤늦게 다가온 수하도, 리아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무슨 80년대 작업 멘트도 아니고…….”

“어우 씨. 작업은 무슨! 내가 막내 여자친구한테 작업 칠 정도로 나쁜 놈으로 보여?”

“아, 형! 좀!”

세 연예인의 정신없는 대화에, 소연은 더욱 혼미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 리아와 수하까지도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우진과 친한 친구라는 말 때문인지, 그녀들의 표정도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반가워요. 전 임수하라고 해요.”

“저도, 반가워요. 유리아예요. 그나저나 재엽 오빠 말처럼, 정말 엄청 예쁘시네요.”

“하, 하하……. 리아씨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전 우진 오빠 동기 한소연이라고 합니다.”

소연은 상황이 정신없으면서도, 무척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연예인들도 일반인들이랑, 다를 게 아무것도 없네.’

물론 임수하나 유리아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인사하고 대화 나누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었으니 말이다.

“나중에 한 번, 괜찮으면 우리 소속사 찾아와 봐요 소연 씨.”

“뭐야, 오빠. 작업 아니라며!”

“야, 이건 진짜 순수한 마음이야. 소연 씨 정도면……. 아이돌 하기는 좀 늦었지만, 배우 될 수도 있지 않겠냐?”

“연예인이 싫으실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그냥. 이건 제안일 뿐이야 제안!”

때문에 의외의 상황에 굳어있던 소연은, 금세 긴장을 풀고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긴장이 풀리자, 다시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소연의 시선은 어느새, 다시 우진을 향해 있었다.

‘그나저나 이 오빠는, 진짜 왜 그렇게 혼자서만 잘난 거야?’

소연은 이미 우진을, 학생의 범주에 놓지 않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런 기묘한 상황이 되자 새삼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약간의 씁쓸함도 느껴졌다.

최근 들어 우진과의 거리가, 조금 멀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으니 말이다.

‘칫. 이건 뭐, 질투할 수도 없고…….’

사실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은.

물리적인 거리가 가깝고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환경에서, 심리적인 거리도 가까워질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밤낮없이 함께 SPDC를 준비할 때에만 해도, 우진과 그 누구보다 가깝다 여겼던 소연은.

최근 들어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같은 과실로 등교하며 같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긴 하지만.

우진의 정신은 거의 사업에 가 있고, 평범한 새내기인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소연은 이런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학부생이 아닌, 완성된 디자이너였다면……. 오빠랑 좀 더 함께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학생이 아닌 어엿한 디자이너였다면.

그래서 우진이 나아가는 걸음을, 같이 밟아 나갈 수 있다면.

조금 더 마음 편히, 우진에게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항상 우진이 보고 싶다거나, 또는 그와 함께 있으면 설렌다거나.

조금 미묘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소연의 감정은 그런 종류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그냥 우진과 함께 있으면 편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함께하고 싶고.

그러지 못하기에, 조금은 서운하고.

그런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가슴속 한쪽 구석에 뒤엉켜 있을 뿐이었다.

물론 이제는 소연도 확실히 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우진은, 어느새 단단히 자리 잡아버렸음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진에게 이성으로서 먼저 다가갈 용기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가까운 사람을 여러 번 잃어보았고.

그 아픔을 더는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만약 그녀의 고백이 우진에게 부담으로 느껴진다면, 우진이라는 소중한 사람을 한 번 더 잃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떨 때 보면 진짜 둔하기가 나무토막 같은 인간인데……. 그게 오히려 안심될 때도 있다니까.’

자연스레 연예인들 사이에서 대화를 나누는 우진을 보며, 소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소연의 눈에 요즘 우진은, 완전히 일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가가기 힘들면서도, 또 그게 멋지다고 생각하는 자신은.

완전히 구제 불능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하아, 뭔가 쉽지 않네.’

그리고 소연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잠시 그녀 앞에서 떠들던 우진의 일행들은,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위해 걸음을 돌렸다.

“소연 씨, 오늘 반가웠어요!”

“아! 저야말로 정말…….”

“나중에 또 볼 기회가 있으면 뵙죠.”

“넵!”

“그럼 오늘은 이만……!”

재엽을 비롯한 세 사람은 저녁에 또다시 촬영 일정이 있었고, 때문에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우진은, 세 사람을 빠르게 배웅하고 다시 2층으로 올라왔다.

그에 소연은 반색했지만…….

“오빠 이제 일정 없어?”

“그…… 건 아니고. 이제 조금 뒤에 여기 대표님 만나야 해.”

곧 다시 서운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일 봐.”

“아, 진짜 시간 애매하네.”

“어차피 애들도 같이 왔어.”

“누구?”

“선빈이, 예영이, 은정이…….”

소연은 표정 관리를 한다고 했지만, 조금은 티가 났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기분을 느낀 것인지, 괜히 미안한 표정이 된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여덟 시엔 미팅 끝나거든?”

“그런데?”

“너만 괜찮으면, 애들 먼저 보내고 남아있을래?”

“왜?”

우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집 가는 길에, 내가 태워다 줄게.”

“오! 근데 그거로 끝?”

“음…….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저녁 약속은 아닌가 봐?”

“응, 그냥 완전히 비즈니스 미팅이야.”

“그럼, 콜!”

우진이랑 얘기하던 소연은, 순식간에 밝아진 자신의 기분을 깨닫고는 움찔하였다.

‘아, 진짜……. 나 왜 이러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운한 마음이 한가득이었는데.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말 한마디에, 그 모든 서운함이 눈 녹듯 스르르 사라져버렸으니 말이다.

“휴우.”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그럼 난……. 시간 다 돼서, 미팅 다녀올게!”

“그래.”

“조금 있다 봐! 애들한텐 나 만났다는 얘기 그냥 하지 말고.”

“알겠어.”

멀어지는 우진의 뒷모습을 보며, 소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일단은 그렇게, 우진의 곁에 남을 소연이었다.

* * *

예영과 은정이 음료와 디저트를 주문하는 동안, 선빈은 카페를 구석구석 쏘다니는 중이었다.

단순히 과제를 위한 조사 차원이 아니었다.

선빈은 이 ‘카페 프레스코’의 디자인에, 진심으로 감탄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와, 진짜……. 여기 너무 멋진데?’

흔해 빠진 엔틱 디자인의 카페들만 봐 왔던 선빈에게.

빈티지한 감성을 살리면서도, 오히려 엔틱 디자인보다 훨씬 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카페 프레스코의 디자인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학교 수업 시간에 매번 듣던, 빈티지 감성과 모더니즘 디자인의 콜라보를, 실제 공간에서 확인하는 느낌이랄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수업으로 들을 때는 답답하게 이해되지 않았던 디자인적 솔루션들이, 이 카페 프레스코의 공간을 보자 시원하게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대체 누가 디자인한 걸까? 해외 디자이너일까? 아니면 김기성 같은 스타 디자이너?’

어느새 노트를 펼쳐 든 선빈은. 공간구획부터 시작해서 디스플레이(Display)된 소품들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기록하며, 열정적으로 공간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2학기 내내 힘없이 축 쳐져 있던 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의욕적인 분위기.

그것은 건축 디자이너의 꿈을 처음 가졌던, 선빈의 초심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야, 선빈! 음료 다 나왔어.”

“어휴, 사람이 뭐 이리 많냐. 거의 20분은 기다린 것 같네.”

“아, 나왔어?”

“응. 이거 디저트 올라간 쟁반은, 네가 좀 들어줘.”

동기들이 부를 때까지 무아지경으로 공간을 기록하던 선빈은, 한층 업 된 기분으로 2층으로 향했다.

그런데 2층에서 기다리던 소연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뭐?!”

“언니, 그게 진짜예요?”

“우와! 엄청나!”

선빈은 다시 멍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누나. 여기 진짜……. 우진 형이 디자인했다고?”

“그렇다니까. 내가 뭐 하러 거짓말을 해. 우진 오빠 사무실에 제안서 있었는데, 그게 이제야 생각났어.”

근래 봤던 그 어떤 공간보다 선빈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며, 또 감탄스러웠던 이 카페 프레스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쟁상대로 생각했던 우진의 디자인이라는 사실은, 쉽사리 믿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 이 형은 진짜…….’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생기가 돌아왔던 선빈의 얼굴에서, 다시 영혼이 빠져나가는 일은 다행히도 없었다.

이렇게까지 순수하게 디자인에 감탄했던 공간이 우진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제 경쟁심 같은 것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진짜, 우진 오빠는……. 우리랑 같은 학년 맞아?”

“내 말이.”

“부럽다 진짜. 그 오빠는 솔직히 학교 안 다녀도 되는 것 아냐?”

동기들의 이야기를 듣던 선빈은, 저도 모르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물론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동기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쟤 뭐야?”

“왜 저래?”

“아까까진 거의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굴더니…….”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선빈이었다.

‘그래. 이 형은 그냥……. 처음부터 완성된 디자이너였던 거야. 내가 지금까지, 정말 쓸데없는 스트레스를 받았던 거였어.’

구체적으로 우진에 대한 어떤 생각을 바꾼 것은 아니었지만.

무의식중에 선빈의 마음속 우진이라는 존재는, ‘경쟁상대’에서 ‘목적점’으로 수정되었다.

사실 경쟁이 됐던 목표가 됐던.

우진을 바라보며 노력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그 두 단어는 비슷한 의미를 가지기도 했지만.

이것은 우진을 대하는 선빈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생각을 바꾸자 마음가짐이 달라졌고.

오랜만에 선빈의 마음속에서, 의욕이 솟구치기 시작하였다.

“자, 너희가 주문하는 동안, 여기. 공간분석 좀 해봤어.”

선빈이 내어놓은 아이디어 노트에, 다른 팀원들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우와앗!”

“좀비가 살아났다!”

“대박!”

각자 음료를 하나씩 집어 든 선빈과 학생들은, 오늘 여기까지 온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한 팀 회의를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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