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포맷 파괴자.
가장 먼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한 것은, 팀장인 소연이었다.
“응? 경기도?”
사실 K대 자체가 서울시에서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북서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경기도에 다다르건만.
평소에 갈 일이 잘 없는 지역이어서인지, 심리적 거리감이 꽤나 크게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예영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멀진 않으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언니. 종로3가에서 3호선 타면, 삼송역까지 한 방에 가니까.”
휴대폰 지하철 노선도를 확인한 팀원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K대에서 삼송역까지는,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다.
그 정도면 20대 초반 파릇파릇한 새내기들에게는, 별것 아닌 거리라고 할 수 있다.
일산에서 등하교하는 다른 팀원 하나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고양시 무시하지 마라! 우리 신도시거든!”
“신도시는 일산이 신도시겠지.”
“일산이 고양시 안에 있거든!”
팀원들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기다렸던 버스가 도착했고.
예영은 버스에 올라 카드를 찍으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오늘 답사 장소로 고른 위치가 마음에 드는지, 그녀는 뭔가 신난 표정이었다.
“이번에 그 삼송역 쪽에, 엄청 핫한 카페가 하나 생겼어. 그래서 오늘 답사는 거기로 가려는데……. 혹시 지원이 넌 알아?”
예영의 물음에, 고양시민 손지원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KBC 쪽에 엄청 큰 카페 하나 생겼다던데! 유리아 미니홈피에도 올라왔던!”
자신이 사는 동네 얘기가 나와서인지, 아니면 학교라는 이름을 빙자한 좀비 수용소를 벗어나서인지.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좀비 5호 손지원.
그런 그들의 대화에 호기심이 생긴 좀비 대장(?) 한소연이,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 유리아 미니홈피에도 올라왔던 카페야?”
대장의 관심이 반가웠는지, 좀비 5호는 신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언니! 그렇지 않아도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던 곳인데……. 대박! 예영이가 여길 찾아왔을 줄이야!”
학교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좀비들은 생기를 찾고 사람이 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전될 기미가 전혀 없는 좀비 2호 선빈도 있었지만.
존재감 없는 시체 하나 정도는, 대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름이 카페 프레스코였나?”
“맞아, 예영아. 그 이름이었어!”
어느새 선빈을 제외한 팀원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종로3가의 역사에 들어섰고.
마치 소풍하는 기분이 되어 3호선 열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지하철에 올라 지원과 예영의 대화를 듣던 소연은, 뭔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카페 프레스코? 왜 이렇게 이름이 낯익지?’
최근에 분명 서울조차 벗어난 적이 없는 소연이었건만.
고양시에 새로 지어졌다는 카페의 이름이, 왜 낯익게 느껴지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 * *
오늘 우진은, 오랜만에 바람을 쐬러 차를 몰고 나왔다.
물론 완전히 휴식을 위한 나들이는 아니었다.
최근 친해진 이들과의 친목 도모 목적도 있었지만, 중요한 미팅도 하나 잡혀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마음이 편한 건, 두 일정의 약속장소가 같은 곳이라는 사실.
후다닥 과제를 마치고 학교에서 차를 몰아 나온 우진은, 삼송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과제를 너무 대충했다는 약간의 죄책감이 가슴 한켠에 조금 남아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피티를 너무 대충 만든 것 같긴 한데……. 윤 교수님이 잘 봐주시길 빌어야지 뭐.’
오늘 제출인 ‘상업공간의 이해’과목의 담당 교수는, 공간디자인과의 학과장이기도 한 윤치형 교수.
말투는 거칠지만 잔정이 많은 윤 교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꽤나 인기 있는 좋은 교수님이었다.
하지만 물론 학점이 잘 안 나오면, 우진에게는 나쁜(?) 교수님이 될 예정이었다.
위이잉-!
목적지까지 5분 정도 남은 시점, 우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누나. 거의 다 왔어요.”
“금방 차 대고 들어갈 테니까, 음료 미리 시켜놔요.”
“난 아메리카노. 좀 연하게.”
“주문할 때는, 꼭 제 이름 대시구요!”
전화를 끊은 우진은, 삼송역 인근에 차를 대었다.
오늘 그의 약속장소는 ‘카페 프레스코’였지만, 카페 전용 주차장은 이미 만차일 게 분명했다.
오픈한 뒤 한 달도 더 지났건만, 카페 프레스코는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으니까.
오늘 그가 여기서 미팅이 있는 이유도, 카페 프레스코의 흥행 때문이고 말이다.
‘석중이 형님, 요즘 신나셨겠네.’
카페 프레스코의 대표 강석중은, 지난번 미팅 이후 우진과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먼저 제안한 사람은 석중.
우진은 그때 조금 놀랐었다.
삼촌뻘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차이인 석중이, 우진에게 먼저 편히 지내자는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우진의 입장에서도 재벌3세 인맥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기에, 사양 않고 곧바로 형님으로 부르기 시작했었다.
끼이익-
우진은 널찍한 공터에 만들어진 공영주차장에 차를 댄 뒤, 천천히 카페 프레스코를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아직 이 삼송역 인근은 낙후된 구도심 느낌의 슬럼가였지만, 우진은 이 동네의 미래를 아주 잘 안다.
2년만 지나면 얼마 전 공사를 시작한 삼송지구 택지개발사업*[토지를 활용하여 주택건설 및 주거생활이 가능한 주거지역을 조성하는 사업]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신축아파트들이 하나둘 들어서고.
2015년 이후에는, 소규모 신도시급으로 성장할 것임을 말이다.
‘2020년쯤엔, KBC신사옥의 건물 가치도……. 거의 열 배는 튀겨졌지 아마?’
하지만 그런 미래를 안다고 해서, 우진은 당장 이곳에 투자할 생각이 없었다.
삼송지구가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하는 것은 2016~17년 즈음의 일이고.
그전까지는 훨씬 매력적인 다른 투자처들이 널려있었으니 말이다.
‘제일 베스트는 사업 규모를 최대한 빠르게 키워서……. 15년쯤엔 택지 한곳 정도 입찰해서 따낼 수 있을 만큼 성장하는 거겠지.’
택지 한 구역 정도를 따내어 아파트 단지를 지어낼 수 있는 정도의 사업체가 되려면.
2010년을 기준으로 시공능력평가액이, 대략 5천억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제 매출총액이 10억 단위를 겨우 바라보고 있는 WJ 스튜디오에게는, 아직 머나먼 일.
하지만 우진은 그것을 결코 헛된 꿈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반년이 된 시점에서.
지금의 성과를 냈다는 것만 해도, 가능성은 충분히 증명한 것이었으니까.
원래 자본이라는 것은 커지면 커질수록, 불어나는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니까.
물론 자본을 굴리는 운전대를 유능한 사람이 잡았을 때의 이야기다.
삼송역 인근의 풍경을 보면서 우진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는 목적지였던 카페 프레스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페는 입구부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연면적이 수백 평이나 되는 카페임에도 빈자리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북적였다.
하지만 미리 주인장(?)에게 이야기를 해 놓은 우진은, 2층의 비즈니스 룸을 잡아놓았고.
그곳에서 이미 우진을 기다리는 일행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야, 이거. 막내가 어떻게 제일 늦는 거야?”
반가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윤재엽.
“수업 끝나자마자 거의 바로 왔다고요……. 그러니까 약속 조금만 더 늦게 잡자니깐.”
“히야. 수업이래. 파릇파릇하다 진짜.”
그리고 재엽에 이어 들려온 목소리들은, 다름 아닌 수하와 리아의 것이었다.
“우리 막내! 얼른 들어와. 음료는 조금 전에 나왔어.”
“야아, 이렇게 사적으로 보니까, 감회가 또 새롭네?”
오늘 우진이 친목 도모(?)를 위해 만나기로 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우리 집에 왜 왔니> 출연진들이었던 것이다.
* * *
꾸준함은 탁월함을 능가한다.
연예계에서 그 가장 좋은 예를 보여준 인물이, 바로 유리아였다.
10대 후반에 걸그룹으로 데뷔하여, 아무런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그룹이 해체되었지만.
홀로 연예계에 남아 거의 칠팔 년을 꾸준히 활동하여, 작년인 2009년. 스물여섯에 솔로 앨범 대박과 함께 탑스타로 떠오른 인물.
대중들은 실력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최상급 가수인 그녀가 왜 이제야 떴는지 의문을 가졌지만.
사실 연예계에서 예쁘고 실력 있는 가수들이 묻히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다만 유리아의 꾸준함과 노력이, 결국 기회를 잡아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이에 비해 연예계 짬밥이 무척이나 긴 그녀에게, 최근 무척이나 흥미로운 사람이 하나 생겼다.
지금껏 연예계 생활을 하며,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캐릭터.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가 바로 그 요주의 인물(?)이었다.
“누나, 이거 다 계산하신 건 아니죠?”
“응. 우진이 네 이름 댔더니, 공짜로 만들어 주더라.”
“다행이다. 이거 디저트만 봐도 5만 원은 넘을 것 같은데.”
“야, 막내. 너 지금 리아 무시하냐? 얘가 버는 돈이 얼만데 5만 원을 갖고 다행이라고…….”
“형. 리아 누나가 오만 원 안 써서 다행인 게 아니에요.”
“그럼?”
“제가 공짜로 생색낼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게 다행인 거죠.”
“…….”
당황하여 순간 말을 잃는 재엽을 보며, 리아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신박한 녀석이라니까.”
“우진이 너, 어디 대치동에 창의력 학원이라도 다니는 건 아니지?”
“대치동에도 그런 학원은 없어요, 형. 그리고 전 개포동 산다니까요? 자꾸 왜 대치래.”
“양재천만 건너면 대치동이잖아 인마. 내가 그 동네 몇 년 살았어.”
항상 텐션이 높은 재엽과 리아 때문에 원래부터 모임의 분위기는 즐거웠지만.
파릇파릇한(?) 막내 우진이 합류하자, 대화에 더욱 활기가 넘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리아는 정말 기꺼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서 편하게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이렇게 일로 알게 된 사람들과 사적인 모임을 갖는 것은, 진짜 오랜만인 그녀였다.
‘연예인이 아니면서, 이렇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
이름만 대도 전 국민이 알 수 있을 정도의 탑스타가 된 뒤.
유리아는 항상,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을 만나는 것을 무척이나 불편하게 생각했었다.
떠받들어주는 분위기는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던 데다, 금전적이든 이성적이든, 사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리아는 우진이 신기했다.
연예인이 먼저 보자고 연락해야 하는 일반인은, 과장 조금 보태면 처음인 것 같았다.
짤랑-
탁자 위에 놓인 유리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은 유리아는, 눈을 감고 부드러운 커피향을 음미하였다.
편하고 즐거운 사람들과 예쁜 공간. 그리고 맛있는 디저트와 고소한 커피까지.
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하, 이 커피는 정말……. 매일 생각나는 맛이란 말이지.’
기분 좋게 커피를 음미하던 리아의 시선이, 건너편에서 수하와 티격태격 떠들고 있는 우진에게로 잠시 향했다.
그런데 그 순간, 리아는 갑자기 조금 뜬금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우진아. 이건 진짜, 갑자기 생각난 건데.”
“네, 누나.”
“여기 카페 프레스코, 프랜차이즈는 안 해?”
“프랜차이즈요?”
“나 여기,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래. 네가 대표님 연결해줄 수 있으면, 내가 가맹점 하나 차려보고 싶어서.”
최근 리아는 막대한 음원 수입으로 인해 쌓인 돈으로, 신사동에 작은 건물 하나를 구입했다.
그런데 맛있는 커피와 함께 너무 마음에 드는 공간 안에 있다 보니.
자신의 건물에 이 카페가 있으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마침 우량 임차인을 구해야 한다는, 약간의 스트레스도 있었고 말이다.
무척이나 단순하지만, 아주 명확한 의식의 흐름이었다.
“프랜차이즈라…….”
우진이 짐짓 모른 척 중얼거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리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요. 누나 어디, 건물이라도 하나 샀어요?”
그 얘기를 들은 리아의 두 눈이, 토끼 눈처럼 휘둥그레진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