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포맷 파괴자.
우진에게 다가온 공PD의 첫 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그 질문을 예상했던 우진은, 웃으며 답하였다.
“가격을 정확히 알고 있는 자재들로, 198만 원을 채운 거죠 뭐. 남은 가격은, 보시다시피 소품 하나로 때웠고…….”
생각보다 단순한 우진의 대답에, 할 말을 잃어버린 공진영.
그녀는 제법 심각한 얼굴로, 우진에게 다시 질문했다.
“하아. 뭐, 저희가 제시한 룰에서 위배되는 부분은 없으니, 딱히 할 말은 없는데…….”
공PD가 우진의 소중한 나무(?)들을 쓰다듬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것들. 가격을 맞추기 위해서 억지로 사신 거면, 조금 곤란해질 것 같아서요.”
공PD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렇게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미션의 결과를 시청자들에게 보여준 뒤.
‘재엽’팀의 인테리어에서 이 막대한 양의 목재들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분명히 여기저기서 태클이 들어오며, 논란이 생길 여지가 충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공PD의 우려에, 우진은 아주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공PD는 아직도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이 목재들을 인테리어에 다 쓴다고요? 정말?”
우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쓰지도 않을 거면, 이렇게 많이 사서 어떻게 처분합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
“손바닥만한 조각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싹 다 쓸 테니, 걱정 마세요, 피디님.”
이어서 우진은, 공PD의 걱정을 완전히 불식시켜주기 위해.
한 가지 이야기를 슬쩍 더 꺼내었다.
“오히려 제가 오늘 매입한 이 목재들. 이거 가지고 재밌는 그림 하나 뽑아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재밌는 그림이요?”
검지를 들어 뿔테 안경을 살짝 치켜 올리는 공PD를 향해, 우진이 씨익 웃어 보였다.
“한번 들어보시렵니까?”
솔깃해진 공진영을 향해, 우진이 썰을 풀기 시작하였다.
* * *
<우리 집에 왜 왔니> 팀의 네 번째 촬영은, 어쨌든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미션의 결과가 다소 충격적이었던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공PD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졌으며.
적절한 예능과 적절한 전문지식이 버무려져, 흥미로운 장면도 여러 번 연출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방송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공PD는 아직도 심각한 표정이었다.
평소에 촬영이 끝나고 개운해 보이던, 그런 표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PD님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요?”
보조PD의 물음에, 공진영이 화들짝 놀라며 반문하였다.
“내가? 어두워?”
“네. 뭔가 심각한 우환거리가 있는 사람처럼…….”
“우환이라.”
“PD님 얼굴 지금 까매요.”
얼굴이 까맣다는 말에, 공PD가 화들짝 놀라며 거울을 확인했다.
까만 것까지는 과장이어도, 확실히 그림자가 진 얼굴이었다.
보조피디가 룸미러를 향해 턱 짓을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저 뒤에 따라오는, 1톤 트럭 때문에 그러세요?”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봉고 뒤에는, 1톤 트럭 두 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트럭 두 대는, 각각 재엽팀과 두영팀이 오늘 구매한 인테리어 자재들을 싣고 있었다.
공PD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보조피디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서 대표님이 재밌는 제안을 주셨다면서요. 잘 풀리겠죠 뭐.”
“그러……겠지?”
확신 없는 공PD의 목소리에, 보조PD가 해맑은 목소리로 끄덕였다.
“그럼요. 무슨 생각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셨겠죠. 서 대표님이 실력은 확실히 있는 분이잖아요.”
실력은 있다.
그건 맞는 말이다.
그와의 첫 촬영 때 봤던 카페 프레스코의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전문지식들까지.
뭐 하나 놀랍지 않았던 것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우진이 진영에게 제안한 것은, 그런 그의 능력들과 별개로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199만 9천 9백 원을 맞춰낸 것보다도, 훨씬 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제안.
우진이 공PD에게 제안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제가 이 목재 더미로 뭘 할지, PD님께만 귀띔해드릴게요.]
[지난번에 저희 팀에서 작업했던 설계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그 안에 목재로 만들어진 가구만 총 다섯 종이 넘게 들어가거든요.]
[일단 서재에 들어갈 책장부터 시작해서, 책상, 수납장, 아트월까지.]
[그걸 제 손으로 싹 다 만들어버릴 예정인데……. 어때요. 뭔가 괜찮은 컨텐츠 냄새가 나지 않아요?]
[목공소 가서 작업하는 날, 카메라 한 대 붙여주시면, 꽤 재밌는 걸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요? 구미가 좀 당기세요?]
가구라는 것은 나무를 샀다고 해서, 그렇게 뚝딱 만들고 그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렇게 쉽게 만들 수 있으면 심플한 목제 가구들의 가격이, 수십만 원씩 책정될 리 없었으니까.
그런데 우진은 가구를 하나도 아니고 대여섯 종 이상 직접 제작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심지어 혼자서 말이다.
목공 분야에 전문지식이 없는 진영으로서는, 이 말을 믿어도 되는지 계속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서 대표 말대로만 되면, 컨텐츠가 아주 다양하고 예쁘게 뽑히긴 할 텐데…….’
어차피 예산을 책정하고 자재를 구하는 내용의 촬영이 오늘 끝났으니, 이제부터는 실질적인 인테리어 공사의 시작이다.
각 팀별로 팀장인 재엽과 두영의 집 인테리어를, 각자의 공간에서 본격적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당연히 공사과정은 컨텐츠로 방영될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우진의 제안은 아주 완벽하다.
사실 인테리어 공사의 현장을 양쪽으로 담는 것보다는.
한쪽은 가구제작 같은 특별한 컨텐츠가 들어가는 게 더 보기 좋은 그림이었으니까.
그래서 일단 진영은 우진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미 촬영도 다 끝난 마당에, 사실 낙장불입이나 다름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재촬영은 비용 측면이나 일정, 재미 차원에서의 리스크 측면이나.
최후에 최후의 선택지로 남겨둬야 했다.
“여튼, 너무 걱정 마세요, 피디님. 이번 프로그램. 진짜 느낌이 좋다니까요?”
재잘재잘 떠드는 보조PD의 목소리에 위안을 받은 공PD는, 옅게 한숨을 쉰 뒤 등을 의자에 기대고 잠을 청했다.
‘으, 만약 그림이 좀 애매하게 나오면……. 편집으로 승부 봐야지 뭐.’
공PD의 이 고민은, 우진이 제안한 촬영까지 모두 끝나야 속 시원하게 풀릴 것 같았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온통 그 생각에 예민해지는 것이 그녀의 성향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길 바랐다.
‘우선 딱 일주일. 첫 방만 성공적으로 끝나도, 한 시름 놓을 수 있을 테니까.’
공PD는 휴대폰을 열어, 달력과 스케줄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다음 주 일요일 첫 방.
그리고 그다음 주 수요일 촬영.
그 두 일정이 전부 끝나야,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 진영이었다.
* * *
10월 첫째 주가 되었다.
새 학기의 개강으로 조금 어수선했던 9월과 달리, 10월의 대학 교정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 넘쳤다.
물론 월말이면 또다시 기말고사 기간이 다가오겠지만, 적어도 그전까지는 가장 행복한 캠퍼스 라이프를 보낼 수 있는 계절이 10월이었다.
시험이란 원래, 벼락치기가 진리인 법이니까.
“야, 오늘 한잔 어때? 저녁에, 경영과 애들이랑 과팅하기로 했어.”
“좋지!”
“여섯 시부터 간단하게 한 잔씩 걸치다가, 7시쯤 슬슬 합류하는 거야. 괜찮지?”
“으아! 좋아 좋아!”
더위가 완전히 가시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
대학가의 선남선녀들이, 한껏 멋을 부리며 풋풋한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계절.
하지만 그런 모든 행복은, 디자인학부 학생들에겐 전혀 통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나 디자인 대학 중에서도 커리큘럼이 빡빡하기로 유명한 K대의 디자인학부는, 더더욱 그러했다.
“야, 은정! 오늘 팀플인거 잊지 않았지?”
“하. 맞다.”
“설마 너 그냥 집에 가려고 했던 건……!”
“진짜 깜빡했어, 미안해 언니.”
“잡았다 요년!”
1학기 초만 해도 예쁘장한 여학생들이 많았던 공간디자인과 1학년 과실은.
고작 한 학기가 지났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퀭한 눈빛의 팬더들이 득실득실한 좀비 수용소로 탈바꿈되었다.
일주일 단위로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오는 과제를 소화하다 보니.
다들 꾸미기는커녕, 제대로 잠도 못 자면서 학교에 상주했던 것이다.
과실 구석에 펼쳐져 있는 간이침대에는, 생사조차 불분명한(?) 패잔병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으며.
노트북 앞에 앉아 침까지 흘리며 졸고 있는 여학생들의 모습도, 그리 보기 힘든 풍경은 아니었다.
그리고 과제를 하다가 이 전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빈은,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디자인과.
그러니까 미대를 꽃밭으로 착각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전해주고 싶다고 말이다.
‘미대에 피는 꽃은……. 아무래도 방학 때만 피는 꽃들인 것 같아, 친구들.’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며칠째 다섯 시간도 못 잔 선빈은, 쏟아지는 졸음을 쫓아내기 위해 커피를 한 모금 빨아먹은 뒤, 노트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저쪽에서 팀원들을 핍박(?)중인 소연과 함께, 팀플을 하기로 약속했던 날이었으니까.
“오늘은 진짜, 팀플 무조건 해야 해. 그러니까 애들 다 모아와, 서은정.”
“알겠어, 언니. 잠깐만!”
선빈이 오늘 조별과제를 해야 하는 수업은, ‘상업공간의 이해’라는 전공과목이었다.
여기서 선빈의 팀은, 그와 소연을 포함하여 총 다섯이었고.
오늘은 발표에 쓸 PPT제작을 위해, 다 함께 현장답사를 하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즉, 오늘의 팀플이란 것은.
미리 찾아두었던 현장을 답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예영이, 너. 오늘 답사할 곳은 찾아뒀지?”
“당연하죠, 언니! 제가 또 시키는 건 잘하거든요. 헤헤.”
이 1학년 좀비파티의 리더는, 그나마 정신상태가 멀쩡해 보이는 소연이었다.
SPDC대상 수상자라는 위엄(?) 때문인지, 소연은 만장일치로 팀장 자리에 강제 부임 될 수밖에 없었다.
‘뭐, 소연 누나가 리더십도 있고, 실력도 좋긴 하니까.’
사실 조금만 의욕적으로 나섰다면 선빈도 충분히 팀장이 될 수 있었다.
선빈 또한 무려 SPDC 최우수상이라는 엄청난 성적의 보유자였고.
그가 1학년 에이스인 것은, 대부분의 동기들이 인정하는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선빈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2학기 들어서, 조금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휴우. 답사 때는 소연 누나나 따라다니다가……. 모형제작이나 모델링 과제 나오면 그때 내가 밥값 하지 뭐.’
1학기의 선빈은, 뭐든지 가장 앞에 나서서 주도하는 스타일이었다.
수석입학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학과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인지.
무조건 과 1등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2학기도 한 달이 지난 지금.
그랬던 선빈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심지어 1학기 평점 4.5 만점으로, 목표했던 1등을 압도적으로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학점만 1등이면 뭐해…….’
그리고 선빈이 의욕을 잃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기준에 학점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이 바로 SPDC였고.
거기서 선빈은 정말 모든 것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진에게서 넘을 수 없는 벽을 느껴버렸으니까.
평점 1점대인 혜진이 들었다면 곧바로 등짝 스매싱을 날렸을 배부른 소리였지만.
그래도 선빈이 우울한 것은 진짜였다.
어쩌면 선빈은, 이상한 포인트에서 가을을 타는지도 몰랐다.
“야, 선빈아! 거기서 왜 멍때리고 있어. 빨리 준비해.”
“아, 알겠어, 누나!”
소연에게 질질 이끌려 과실을 나온 선빈과 세 명의 좀비들은, 그들과 다른 차원의 공간인 듯 보이는 풋풋한 교정을 지나 버스정류장에 섰다.
이어서 팀원 중 답사 장소 조사를 맡은 윤예영이, 앞장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가 갈 곳은, 경기도 고양시 삼송동이야.”
경기도라는 그녀의 말에, 팀원들의 동공이 살짝 확대되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