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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87화 (87/315)

87화

포맷 파괴자.

승부는 치열했다.

김기성 역시 ‘스타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고스톱 쳐서 딴 인물은 아니었기에.

초성퀴즈에서는 우진에게 밀리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두 팀의 스코어는, 12대 13.

결국 마지막에 연달아 세 문제를 맞춘 김기성 덕에, ‘두영’팀이 승리하게 되었다.

“승자는 두영팀!”

“두영팀의 인테리어 예산이, 200만 원 추가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엽’팀이 마냥 손해 본 것만은 아니었다.

우진은 본인이 인테리어에 쓰려고 했던 꼭 필요한 자재들의 초성 위주로 전부 다 정확히 맞췄고.

그것으로 인해 제작진의 50만 원 지원을, 예쁘게 써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역전패가 조금 아쉬운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뭐, 덕분에 그림은 재밌게 뽑힌 것 같으니까.’

환호하며 얼싸안는 기성과 두영팀을 보며, 우진은 속으로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시종일관 근엄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던 김기성의 변화를 보는 것은,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공진영PD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히야! 그림 좋고!’

제작진의 입장에서 가장 연출하기 힘든 그림은,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다.

물론 그 안에서도 뽑아낼 수 있는 재미야 있겠지만, 쫄깃한 그림을 만들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엎치락뒤치락 역전과 재역전이 이어진 초성 퀴즈는 대성공이었고.

공PD는 다음 미션인 ‘전자두뇌’가 더욱 기대되기 시작했다.

초성 퀴즈가 예능 어디에서나 넣기 쉬운 전형적인 게임이라면, 이 전자두뇌는 <우리 집에 왜 왔니> 프로그램의 포맷을 잘 살릴 수 있는 색깔 있는 미션이었으니까.

“자, 그럼 다음 미션! ‘전자두뇌’를 시작합니다!”

휘리릭-!

보조피디가 휘슬을 불자, 두 팀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각 팀의 선두에는, 당연히 우진과 기성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첫 번째 미션에서 아쉽게 패배한 우진은, 더욱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일단 재엽이 형! 저기 ‘집성목’이라고 붙어있는 푯말 보이시죠?”

“어, 보여!”

“형은 저기서, ‘마호가니 집성목’ 좀 찾아주세요!”

“마호? 뭐시기?”

“마. 호. 가. 니! 집성목 자재요!”

목재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고 분류법이 있지만, 크게는 하드우드와 소프트우드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우진이 재엽에게 얘기한 품종인 마호가니(Mahogany)는, 하드우드(Hardwood)*[색과 무늬가 아름답고 단단하며, 잘 변형되거나 변질되지 않는 고급자재]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고급목재였다.

‘백구십만 원을 정확히 맞추려면, 이 방법이 제일 좋겠어.’

사실 마호가니는, 이런 유통단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을 만큼 흔한 자재는 아니다.

특유의 고풍스럽고 따뜻한 질감 때문에 최고급 목재 중 하나로 분류되며.

목재 자체의 특성으로 음의 울림 효과가 크다고 하여, 악기를 만들 때도 최상의 재료로 취급받는 귀한 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원목이 아닌 집성목*[원목을 재가공하여 일정 규격으로 자른 목재를 이어서 붙인 자재]은 훨씬 더 구하기 수월했으며.

그 가격도 제법 합리적인 수준이었다.

‘마호가니를 한 사십만 원어치 사고……. 멀바우*[하드우드에 속하면서 가격대비 품질이 좋은 수종(樹種)으로, 강도가 높고 내충성ㆍ방부성이 우수하여 주로 가구, 악기, 구조재로 사용된다.]로 백오십만 원어치를 채우면…….’

우진의 전략은 이러했다.

다양한 종류의 소품이나 가구 등을 사서 어렵게 가격을 맞추기보다, 원자재를 대량으로 매입하는 방식으로 쉽게 가격을 맞춘 뒤.

그 위에 자신의 목공실력을 직접 발휘하여, 재가공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집성목은 WJ 스튜디오에서 매번 발주를 넣는 품목이고.

그 중에서도 마호가니와 멀바우는, 우진이 키로 단위 가격까지 정확하게 외우고 있는 자재였다.

우진이 이 두 품목을 주문한 것은, 바로 지난주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딱 199만 9천 9백 원을 맞추는 기적을 보여주지.’

그렇다고 해서 우진이 이 두 가지 목재를 선택한 것이, 단순히 가격을 맞추기 위함은 아니었다.

따뜻하고 밝은 톤의 마호가니와 달리 멀바우는 짙은 갈색톤의 목재였고.

대비가 큰 투톤의 목재를 잘 활용하면, 디자인적으로 멋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쉬웠으니 말이다.

‘멀바우의 짙은 톤에 마호가니가 포인트 컬러로 들어가면, 더 고급스러운 느낌을 연출할 수 있겠지.’

마호가니가 최고급 목재라면, 멀바우는 우진이 생각하는 최고의 가성비 목재였다.

마호가니와 마찬가지로 단단하고 변형이 적은 하드우드이면서도, 훨씬 더 공급이 많아 착한 가격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우진은 자신의 완벽한 계획에, 속으로 혼자 감탄하였다.

이 계획대로 잘 풀리기만 하면 200만 원에 가까운 자재를 공짜로 수급할 수 있다.

게다가 고급 기술자인 우진의 손으로 그 목재들을 재가공한다면.

그것은 몇 배가 넘는 가치의 작품으로 재탄생할 터였다.

우진이 몸으로 때워서, 어마어마한 비용 절감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이, 나무를……. 이렇게나 많이 산다고?”

“저만 믿으세요, 형.”

“뭐야, 이번에도 나무? 이거 그냥 색깔만 다른 나무 아냐?”

“수하 누나. 가만히 있으면 절반은 간다고 했어.”

“…….”

우진은 팀원들이 꺼내온 집성목들의 수량을 꼼꼼히 체크 하며 가격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하나, 둘, 셋……. 됐어. 마호가니 두 묶음만 덜어내면, 정확히 198만 원이야!’

어차피 이 두 가지 품목만 가지고 199만 9천 9백 원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미 198만 원을 정확히 맞춘 것만 해도 재엽팀은 아주 유리한 고지에 올라선 셈이고, 우진은 여유가 생겼다.

아직 남은 시간은 10분도 넘었고.

그 시간 동안만 구천 구백 원만 채우면, 재엽팀의 승리였으니 말이다.

우진은 반대편 매장에서 낑낑거리며 자재와 가구들을 다양하게 구매하는 두영팀을 보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십 분 남았습니다!”

보조피디가 남은 시간을 외쳤지만, 우진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입구에 한가득 쌓인 목재들의 수량을, 한 번 더 점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우진의 여유는, 같은 팀의 입장에서 보기에도 의아한 것이었다.

“서 대표! 이거 너무 여유로운 것 아냐?”

목재 한 뭉텅이를 낑낑거리며 들고 온 재엽이, 불안한 표정으로 우진에게 물었다.

그러자 우진은, 슬쩍 웃어 보인 뒤 재엽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형, 우리 이겼어요.”

“뭐?!”

재엽이 너무 큰 목소리로 반문하자,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한 우진이, 상황을 다시 설명해 주었다.

“여기 쌓인 나무, 정확히 198만 원이에요.”

“……! 그게 정말……?”

“그러니까 지금부터 설렁설렁 돌아다니면서, 만 구천 구백 원짜리 소품 하나만 찾으면 돼요.”

재엽은 우진의 말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생각했지만, 믿지 않기엔 우진의 표정이 너무 태연했다.

“정말이지? 딱 그 정도 가격대 소품 하나 주워오면 된다는 거지?”

“딱 그 정도가 아니고요, 형. 정확히 그 가격이어야 해요.”

“알겠어.”

“백 원이라도 넘으면 진짜 클 나요!”

“알겠다니까?”

‘럭셔리 하우징’의 유통매장에서, 원자재부터 시작해서 공사에 쓰이는 각종 타일과 가공재들은, 품목당 정확한 가격이 전시장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인테리어 소품이나 가구 같은 기성품들은, 일원 단위까지 정확히 가격이 책정되어 있고. 우진이 노린 것은 그것이었다.

단가를 정확히 알면서 대량으로 매입해도 알뜰하게 써먹을 수 있는 목재를 메인으로 사버리고.

만 원, 천 원, 백 원 단위의 값은, 기성품으로 깔끔하게 매듭짓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말 그대로 대성공이었다.

“저, 지금 재엽팀……. 설마 그 산더미 같은 목재만 산 건 아니죠?”

당황한 공PD가 살짝 말을 더듬자, 소품을 직접 골라온 수하가 그것을 슬쩍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여기, 하나 더 있어요, 피디님. 이거까지!”

타일, 블라인드, 탁자 등 아주 다양한 품목들을 모아놓은 두영팀과 달리, 마치 공사 현장처럼 나뭇더미가 수북이 쌓여있는 재엽팀.

그것은 전문가인 김기성조차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저 나무들로 대체 뭘 하겠다는 거지?’

공PD는 아예 혼돈에 빠져버렸다.

‘이거, 괜찮은 거겠지? 이대로 진행해도…….’

공PD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과연 이 목재들을 가지고 재엽팀이 앞으로 제대로 된 그림을 뽑아낼 수 있느냐였다.

예능 측면에서 당장의 그림이야 극단적인 느낌도 있고 괜찮았지만.

결국 이것들을 가지고 뭔가 제대로 된 걸 보여줘야, 지속적인 촬영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잠시 후.

공PD는 더 이상 그 고민을 이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 결과가 나왔습니다, 피디님.”

“고생하셨어요, 실장님. 가격은 여기 카메라 감독님께 전달 드리면 돼요.”

“네.”

앞으로의 촬영에 대한 걱정을 전부 다 묻어버릴 만큼, 충격적인 결과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일단 두영 팀이 매입한 물품의 총액은 185만 7천 3백 원!”

“와아아……!!”

“그리고 재엽팀이 매입한 물품의 총액은…….”

결과지를 확인한 카메라 감독은, 곧바로 입을 떼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믿을 수 없는 결과가 종이에 적혀있었으니 말이다.

“199만 9천 9백 원!!”

재엽팀의 결과가 발표된 순간.

장내는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순간적으로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 * *

공PD는 <우리 집에 왜 왔니>의 촬영을 시작한 이후로, 이렇게 당황한 것이 처음이었다.

‘정말…… 가격을 정확히 맞춰버렸다고?’

나무들만 잔뜩 사서 쌓아놓을 것으로 봐선, 정말 정확한 가격을 알고 199만 원을 끊어낸 게 분명하다.

이 미션을 기획한 예능 작가들은 절대로 맞출 수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했건만.

그 장담이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다.

‘연출이 극적으로 돼서 재밌긴 한데…….’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는 사실만으로 재미 포인트는 분명히 있었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정도의 문제가 있다.

첫째.

출연진이 생각하기에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이 상황을, 시청자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

둘째.

판돈(?)을 싹 쓸어간 재엽팀 덕에, <우리 집에 왜 왔니>의 제작진에게 배정된 예산에 구멍이 나버렸다는 점.

물론 추가예산 신청을 할 수 있긴 했지만, 재무팀에 크게 한 소리 듣는 것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인테리어’라는 소재 때문에, <우리 집에 왜 왔니>의 예산 총액은 꽤나 비싼 편이었으니까.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첫 번째 문제였다.

까다로운 시청자들은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하이에나처럼 물어뜯기 시작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공진영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재밌게 살리면서 진행하든.

아니면 재엽 팀에게 양해를 구하고, 정확한 액수에서 조금이라도 가격이 빠지는 선에서 재촬영을 부탁하든 말이다.

물론 두 번째 선택지는, 진영이 생각하기에도 최악의 선택지였다.

만약 이렇게 일부러 촬영내용을 수정하게 된다면, 리얼한 분위기와 재미기가 반감되고 말 테니까.

그래서 공PD는 잠시 촬영을 쉬는 타이밍에, 우진을 한 번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 상황에 대한 해답은, 우진에게 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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