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86화 (86/315)

86화

세 번째 촬영

김기성은 유학파 건축가로, 업계에서 꽤 인지도가 있는 디자이너였다.

S대를 졸업한 뒤 영국의 AA스쿨에서 석, 박사까지 마쳤으며.

그 뒤로 국제공모전에서도 몇 번이나 입상을 한, 이름있는 디자이너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김기성은, 건축가라기보단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가 디자인했던 럭셔리 펜트하우스가, 방송에 나와 이슈가 된 뒤로 말이다.

그가 <우리 집에 왜 왔니>에 1순위로 섭외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김기성 디자이너……. 확실히 실력 있는 인물이지.’

우진은 김기성을 아주 높게 평가했다.

전생에서는 한때 롤모델 삼았을 정도로, 그의 디자인을 좋아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예능에서나마 그와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 우진은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물론 그런 것과 별개로 <우리 집에 왜 왔니>를 촬영하는 동안, 그에게 밀릴 생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스펙이야 아직 내가 김기성에게 비빌 수도 없겠지만. 디자인을 스펙으로 하는 건 아니니까.’

디자인 실력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다면, 우진의 실력은 당연히 김기성보다 부족할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건축대학까지 나온 스타 디자이너와, 이제 갓 새내기인 우진의 디자인 실력을 비교한다는 것은 시기상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에게는 기성에게 없는 무기들이 있다.

전생에서 경험한 2020, 2030년도의 인테리어디자인 트랜드에 대한 지식부터 시작해서,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현장기술과 실무능력까지.

모르긴 몰라도 엘리트 코스를 밟은 김기성은, 실제로 공사판에 들어가 망치질을 해 본 경험은 별로 없을 것이었고.

이 부분에서 우진은, 기성을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공PD가 짜 놓은 <우리 집에 왜 왔니>의 포맷은, 단순히 디자인만 잘한다고 부각되는 구조가 아니었다.

“자, 재엽 씨가 뽑은 카드는 전자두뇌! 그리고 두영 씨가 뽑은 카드는 초성 퀴즈!”

공PD가 한층 업 된 목소리로 두 사람이 뽑은 카드를 각각 읽어주었고.

그 내용을 확인한 출연진들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단순히 ‘전자두뇌’와 ‘초성 퀴즈’라는 단어만 가지고는, 무슨 미션이 주어질지 감이 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나마 두영이 뽑은 초성 퀴즈라는 단어는 추측이라도 해 볼 수 있었는데, 재엽이 뽑은 전자두뇌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우진 또한, 다른 출연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이게 뭐예요, 피디님. 초성 퀴즈? 전자두뇌?”

임수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출연진들의 시선이 공PD를 향했고, 그녀는 대답 대신 우선 내용이 담긴 미션지를 두 팀에 각각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간결하게 설명을 시작하였다.

“초성 퀴즈는, 말 그대로 초성으로 답을 맞추는 미션이에요. 더 잘 맞춘 팀에게 보상이 주어지는 거죠.”

“심지어 리스크도 없어. 어때요, 간단하죠?”

[초성퀴즈]

[제작진이 제시하는 인테리어 자재의 정확한 이름을 가장 먼저 맞춘 팀에게, 해당 자재 매입금액의 50%를 제작진에서 지원합니다.]

[모든 퀴즈가 끝났을 때 가장 많이 맞춘 팀이 승리하게 됩니다.]

[승리팀은 지원금액과 별개로 인테리어 예산을 100만 원 확보하게 됩니다.]

*‘초성 퀴즈’카드의 주인인 팀이 승리할 시, 인테리어 예산을 100만 원 추가로 확보합니다.

*제작진에서 지원하는 자재 매입금액의 한도는, 한 팀당 50만 원입니다.

출연진은 미션지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공PD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전자두뇌. 이건……. 초성 퀴즈보단 좀 더 리스크가 있는 미션이에요. 대신 리턴도 훨씬 더 크겠죠?”

공PD가 양손을 활짝 펼치며, 출연진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199만 9천 9백 원을 정확히 맞춰 오세요! 그럼 가져온 모든 자재를 저희 제작진이 결제해 드립니다!”

[전자두뇌]

[각 팀은 주어진 시간 내에 필요한 인테리어 자재들을 선택해 가져옵니다.]

[가져온 자재들의 총합이 정확히 199만 9천 9백 원이라면, 제작진에서 해당 비용을 전액 지원합니다.]

[만약 목표액의 95%~100%를 달성했다면, 제작진에서 그 절반의 금액을 지원하고, 80%~95%를 달성했다면 1/4의 금액을 지원합니다.]

[만약 총액이 목표액을 넘거나 80% 미만이라면, 해당 자재들을 팀의 예산으로 전부 매입해야 합니다.]

[매입 총액이 목표액을 넘지 않으면서, 가장 목표금액에 가까운 팀이 승리하게 됩니다.]

[승리팀은, 지원금액과 별개로 인테리어 예산을 100만 원 확보하게 됩니다.]

*‘전자두뇌’카드의 주인인 팀이 승리할 시, 인테리어 예산을 100만 원 추가로 확보합니다.

미션지를 읽던 우진이, 가장 먼저 공PD를 향해 입을 열었다.

“리스크라는 건, 지원 없이 해당 자재들을 전부 매입해야 함을 의미하는 거죠?”

공PD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빙고. 바로 그렇죠. 그러니까 쓰지도 않을 자재를 가격 맞추겠다고 가져오는 건 위험할 거예요.”

이번에는 박두영이 PD에게 물었다.

“정말 목표액을 딱 맞춰 가져오면, 100% 전부 다 지원해주십니까?”

공PD는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물론이죠. 그런 기적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죠.”

미션지는 제법 빼곡했지만, 그 내용 자체는 결국 심플했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한 출연자는 아무도 없었고, 모두 열의를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크, 대박! 역시 500만 원이 그냥 끝일 리가 없지!”

“서 대표. 이겨야 돼. 알지?”

어깨를 두들기는 재엽의 말에, 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든 게임에 완벽히 이기는 최상의 시나리오를 가정했을 때.

아끼거나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비용의 총액은, 기존 예산인 500만 원이 훌쩍 넘는 수준.

사용 가능한 자재의 평균 레벨이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 다른 출연진들보다도 우진의 의욕이 더욱 불타기 시작하였다.

우진은 금액을 본 순간, 구체적인 계획까지 머릿속에서 세울 수 있었으니까.

“자, 그럼 미션은, 초성 퀴즈부터 시작합니다!”

“지금 바로요?”

“아니, 뭐. 공부할 시간도 안 줘?”

폭주하는 출연진들의 불만에, 공PD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 팀에는, 각각 훌륭한 전문가분이 계시잖아요!”

“그,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원래 예능에서, 다 맞춰버리면 재미없는 거 아시죠?”

“으아앗! 악마다!”

“너무해!”

그리고 본격적으로, <우리 집에 왜 왔니>의, 첫 번째 미션이 시작되었다.

* * *

김기성은 <우리 집에 왜 왔니> 의 촬영에, 항상 즐겁게 참여하고 있었다.

예능방송 출연이라는 신선한 경험에 대한 흥미도 있었으며.

TV에서나 보던 연예인들을 눈앞에서 구경하는 재미도 은근히 쏠쏠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가만히 있으면 예능에 도가 튼 연예인들이 알아서 대화를 리드하고 상황을 풀어주니.

기성의 입장에선 어려울 것도 없는 촬영이었다.

전문가의 포지션에서 일반인들이 신기해하고 흥미 가질만한 지식들을 한 번씩 풀어주면서, 프로그램에 윤활유 역할 정도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인지도도 쌓을 수 있었으니, 기성으로선 아주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지난 촬영 때보다 조금 더 흥미로운 일들이 많은 날이었다.

‘흠, 오늘은 상대 팀이랑 같이 촬영을 하네?’

일단 처음 보는 ‘재엽’ 팀의 멤버들과의 만남부터, 기성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웠다.

재엽과 리아 등은 연예계에 딱히 관심 없는 기성도 잘 알 정도로 유명한 스타들이었고.

자신과 같은 ‘전문가’ 포지션에 있는 상대 팀 일반인 패널 또한, 그의 흥미를 은근히 자극했으니 말이다.

‘서우진이라. K대학교의 학생이라고 그랬지?’

기성의 흥미를 끈 것은 우진의 이력에 있는 K대학교 학생이라는 것과, SPDC의 대상수상자라는 것이었다.

그 두 가지는 한국에서 건축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키워드였으니 말이다.

‘대학생이라더니. 진짜 풋풋할 때야. S대 후배가 아니라 조금 아쉽긴 하지만…….’

하지만 기성의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실력 있고 가능성 넘치는 후배 디자이너를 만나게 된 것이 즐겁기는 했지만.

고작 학부생인 우진에게 그 이상의 특별한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학부생이라 전문성은 조금 떨어질 수 있겠지만……. 얼굴도 잘생겼고 스토리도 있어서, 확실히 섭외될 만했던 친구로군.’

흥미로운 인물들과, ‘미션’이라는 새로운 컨텐츠의 등장.

덕분에 기성은 평소보다 더 즐거워졌고, 언제나처럼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촬영에 임하기 시작하였다.

미션이라는 것도 딱히 부담되지는 않았다.

업계에서 벌써 이십 년도 넘게 구른 기성에게 건축자재와 관련된 지식들은, 즉석에서 달달 읊어줄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뭐, 가격까지 정확하게 맞추는 건 어렵겠지만…….’

만약 상대팀의 전문가 패널이 자신과 동급의 기술자, 혹은 전문가였다면. 망신당하지 않기 위해 조금 긴장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맞은편에 보이는 20대의 귀여운(?) 친구는, 고작 학부생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나이대에 실무경력이 있기는 쉽지 않았고, 있다 해도 수박 겉핥기 수준일 터였으니.

오히려 기성은, 어떻게 미션의 밸런스(?)를 조절해야 할지 고민되기까지 하였다.

자신이 다 맞춰서 ‘두영’팀이 너무 다 이겨버린다면.

프로그램의 재미 자체가 크게 반감되어버릴 테니 말이다.

‘제작진도 뭔가 생각이 있겠지. 적당히 해 보지 뭐.’

하지만 본격적으로 ‘초성 퀴즈’의 미션이 먼저 시작되고.

두세 개 정도의 문제가 지나갔을 때쯤.

“자, 두 번째 문젭니다! 제가 보여드리는 초성을 맞추시면…….”

[ㅇㄹㅇㅋㅎㅍ]

“우진!”

“잠깐만요. 이것도 보고 바로 안다고요?”

“아라우코합판. 맞죠?”

“저, 정답!”

기성은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뭐지. 저 녀석? 요즘 학교에서는, 실무에 쓰는 자재 이름도 외우게 시키나?’

김기성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우진이 연달아 맞춘 두 문제는 기성도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우진처럼 단숨에 떠오르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나이가 먹어서인지, 순발력이 따라주지 않는 것 같았다.

‘으으, 다음 문제는 내가 무조건 맞춰야 하는데……!’

미션에서 이기고 지는 것도 문제지만, 기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새파랗게 어린 후배에게 망신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때문에 다음 문제가 나왔을 때.

“이번 문제는……!”

[ㅇㄹㅌㅁㄷ]

“기성!”

기성은 저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며, 칼칼한 목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손을 번쩍 든 뒤에는, 조금 멋쩍은 표정이 되었지만 말이다.

“우와! 기성이형님! 드디어!”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두영이 신이 나서 그를 응원했지만, 그런 목소리는 기성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는 오로지, ‘ㅇㄹㅌㅁㄷ’이라는 초성을 맞춰내는 데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우……레탄 몰딩! 맞죠?”

“정답! 정답입니다! 이로써 스코어는, 2대 1!”

한 문제를 맞춘 기성은, 저도 모르게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긴장감으로 인해, 게임에 순식간에 몰입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성의 태도 변화를, 아주 흐뭇하게 쳐다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바로, 이 모든 상황을 만든 장본인인 공진영PD였다.

‘좋아! 김기성 선생님도 이제 슬슬 분위기에 동화되시는 것 같고……. 오늘 촬영도 성공의 냄새가 나는데?’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약 30분이 지난 뒤.

김기성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등에도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었다.

골든 프린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