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84화 (84/315)

84화

세 번째 촬영

우진은 기억하지 못했으나, 원래 <우리 집에 왜 왔니> 시즌1은 첫 방영이 10월이었다.

때문에 딱히 바뀐 미래는 아니었지만, 우진이 기억치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우진이 재밌게 시청했던 것은 시즌1이 아닌 시즌2였고.

아무리 회귀자라 한들, 전생에 방영됐던 방송의 첫 방 시기까지 기억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으니 말이다.

우진이 전생에 방송관계자였던 것이 아닌 이상에야, 기억치 못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뀐 미래든 그렇지 않든, 갑자기 <우리 집에 왜 왔니>의 방영 날짜가 당겨진 데에는 당연히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

그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어, 공피디 왔어?”

“네, 국장님. 그런데 무슨 일로……?”

“내가 물어볼 게 하나 있어서 말이지.”

“저한테요?”

“그래. 자네한테.”

KBC의 모든 예능은, 예능본부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예능본부 안에는 예능1국과 예능2국이 존재하는데, 공진영 피디는 예능2국에 소속되어 있었고 이곳의 국장은 유인식이었다.

“말씀하세요, 국장님.”

예능2국의 국장인 유인식은, KBC의 공채사원에서부터 시작해서 국장급까지 올라간, 야망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국장 직함을 얻은 지 이제 반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무척이나 열심이었다.

어쩌면 이날 공PD를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네, 지금 제작 중인 예능 하나 있지? <우리 집에 왜 왔니>였나?”

“네, 국장님.”

“혹시 그거, 촬영 얼마나 진행됐나?”

“촬영이요? 갑자기 그건 왜…….”

“일단 대답부터 해봐.”

“얼마 전에 3화 방영분 정도까지 찍었습니다. 편집은 아직 2화까지밖에 안 됐고요.”

“흐으음…….”

최근 유인식 국장에게는, 한 가지 크나큰 골칫거리가 있었다.

그건 바로 그가 국장 자리에 들어서던 그 시점, 야심 차게 밀었던 예능 중 하나인 <만 번의 법칙>이 쫄딱 망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일요일 밤 9시라는 황금시간대에 편성된 예능이건만, 시청률을 정말 거하게 말아먹은 것이다.

처음부터 시청률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물론 처음이라고 대박이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평타 정도의 성적으로 스타팅 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시청률은 조금씩 흘러내렸고.

바로 얼마 전.

말 그대로 방송에 치명적인 일이 터져버렸다.

<만 번의 법칙>을 진행하는 메인 패널 두 사람이, 마약 스캔들을 터뜨린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마약 스캔들을 넘어 성 추문까지 겹친 크리티컬한 스캔들이었고.

덕분에 <만 번의 법칙>의 시청률은 완전히 곤두박질쳤다.

급하게 출연진을 교체해 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공PD. 이미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내가 요즘 <만 번의 법칙> 때문에 고민이 많아.”

유인식이 운을 떼자, 공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국장님.”

“자네 혹시, <만 번의 법칙> 지난주 방영분 시청률 알아?”

“한 2프로대 나왔나요?”

공PD의 반문에, 유인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쓰게 웃었다.

“2프로는 무슨. 한 자릿수 미만이야.”

“네? 그게 무슨…….”

한 자릿수 밑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소수점까지 확인해야 의미 있는 시청률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공중파 예능이 소수점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것은, 예능국의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계획된 일정이고 나발이고. 지금 그런 게 중요한 상황이 아냐.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러게요. 저도 이 정도까지 떨어졌을 줄은 몰랐네요.”

KBC의 예능본부는, 예능1국과 예능2국의 경쟁 구도다.

게다가 최근 예능1국은 승승장구 하는 중이었으니. 유인식의 입장에서는, 당장이라도 <만 번의 법칙>을 종영시키고 싶었다.

유인식과 공진영의 시선이, 허공에서 슬쩍 마주쳤다.

이제는 공진영도, 유인식 국장이 자신을 왜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국장님께선 <우리 집에 왜 왔니>를……. 그 자리로 당겨 넣고 싶으신 건가요?”

공진영의 이야기에, 유인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정확해.”

그 대답을 들은 공진영의 두 눈이 살짝 빛났다.

“하지만 시간대가 원래 편성보다 더 좋은데…….”

예능 프로그램의 편성시간은, 당연히 흥행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때문에 일요일 9시라는 황금시간대는, 사실 입봉 PD인 공진영이 들어가기 쉽지 않은 시간대다.

물론 국장이 넣겠다고 하면 들어가기야 하겠지만, 다른 PD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공진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유인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하였다.

“자네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아는데, 그건 신경 쓸 필요 없어.”

“예?”

“오히려 지금 다른 녀석들은, 내가 이 자리에 자기 프로그램 밀어 넣으라고 할까 봐 걱정 중이거든.”

“……?”

공PD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고.

그에 유인식이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왜냐면 내가 <만 번의 법칙> 종방을, 10월 초까지 당겨버릴 예정이니까.”

“예에?!”

앞서 언급했듯.

일요일 밤 9시라는 편성시간은, 예능국의 PD라면 대부분 탐을 낼만 한 시간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시간대라 해도, 준비된 컨텐츠가 있어야 흥할 수 있는 법이다.

만약 시간대가 욕심난다고 억지로 스케줄에 맞춰 예능을 준비했다가, 그대로 프로그램을 말아먹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정말, 최악의 결과로 돌아올 테니 말이다.

좋지 않은 이유로 조기 종영된 예능의 자리에 들어가서, 시청자들에게 또다시 실망을 안겨준다면.

해당 프로그램을 기획한 피디의 커리어에 크게 흠집 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10월 초면……. 2주 정도 남은 건가요?”

“그렇지.”

이제 모든 상황을 이해한 공진영은, 살짝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리스크가 적지 않은, 도박 같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큰 리스크가 있는 곳에서, 그만큼 충분한 리턴이 돌아오는 법.

그리고 공진영 피디는, 이번 <우리 집에 왜 왔니>에 아주 확고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하겠다고?”

“제가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아직 3화 방영분까지밖에 못 찍었다며?”

“방영 전까지, 5화분까지 확실하게 만들어 두겠습니다.”

“으음…….”

유인식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어차피 공진영 피디까지 거절하면, 그에게 남은 선택지도 없었으니까.

시청률이 소수점으로 찍히는 예능을 몇 달이나 더 방영하는 것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유인식이었다.

“좋아. 믿어봐도 되는 거지, 공PD?”

공진영이 자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국장님. 1, 2화 방영분도,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빠졌습니다.”

“그럼 한번, 믿어보겠어.”

<우리 집에 왜 왔니>의 첫 방 날짜는, 바로 이렇게 10월 초로 정해졌던 거였다.

그리고 우진의 앞에 펼쳐진 지옥 같은 스케줄은.

공진영PD와 우진의 야망이 만나 탄생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 * *

9월의 마지막 주.

그 주에서도 9월의 마지막 날인 목요일.

우진은 오늘, 결국 전공 수업을 자체 휴강할 수밖에 없었다.

공PD를 비롯한 출연진들과 최대한 시간을 조율해 봐도, 이날 말고는 답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우진의 세 번째 촬영이 잡힌 날이었다.

“서 대표님, 오셨어요?”

“네, 피디님. 며칠 만에 또 뵙네요.”

“말에 뼈가 있는데?”

“오해십니다. 하하.”

지금까지 <우리 집에 왜 왔니> 촬영팀은 총 세 번의 촬영을 했고, 오늘이 네 번째 촬영 날이었다.

하지만 우진이 촬영에 합류한 것은 두 번째 촬영 때부터였고.

그래서 그에게는 오늘이, 세 번째 촬영이었다.

“이야, 서 대표! 일찍 왔네?”

벤에서 내린 윤재엽이, 우진을 발견하고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러자 우진 또한, 웃으며 대답하였다.

“네, 형. 저도 방금 왔어요.”

우진은 출연진들과, 제법 친분이 생긴 상태였다.

두 번째 촬영이 끝난 날 가볍게 회식을 한 뒤로, 개인적인 연락도 주고받기 시작한 것이다.

윤재엽이 우진에게 편하게 말을 놓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원래도 우진과 친분이 있었던 수하는, 더욱 편해졌고 말이다.

“재엽 오빠, 저는 안 보여요? 우진이만 너무 좋아하시네.”

우진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해 있던 수하가 눈을 흘기며 핀잔을 주자, 재엽이 실실 웃으며 대꾸하였다.

“야, 수하 너랑 우진이가 같냐. 우리 우진이는 풋풋하잖아.”

재엽은 수하보다 몇 살 정도 더 많다.

하지만 우진보다는, 거의 열다섯 살이 많다.

그러니까 재엽은, 수하의 나이를 가지고 놀린 것이다.

“같은 30대끼리, 진짜 너무하시는 거 아녜요?”

“우리 팀 에이스 좀 챙겨주려는 거니까, 네가 이해해.”

“에이스?”

“우진이 덕에 매번 촬영이 잘 풀리잖아. 잘 챙겨줘야 계속 날로 먹지.”

“아하. 그 에이스, 제가 데려온 건 아시죠?”

“그야 물론이지.”

지난 두 번째 촬영에서, 우진은 첫 번째 촬영 못지않은 활약을 보여줬다.

물론 예능 차원에서 웃기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두 번째 촬영의 내용이 재엽의 집 ‘셀프 인테리어’를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설계 회의부터 시작해서 디자인 계획에 대한 회의까지.

적당한 위트와 함께 날카로운 전문성을 보여주며, 출연진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훌륭한 분량을 뽑아준 것이다.

우진의 디자인 계획을 들은 재엽이, 방송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탄했을 정도.

그래서 재엽은 오늘 촬영을, 무척이나 기대하였다.

오늘 이어질 촬영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재엽의 집 인테리어가 시작되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재엽은 자신의 집이 촬영장임에도 불구하고 우진보다 늦게 도착한 것일까?

그건 아니었다.

오늘 촬영이 시작되는 장소는,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유통단지’였으니 말이다.

정확히는 유통단지 내부에 있는, 인테리어 자재 전문 업체, ‘럭셔리 하우징’이었다.

“으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차가 좀 막혔어요!”

마지막으로 유리아까지 촬영장에 도착했고, 촬영팀은 빠르게 세팅을 마무리하였다.

‘럭셔리 하우징’의 관계자와는 이미 촬영 협의가 다 끝난 상태였기에, 언제든 촬영을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이 촬영 협조를 수월하게 따낼 수 있었던 것도 우진 덕분이라는 사실이었다.

“박 실장님! 촬영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저희가 해야죠, 대표님. 방송 타면, 저희한테도 좋은 일인데요 뭘.”

‘럭셔리 하우징’은 WJ 스튜디오에서 자주 애용하는 업체 중 한 곳이었고.

이곳 유통단지 매장의 담당자인 박순철 실장 또한, 우진이 잘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진이 잠시 박 실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촬영 세팅은 전부 다 마무리되었고.

“리아 씨, 준비 다 되셨어요?”

“네, 피디님!”

이어서 리아의 대답을 기점으로.

곧바로 <우리 집에 왜 왔니>의 네 번째 촬영이 시작되었다.

“리아 너, 집도 제일 가까운 주제에 설마 지각한 거야?”

“원래 제일 가까운 사람이 제일 늦는 법이야, 오빠.”

“와, 유리아 뻔뻔한 것 봐!”

그리고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자연스레 치고받는 재엽과 리아를 보며.

우진은 속으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볼 땐 두 사람의 모습이, 어디까지가 일상이고 어디부터가 촬영인지, 헷갈릴 정도로 자연스러웠으니 말이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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