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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83화 (83/315)

83화

브랜드. 그리고 인지도.

“이건…….”

“보다시피 설계 공모다.”

“청담 선영이면, 올해 초에 사업 시행인가 난……. 영동대교 남단에 있는, 재건축아파트 아닙니까?”

우진의 반문에, 경완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야, 너는 무슨……. 서울에 있는 아파트란 아파트는 다 외우고 있냐?”

“그럴 리가요. 그냥 청담 선영이, 워낙 유명한 사업장이어서 알고 있는 것뿐입니다.”

“흠. 그렇긴 하지.”

우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경완은 여전히 놀라운 표정이었다.

아파트에 대해 아는 것과 재건축 추진단계까지 꿰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문제였으니 말이다.

‘일 때문에 알고 있을 리는 없고……. 투자자 포지션에서 꿰고 있는 거겠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경완은 우진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부동산 투자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이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였기 때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여튼 알고 있다니 얘기하기 편하겠네.”

우진이 바로 말을 받았다.

“설계 공모라는 건, 천웅에서 선영아파트 시공사 선정 입찰에 제출할 설계를……. 외부 업체나 디자이너에게 공모한다는 말씀이시겠죠?”

“역시, 척하면 척이군.”

우진은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설계를 공모한다는 사실에 놀란 게 아니다.

우진은 천웅이 선영 재건축의 입찰에 참여할 것이라는 사실부터 놀라운 것이었다.

“천웅이 선영 재건축 입찰에 참여하나요?”

경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번 해 보려고.”

“……!”

우진은 청담 선영아파트를 잘 알고 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영아파트가 재건축되고 그 자리에 지어졌던, ‘청담 아르티아 리버뷰’ 라는 이름의 고급 아파트에 대해 잘 아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아르티아는 SH물산이 05년부터 밀기 시작한 아파트 브랜드였고.

그러니까 우진의 전생에서 이 선영아파트 재건축의 수주전은, SH물산의 승리로 마무리됐었다.

우진이 이것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이 수주전의 결과로 인해, 제운건설과 SH물산의 도급순위가 바뀌게 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장기적으로 제운건설은 조금씩 저물어가는 태양이었고, 2010년대부터 거의 20년 동안 SH건설이 장기집권하게 되지만.

그래도 제운건설이 1위를 빼앗겼다는 사실은, 당시에 제법 화제가 되던 빅뉴스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우진이 잠시 말을 멈췄던 것은, 이런 지난 기억들이 떠올라서가 아니었다.

우진이 놀란 것은, 또 한 번 미래가 바뀌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청담 선영의 수주전에 천웅이 참가하게 되다니……. 이런 전개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

우진의 전생에서 천웅건설은 이때 즈음, 미분양 됐던 마포 클리오 아파트를 털어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무려 청담동 알짜배기 재건축 수주전에 참여할 만큼,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얘기다.

때문에 우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또한 우진 자신에 의해, 바뀌어버린 미래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건 기회다.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되기만 한다면 정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

보통 건설사에서 재건축, 재개발의 수주전에 입찰하기 위한 설계를 뽑을 때는.

외부 설계사무소에 외주를 주기보단, 건설사 내부의 설계팀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설계 외주 또한 전부 비용이며 어떤 측면에선 리스크도 있었으니.

어지간하면 내부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수주전의 클래스가 최상위권으로 올라갈수록, 설계와 디자인의 외부 공모는 꽤나 흔해진다.

특히나 청담동같이 강남에서도 최상급지에 지어지는 프리미엄 아파트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애초에 부자 동네다 보니 조합원들의 눈이 머리 꼭대기에 달려있는데다, 잘 지어놓으면 그 자체로 랜드마크 격의 건축물이 될 수도 있다 보니.

건설사에서도 최대한 공을 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WJ 스튜디오에 이 설계 공모의 참가자격을 주는 것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보통 건설사에서 외부 설계 공모를 결정할 정도로 작정하고 달려드는 수주전이라면, 해외 유명 설계사무소에 의뢰를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이제 갓 성장하기 시작한 WJ 스튜디오의 입장에서는, 과분한 기회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뭐야, 서 대표.”

“네?”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생각 좀 하느라고요.”

“자신 없는 건 아니지?”

경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우진을 도발했다.

우진이라면 분명히 이 공모에 참여할 테지만.

그래도 이 정도 커다란 건이라면, 쉽게 결정짓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우진이 놀라는 모습을 보는 건, 경완의 입장에서 꽤나 재밌는 일이었다.

“천웅건설 내부공모, 마감이 언제 까집니까?”

“그렇게 길진 않아.”

“두세 달쯤 됩니까?”

“아니, 한 달 하고 보름 정도.”

“……!”

“빠듯해도 어쩔 수 없어. 입찰 마감이, 11월 말이거든. 설계 나오면 투시도 뽑고 안내 책자 만들고……. 일정이 빠듯하니까.”

아파트 단지 하나를 설계한다는 것은, 여간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 아니다.

물론 시공사 선정 때 들어갈 설계가 백 퍼센트 시공단계의 설계 수준으로 나올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은, 촉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내부 공모때는 컨셉 설계 정도만 있으면 돼. 어차피 실시설계부터는, 우리 설계팀이 같이 붙어서 작업할 테니까.”

그 이야기를 들은 우진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실시설계 부분이 빠지게 된다면, 그나마 가능해 보이는 일정이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기회…….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겠지만…….’

우진은 잠시 눈을 감고, 이미 잡혀있는 WJ 스튜디오의 내부 일정을 고민해 보았다.

다행인 건 우진이 직접 뛰어다녀야 할 일정이 한동안 없다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부 직원 중에 여기 매달려줄 만한 인원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일정 맞추려면, 나 혼자만으론 절대 안 돼, 결국 사람을 외부에서 끌어와야 하는데…….’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우진의 머리가 팽팽 돌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짧게 한숨을 내뱉은 우진이, 경완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천웅이 우진의 설계를 선택해 주지 않는다면 아까운 시간과 비용을 날리게 되는 셈이지만.

그게 무서워서 포기할 만한 기회는 아니었다.

그거야말로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격일 테니 말이다.

“하겠습니다.”

우진의 대답이 떨어지자, 경완의 입에서 음흉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으흐흐. 그럴 줄 알았지.”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우진은, 한숨을 푹 하고 내쉴 수밖에 없었다.

“후우. 거의 폭탄 같은 선물을 던져주시네요.”

“그래도 서 대표 생각해 주는 건, 나밖에 없는 거 알지?”

“예, 예. 부장님껜 제가 항상 감사드리죠.”

“뭔가 서 대표 표정이 못마땅해 보이는 건…….”

“기분 탓입니다.”

“프하핫.”

앞으로의 일정을 떠올린 우진은, 다시 한번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동기들이 얘기했던 것처럼, 휴학이라도 한 학기 했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뭐, 하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잠을 두 시간씩 줄이면 되지 않을까?’

우진에게 번뇌를 안겨준 뒤.

경완은 로비에 앉아 신나게 떠들다가, 거의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천웅건설로 돌아갔다.

그리고 경완이 돌아간 뒤.

홀로 사무실에 남은 우진은, 책상 위에 올려뒀던 달력에 빼곡히 일정을 적으면서 스케줄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어차피 시간이 부족한 건 이 공모에 참여하는 다른 설계사무소들도 마찬가지라는, 아주 긍정적인 논리회로를 머릿속으로 팽팽 돌리면서 말이다.

“카페 프레스코 미팅은 9월 말로 밀어야겠고. 모형 외주쪽 미팅은 어지간하면 석현이 전부 보내버리고…….”

“좋아. 조금 빡빡하게 조이니까, 대충 방법이 보이는 것도 같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정을 짜던 우진은, 대략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쯤.

위이잉-!

잠시 일정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전화를 받아야 했다.

[KBC_공진영PD님]

“음? 피디님이 갑자기 무슨 일이시지?”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의 발신자가, 설계 일정을 짜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아, 우진 씨! 그동안 잘 지내셨죠?]

“네, 피디님. 저야 잘 지냈죠. 그런데 무슨 일로……?”

그리고 우진은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얼마 전. <우리 집에 왜 왔니>의 두 번째 촬영까지 깔끔하게 마친 상태였고.

그래서 한동안 공PD에게 연락받을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으니 말이다.

[허어, 이거 서운하네요. 우리 이렇게 안부 전화 정도는 나눌 수 있는 사이 아니었나요?]

“안부 차 전화하신 게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러죠.”

[후훗, 예리하시긴.]

하지만 우진의 그 당황은, 이제 시작됐을 뿐이었다.

[좋은 소식 하나 전해주려고, 전화 드렸어요.]

“좋은 소식이요?”

[네. 그건 바로……. 우진 씨가 예정보다 ‘조금’ 더 빨리, TV에 나오게 됐다는 소식이죠.]

“네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수화기에 대고 반사적으로 반문하는 우진.

그런 그를 향해, 공PD는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꺼내놓기 시작하였다.

[원래 우리 첫 방이, 12월이었잖아요?]

“그, 그랬죠.”

우진은 눈 앞에 펼쳐진 달력을 넘겨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방금 전까지 설계 일정이 끝난 뒤에 첫 방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으니.

어렵지 않게 날짜를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공PD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런데 그 날짜가 아주 조금. 그러니까 대충 50일 정도가 당겨졌어요.]

“네?!”

[대략……. 10월 초. 정확히 다음다음 주 토요일 밤에, 첫 방 일정이 잡혔다는 이야기죠.]

“가, 갑자기 왜요!”

몹시 당황한 우진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큰 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것이 행복한 비명(?)이라고 생각한 공PD는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후훗. 시간대도 원래 편성보다 훨씬 더 좋아졌어요. 무려 일요일 밤 아홉시 예능이라고요.]

“아니……. 그러니까…….”

[어때요? 행복하죠? 그러니까 우린, 늦어도 다음 주엔 바로 만나야 해요. 네 번째 촬영 일정이 잡혔다는 얘기죠. 아니, 우진 씨한텐 세 번째 촬영인가?]

“대체 왜…….”

[날짜는 수요일. 혹은 금요일. 시간대는 우진 씨가 선택할 수 있어요. 언제로 할까요?]

우진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공PD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사실은 공PD의 목소리가 희미해진 것이 아니라, 우진의 머릿속이 하얗게 마비되고 있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음, 우진 씨? 제 목소리 안 들려요? 뭐지? 갑자기 휴대폰이 왜 이래?]

하지만 결국 우진은, 이 각박한(?)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미 화살은 활시위를 떠났고.

설계 공모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진에게 선택권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좋아요, 피디님.”

[오, 들린다!]

“너무 좋네요.”

[우진 씨 목소리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좋아서 그래요…….”

우진은 어쩌면 1학년 2학기의 성적을, 완전히 말아먹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1학기에는 전공 실기 올 A+이라는 기염을 토하며 평점 4점대를 턱걸이하였지만.

지금 달력에 가득 들어찬 이 모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학교 과제들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디자인학부의 성적은, 기말 때 반짝 시험을 잘 본다고 고학점이 나올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래……. 학사경고만 아니면 돼. 학사경고만…….’

우진은 이번 학기 성적이 자신의 오른쪽 눈 시력과 비슷하게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나마 위안인 건, 우진의 시력이 아주 좋은 편이라는 정도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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