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브랜드. 그리고 인지도.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이어서 그 안에서 나온 두 명의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야, 아파트형 공장이라기에 공장 같은 삭막한 이미지 생각했는데……. 여기,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부장님. 주차장이 조금 좁긴 한데, 그것만 빼면 진짜 다 괜찮은데요?”
“주차장이야, 지하에다가 창고 호실 분양한다고 좁은 거지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진짜, 작은 업체들 사무실로 분양받기 딱이다, 야.”
“그냥 오피스 건물 같아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천웅건설의 박경완과 그의 부하직원인 우재준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찾아온 곳은, 바로 WJ 스튜디오의 새 사무실이 입주한 서울 숲 IT타워.
두 사람은 당연히 우진의 초대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
경완뿐만 아니라 재준 또한, 최근 몇 달 홍보관 실무담당을 하면서 우진과 친해진 인물이었다.
“1413호라고 했지?”
“네, 부장님.”
“어디 한번 우리 서 대표님, 얼마나 잘 꾸며놨는지 볼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좌측으로 꺾어 나오자, 길게 늘어선 복도가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복도를 따라 조금 걷자, WJ 스튜디오라는 명판이 금세 눈에 들어왔다.
사무실의 방화문은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 이중으로 설치된 유리문을 슬쩍 밀치자.
경완은 곧, 낯익은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오, 이게 누구야. 진태 아냐?”
“하하, 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 이직하더니. 신수가 훤해졌어?”
“이직은 무슨 이직입니까, 하하.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이제 자리를 잡은 거지요.”
밝아 보이는 진태의 표정에,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 지었다.
어찌 보면 진태와 우진의 인연을 만들어 준 것이 경완 자신이었기 때문에.
우진과 함께 일하며 성장하는 그의 모습에, 뿌듯함을 느낀 것이다.
“진태 씨, 저도 왔습니다. 하핫.”
“어, 박 부장님만 오시는 줄 알았더니, 재준 씨도 같이 왔네?”
“서 대표님께서 사무실 멋지게 뽑아놨다고 하시니, 궁금해서 와보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재준의 이야기에, 진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여기 입주 전에 인테리어한다고, 우리가 조금 고생하긴 했지.”
중얼거리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진태를 향해, 경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어디, 사무실 구경이나 한번 쭉 시켜줘 봐. 서 대표는 안에 있고?”
“대표님 잠깐 관리사무소 내려가셔서, 이제 곧 오실 겁니다.”
“원래 형 동생 하더니, 이제 대표님 호칭 따박따박 붙여 주는 거야?”
“회사에서는 어지간하면 그렇게 해야죠. 하하.”
WJ 스튜디오의 시공 파트 사무실은, 실 평수가 거의 70평 정도 되었다.
실평 25~30평 정도 되는 세 개의 호실을 뚫어서 하나의 사무실로 공사하다 보니, 꽤나 널찍하게 공간이 빠진 것이다.
“자, 이쪽으로.”
때문에 안으로 들어선 경완은,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문 앞은 반투명한 글라스 월(Glass Wall)로 막혀 있어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안쪽으로 몇 발짝 성큼 들어서자, 탁 트인 로비 공간부터 시원하게 펼쳐졌으니 말이다.
“이야. 무슨 회사 사무실을 이렇게 작살나게 꾸며놨대?”
마치 고급 라운지처럼 꾸며둔 사무실 로비의 디자인에 경완이 감탄하자, 진태가 웃으며 대답했다.
“넓잖아요. 공간이 남았죠.”
“그러게. 넓기는 또 왜 이렇게 넓은 거냐? 너희 직원 몇 명이야?”
“이쪽, 시공 파트만 하면 상주 인원은 열셋 정돕니다.”
“여기, 몇 평인데?”
“칠십 평 조금 넘을걸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재준이, 기겁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직원이 열세 명인데, 70평을 쓴다고요?”
재준과 마찬가지로 경완 또한 당황한 표정이었고.
그들의 그런 표정을 예상한 진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한 번에 너무 넓게 키우는 것 아니냐고, 저도 대표님께 물었었는데…….”
“그랬는데?”
“이사 여러 번 하긴 싫으시답니다.”
“뭐?”
“금세 직원 늘어날 거라고, 처음부터 넓게 잡으셨다더라고요.”
진태의 이야기에 경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하하, 서 대표 자신감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재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로비 소파에 걸터앉았다.
“아니, 그래도 실 평수 70평대면, 한 40~50명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인데…….”
재준이 중얼거리듯 뱉은 이야기에, 경완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하였다.
“야, 여기 로비에만 15평은 쓴 것 같은데, 어떻게 50명이 들어가냐?”
“아, 그것도 그러네요. 공간도 죄다 널찍하게 뽑아놔서, 이런 구조면 서른 명이나 겨우 들어가겠네. 아니, 스물다섯 명?”
재준의 이야기에, 진태가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엇, 어떻게 아셨어요, 재준 씨?”
“네?”
“대표님이 딱 그러셨거든요. 여기, 스물다섯 명 될 때까지 쓸 거라고.”
“…….”
진태의 그 이야기에, 재준과 경완은 순간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 영세한 설계사무소는 어떻게든 고정비용을 줄이려고 사무실도 좁게 쓰는데.
스물다섯 정도의 직원 숫자를 생각하면서 70평짜리 사무실을 구한 것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마침 사무실에 올라온 우진이, 반가운 표정으로 로비를 향해 걸어 들어왔다.
“오, 부장님! 일찍 오셨네요?”
“차가 생각보다 안 막히더라고.”
“재준 씨도,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요?”
“좋죠.”
“뭘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야, 난 왜 안 물어봐!”
“부장님이야 뻔하잖아요.”
“뭐가!”
“보나마나 자판기에서 우유 한잔 뽑아달라고 하실 거면서.”
“제길. 간파 당했네.”
툴툴거리며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는 경완을 보며, 옆에 있던 진태가 신기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뭐야, 부장님 취향. 우유였어요? 안 어울리게?”
“야, 자판기 우유가 얼마나 맛있는데. 달달하니 혀에 착착 감겨.”
재준도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 부장님은 모양 빠지게……. 여기까지 와서 또 자판기를 찾으시네.”
물론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경완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엘베 앞에 자판기 딱 있는 거 못 봤냐?”
“그랬어요?”
“이미 스캔 딱 해 놨다 이거지.”
“예, 예. 맛있게 드십쇼.”
음료가 한 잔씩 세팅되자, 네 사람은 로비 한편에 놓인 원목 탁자를 가운데 두고 소파에 앉아 마주 보았다.
로비의 측면은 거의 통유리나 다름없이 넓은 유리창으로 시공되어 탁 트여 있었고.
그 트인 공간을 통해, 널따랗고 푸른 서울숲이 멋들어지게 펼쳐져 있었다.
서울숲 너머로는 멀리 한강까지 보이는 뷰였으니,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하였다.
“이야……. 서대표.”
“네, 부장님.”
“여기, 무슨 사무실을 이렇게 잘해놓은 거야?”
처음 로비를 보자마자 진태에게 했던 질문이지만.
멋들어진 뷰까지 눈에 들어오자, 경완은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 물음에 우진은, 진태와는 다른 대답을 하였다.
“솔직히 예산만 더 있었으면, 이것보다 더 멋지게 작업했을 겁니다.”
“이것보다 멋지게? 대체 왜?”
경완의 의문은, 사실 당연한 것이다.
설계사무소는 일반 업체들의 사무실과 다를 것 없는 업무공간인데.
이렇게 넓은 면적을 할애하여 디자인에 치중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외부 업체나 건축주와의 미팅을 해야 할 일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외부의 잘 꾸며진 카페나 라운지 같은 곳에서 하면 되는 것.
일반적인 시선에서 볼 때 WJ 스튜디오의 로비는, 조금 사치스러워 보였던 것이다.
단순히 이 로비만 놓고 봤을 때는, 천웅건설의 사옥보다도 더 고급스러워 보였으니까.
때문에 경완은 의아한 표정이었고, 그것은 재준이나, 심지어 진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우진은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야 당연히, 보여주기 위함이죠.”
“응? 누구에게?”
“부장님이나 재준 씨처럼. 저희 사무실에 방문하실 손님들께 말입니다.”
우진은 WJ 스튜디오 새 사무실의 인테리어에, 거의 1억에 가까운 비용을 들였다.
하지만 이것은 WJ 스튜디오가 직접 시공했기 때문인 것이고, 아마 다른 업체에 맡겼더라면 2억 이상이 들었을 만한 수준.
그리고 우진이 이렇게까지 많은 비용을 들여 공간을 꾸민 것은, 당연히 자기만족 같은 실리적이지 못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우진에게 이것은, 또 하나의 투자일 뿐이었다.
“뭐, 부장님이나 재준 씨야, 저희 회사가 어떻게 커왔는지 다 알고 계시지만……. 사실 처음 저희를 알게 된 사람들에겐, 이 로비가 바로 첫인상이 될 겁니다.”
“흐음.”
경완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우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 우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첫 이미지를 어떻게 인식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저희가 따낼 수 있는 공사의 질이 달라지겠지요.”
우진은 WJ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박리다매의 스탠스를 취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제까지야 회사의 덩치를 불리기 위해 최대한 많은 일을 따내는 데 주력했지만.
지금부터는 WJ 스튜디오를 프리미엄화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부장님. 전, 결국 이 바닥에서 최고가 되려면……. 돈의 흐름을 따라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의 흐름?”
경완의 반문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쉽게 말해……. 자본이 크게 움직이는 곳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거죠.”
커다란 금덩이가 굴러가는 곳을 따라가야, 금 부스러기를 모아도 큰돈이 되는 법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이 많을수록, 선택의 폭도 훨씬 더 넓어진다.
그것은 디자인이라는 분야에도, 똑같이 통용되는 일이었다.
“우리가 이 정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시공능력이든 디자인능력이든. 클라이언트에게 저희 사무실을 보여주는 것만큼, 쉽게 신뢰를 심어줄 수 있는 방법도 없지 않겠습니까?”
우진의 이야기가 끝났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세 사람은,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경완이나 진태도 이 멋들어진 로비를 본 순간.
가장 먼저 떠올랐던 생각이, ‘돈 좀 벌었나 보네’ 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회사가 돈을 잘 번다는 것은 곧, 그만한 역량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역시, 서 대표는……. 만날 때마다 재밌는 얘길 하나씩 해준다니까.”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 마신 경완이,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다시 한번 감상하였다.
넓은 서울숲으로 인해 한강까지 쭉 트여있는 풍경이, 우진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욱 멋져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경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더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오늘 여기 오길 잘했다는 것이었다.
‘아직은 조금 이른 감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보니 쓸데없는 걱정이었군.’
경완은 소파 옆에 올려뒀던 가방을 열어, 누런 서류봉투 하나를 쓱 꺼내 들었다.
이어서 우진의 앞 탁자 위에, 그것을 슬쩍 던져주었다.
“이게 뭡니까?”
우진의 물음에, 경완이 씨익 웃으며 대답하였다.
“재밌는 얘기를 들었으니, 오랜만에 선물 하나 주는 거다.”
“선물…… 이요?”
“그래. 지금 봐도 되니까, 한 번 꺼내 봐.”
평일 업무시간에, 경완이 단순히 놀러 오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뭔가를 꺼내 들자, 우진의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서류봉투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우진의 두 동공이, 화등잔만하게 확대되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