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브랜드. 그리고 인지도.
1학기 초만 해도 완벽한 아웃사이더였던 우진은, 어느새 디자인학부 내에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SPDC의 ‘신입생 대상 수상자’ 라는 수식어만 해도 충분히 유명해질 만한데, 얼마 전 KBC의 촬영 팀까지 학부 건물에 다녀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이 우진의 얼굴까지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디자인학부 공간디자인과 1학년 ‘서우진’이라는 이름 석 자만이, 유명해진 것일 뿐이니까.
그리고 우진이 유명해진 것은, 비단 학생들 사이에서만의 일이 아니었다.
이미 공간디자인과의 모든 교수들은 우진에 대해 알고 있었고.
특히 학과장 윤치형 교수는, 개강하자마자 우진을 찾고 있었다.
“그 녀석, 첫 주에 아예 학교에 나오지도 않았다고?”
“예, 학과장님.”
“짜식이, 상도 타고 TV에도 나간다고, 학과 생활에 소홀해진 건 아니겠지?”
“아마 그렇진 않을 겁니다.”
“그래?”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WJ 스튜디오의 일이 바빠서 나오지 못한 거더라고요.”
“아하.”
“정확하지는 않은데, 최근에 사무실 이사를 했나 봅니다.”
윤치형 교수가 처음 우진에 대해 알게 된 것은, SPDC의 최종심사 발표 때였다.
SPDC 본선에 역대 최고 수준으로 많은 학생들이 합격했다는 이야기에, 혹시 대상을 받는 과 학생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최종심사에 참관했던 윤치형.
그때 그는 최종심사에 두 팀이나 올라왔다는 사실에 먼저 놀랐으며.
그 중 한 팀이 신입생이라는 사실에 경악을 했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서우진’이라는 이름을 확인했고, 그가 어떤 발표를 할지 기대했었고 말이다.
그리고 우진은, 치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니, 그가 기대했던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발표를 보여줬다는 말이 오히려 맞는 말일 것이다.
우진의 발표를 듣던 내내, 치형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었으니 말이다.
‘발표를 듣던 와중에도 최소 세 번은 확인했었지. 이놈이 정말 우리 학교 학생이 맞는지. 그리고 신입생이 맞는지 말이야.’
물론 그 작품은, 우진과 소연, 그리고 제이든이 함께 만든 작품이다.
하지만 치형은 발표자인 우진의 실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것은 발표의 깊이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모든 작업과정과 설계 전반을 관통하는 통찰력이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수준의 발표였으니까.
그래서 윤치형 교수는, 작은 욕심이 하나 생겼다.
‘이 녀석만 잘 키워낼 수 있다면…….’
K대학의 디자인학부는, 그냥 평범한 4년제 디자인과가 아니다.
국내에서도 거의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안으로 꼽는 최고의 디자인과였으며.
대외적으로는 국내‧외 굴지의 기업들과도 긴밀하게 연계되어있다.
때문에 이 K대학교 디자인학부에서 교육자로서 성공한다는 것은, 학계에서 엄청난 명예를 얻는 것임과 동시에 실질적인 이득도 가져다준다.
여기서 교수직을 역임하는 동안 충분한 능력을 증명한다면.
해외 유명 건축대학이나 디자인 대학에 교수. 혹은 대형 건설사의 임원으로 영입될 기회도 생기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완성형의 신입생이 자신이 학과장으로 부임하는 과에 있다는 것은.
교육자로서 능력을 증명하기에, 무척이나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치형의 눈에 우진은, 몇 년 정도 잘 키우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될 가능성이 보였으니 말이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무능력만 봐서는, 절대로 학부생 수준이 아니야.’
그래서 그가 개강 직후 우진을 찾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직접 테스트해서, 검증을 한 번 해봐야겠어.’
정말 공모전에서 본 작업물이 오로지 우진의 실력에 의한 것이라면.
지금 학교의 수업들 중 일부 정형화된 과목들은, 치형이 볼 때 우진에게 필요 없는 과목들이었다.
제도 수업이나 건축, 공간디자인학개론. 그리고 건축법이나 실시설계와 관련된 과목들 말이다.
완성된 작업물들의 퀄리티와 발표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그것들은 우진이 이미 다 알고 있을 내용들이었으니까.
때문에 치형은, 우진의 진짜 능력치를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우진의 수준을 확인하고 그에 맞는 기회들을 쥐여 주면서, 그를 디자이너로서 빠르게 성장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뭐, 아직 신입생이니. 조금 느긋하게 생각해도 되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치형에게, 조교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런데 교수님.”
“응?”
“그 서우진이라는 친구가 운영하는 회사가 WJ 스튜디오라는 건……. 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아, 그거?”
조교의 물음에, 윤치형은 가볍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SPDC 공정심사위원회에서 알려줬거든.”
“예?”
“서우진이가 공모전에 출품했던 모형이, WJ 스튜디오 작업물이랑 비슷했나 보더라고.”
“아…….”
“그래서 누가 투서를 넣었는데, 그때 거기가 서우진이 회사라는 게 밝혀진 거지.”
별것 아니라는 듯 설명하는 윤치형의 얼굴엔, 약간의 쓴웃음이 걸렸다.
SPDC 공정심사위원회를 떠올리자.
안 좋은 이야기도 하나 생각났으니 말이다.
‘후우. 기태 그놈은, 실력도 괜찮은 놈이 왜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해가지고…….’
치형에게 우진이 예쁜 손가락이라면, 기태는 아픈 손가락이다.
비록 이번에 치팅을 해서 수상이 취소되고, 그 충격 때문인지 휴학까지 했지만.
기태는 치형이 직접 가르치기도 한, 아끼는 제자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물론 기태와 우진 사이에 얽힌 속 이야기까지 모르기에, 치형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기태를 잠시 떠올렸던 그에게, 조교가 한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그…… 교수님. 그럼 하나만 더 여쭤도 되겠습니까?”
“뭔데?”
“서우진이가 TV에 출연한다는 건,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조교의 질문에, 치형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조금 전의 웃음에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었다면, 이번에는 순수한 웃음이었다.
“자네, 그거 아나?”
“네? 어떤 것 말씀이신지…….”
“서우진이가 출연한다는 그 TV 프로 말일세.”
“예.”
“거기, 나도 아마 잠깐 나올지도 몰라.”
“네에……?”
생각지도 못했던 윤치형 교수의 말에, 조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 이상은 얘기해 줄 생각이 없는지, 치형은 말없이 웃기만 하였다.
* * *
천웅건설은 각 분기마다, 부서별로 해당 분기의 실적을 분석해서, 보고서로 작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9월인 지금은, 각 부서가 무척이나 바쁠 수밖에 없는 달이었다.
2010년도의 3분기임과 동시에, 그 3분기에서도 마지막 달이었으니 말이다.
9월 셋째 주부터 넷째 주 사이에는, 3분기의 실적 정리를 마무리해야 하는 것.
하지만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천웅건설의 직원들은 최근 무척이나 표정이 좋았다.
2분기가 시작될 때쯤부터는 계속해서 실적이 좋았던 천웅건설이었지만, 이번 3분기의 실적은 특별히 더 좋았으니 말이다.
“이야, 이거 잘하면……. 내년부턴 도급순위 두 계단 정도 올라갈 수 있겠는데?”
집무실에서 부하직원들의 보고서를 살피던 경완은, 함지박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실적들의 중심축엔 경완의 활약이 대부분 자리 잡고 있었고.
때문에 이대로 3분기가 끝나고 이 기세를 이어 연말까지 실적이 터지면, 내년에는 진급도 결코 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마포 클리오 프레스티지부터 시작해서, 최근엔 왕십리까지……. 사업장마다 전부 다 완판이라니. 이건 기적이지. 기적이야.’
건설 경기가 좋아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아파트 분양시장에서는 죽을 쑤고 있는 사업장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한데.
한 자릿수 미계약도 아니고 모든 사업장이 전부 1개월 이내 완판이라는 것은, 정말 기염을 토하는 성적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가장 고무적인 것은, 새로 런칭한 ‘클리오’브랜드의 엄청난 선전이었다.
“도급순위가 문제가 아닙니다, 부장님.”
“왜?”
“이번에 잘하면, 강남에도 깃발 하나 꽂아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하직원의 말에, 경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기 때문이었다.
‘강남 외곽도 아니고 청담동 한강 변……. 진짜 거기에 클리오 아파트를 꽂아 넣을 수 있다면, 프리미엄 이미지가 제대로 살아나겠지.’
지금 경완의 머릿속에 있는 사업장은, 바로 청담동의 선영아파트 재건축이었다.
재건축 이후 총 800세대 정도가 나올 예정인, 괜찮은 규모의 대단지 아파트.
청담 선영은 지금 시공사 수주전이 슬슬 달아오르는 상황이었는데,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천웅은 이곳에 관심이 없었다.
처음부터 이곳은, 세 개 건설사의 삼파전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도급순위 1위에 빛나는 제운건설과, 그 바로 아래 순위에서 호시탐탐 1위를 노리고 있는 SH물산. 그리고 명성건설.
영동대로 남단 한강 변에 자리 잡은 이 청담 선영아파트는, 모든 건설사가 탐내고 있는 재건축 사업장이었지만.
사실상 그 세 건설사가 달려들면, 거기에 천웅건설이 비벼보기는 힘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상반기에 클리오라는 신규 프리미엄브랜드가 런칭하면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고.
그 덕에 경쟁 구도가, 작년과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놀랍게도 최근 선영아파트의 조합장인 곽홍식이, 천웅에 접촉해오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조합원들 중 은근히 Clio 브랜드 마크를 원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면서 말이다.
선영아파트의 재건축조합 관계자들은 천웅건설이 클리오 브랜드를 들고, 입찰에 꼭 참여해주길 바라는, 그런 느낌이었다.
“청담 선영……. 거기 만약 따낼 수 있으면, 진짜 그거야말로 초대박이지.”
“이젠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봅니다, 부장님.”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그 가능성이라는 건, 아직도 1할 미만이야.”
“그렇기는 하죠…….”
재건축조합의 관계자들이 입찰에 참여하길 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해당 브랜드를 선택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괜찮은 선택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은 조건을 제시받을 수 있을 테니.
일부러 천웅건설을 더 부추긴 것이다.
물론 천웅과 클리오를 높게 평가했기에 그런 제안을 한 것도 맞다.
어쭙잖은 건설사들이 경쟁에 참여해 봐야, 제운과 SH물산에서 눈 하나 깜짝 않을 테니까.
“거기 합동 설명회 날짜가, 언제로 잡혀있지?”
“입찰 마감이 11월 말이니까……. 아마 12월이나 1월일 겁니다.”
“흠,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해야겠군.”
재건축 사업장의 수주전이란, 결국 건축주인 재건축 조합측에 어떤 건설사가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지냐는 것이다.
때문에 조합측에서 제시한 건축비를 가지고, 설명회에서 가장 멋진 설계를 내어놓는 건설사가 선택되는 것.
공사비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치킨게임에도 한계가 있다.
건설사에서 손해 보면서, 공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수주전을 준비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머리 아픈 일이다.
이렇게 경쟁이 치열한 사업장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달력을 살펴보던 경완은, 진지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보고서의 내용 안에는, 청담동 선영아파트에 대한 내용도 한자리를 차지하였다.
분기별 보고서에 들어가야 할 내용 중에는, 향후 계획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내용의 한 편에, ‘WJ 스튜디오’ 라는 이름도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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