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시너지(Synergy)
소연은 방학 내내, WJ 스튜디오에서 아주 성실히 근무했다.
공모전 상금과 알바비로 8월 말에 일주일 정도 가족휴가를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 출근하여 모형작업을 한 것이다.
놀면서 푹 쉬려고 했던 원래의 계획과는 많이 달라진 방학 일정이었으나, 그래도 그녀는 아주 만족했다.
일단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은, 역시 통장에 두둑이 꽂힌 알바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모형작업을 주구장창 하면서 석현을 비롯한 작업자들에게 배운 노하우들도, 빵빵해진 통장만큼이나 만족스러웠으니 말이다.
물론 소연은 원래 손재주가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모형작업은 손재주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엄청나게 다양한 모형재료들의 종류에 대한 지식부터 시작해서, 그 재료들을 쉽게 가공하고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노하우까지.
소연이 배운 것은 많은 경험이 없으면 알 수 없는 모형작업 기술들이었고, 이제 1학년인 소연은 앞으로도 과제를 하며 모형을 만들어야 할 일이 무척 많았으니.
이것은 그녀의 학교생활에 큰 도움이 되어줄 게 분명했다.
‘확실히……. 돈 주고도 못 배울 것들을 많이 배웠지.’
하지만 그런 만족도와 별개로 한 가지 아쉬웠던 부분도 있었다.
그것은 방학 내내 WJ 스튜디오에서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진의 얼굴을 거의 볼 수 없다는 점.
물론 석현이나 제이든이랑 투닥거리며 작업하는 것도 꽤나 재밌는 일이었지만, 우진도 함께 있었으면 작업이 더 즐거웠을 테니 말이다.
때문에 한번은, 우진이 왜 사무실에 없는지를 석현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대신, 점점 더 닮아가는 바보 듀오의 모습을 한 번 더 확인했을 뿐이었다.
“우진은 악덕 업주지.”
“맞아. 악덕 업주는 일을 하지 않아. 원래 개미지옥에선, 개미들만 일을 하는 법이라고.”
“석현 오빠, 제발 제이든 같은 소리좀 하지 말아줄래?”
“젠장, 너무 제이든 같았나?”
“제이든 같다니! 제이든같은 사람은 오직 제이든 한 명뿐이야.”
“둘이 동시에 얘기할 때 눈 감고 있으면, 누가 제이든인지 모를 것 같은데?”
“Holly shit!”
“Bloody Hell!”
“후우…….”
물론 더 꼬치꼬치 캐물어 볼 수도 있겠지만, 소연은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우진에 대해 캐묻는 것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으니까.
‘대표가 회사에 있어야지. 대체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그래서 소연은 우진이, 단지 시공 파트 쪽 일 때문에 바쁘다고만 짐작하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도장을 찍는 것으로 봐선, 어디 놀러 다니거나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과 함께 학교에 첫 등교한 월요일.
소연은 자신의 생각이, 조금 틀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 우진 오빠다!”
정확히는 첫 번째 수업이 끝나고 과실에 우진이 들어와 앉은 순간.
“우진이 형 왔다고?”
“형 휴학한 거 아니었어?”
우르르 몰려든 동기들이, 우진의 옆에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해 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야, 내가 휴학을 왜 해.”
“지난주에 아예 안 보이길래, 휴학했거나 자퇴한 줄 알았지.”
“걱정 마라. 한동안은 휴학 같은 거 전혀 생각 없으니까.”
“까비, 방송물 먹고 신나서 휴학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잖아?”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진철이랑 내기했거든. 형 아무래도 휴학한 것 같다고.”
옆에 있는 사람까지 정신이 없을 정도로, 우진을 향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동기들.
“근데 오빠. 혹시 방송 출연해?”
“아니, 잠깐. 너희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니까?”
“방학 때 혜진이가 학교 왔다가, 우연히 봤다더라고.”
“날?”
“아니. 오빠를 본 건 아니고, 오빠를 찾아다니는 연예인들을 봤대.”
“뭐……?”
우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고, 옆에 있던 소연은 당황을 넘어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소란스런 가운데 다른 이야기들은 제대로 듣지 못하고, ‘오빠를 찾아다니는 연예인’이라는 말만 귀에 쏙 들어박힌 것이다.
‘뭐? 연예인이 서우진을 찾아다녔다고……? 설마 임수하 그 여자인가?’
당황에 이어, 소연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배신감.
갑자기 임수하와 함께 다정히(?) 커피를 마시던 우진의 모습이, 소연의 눈앞에 오버랩 되었다.
게다가 방학 내내 바빴던 것이 데이트(?)라고 생각하자.
알 수 없는 분노가 더욱 끓어올랐다.
‘나는 방학 내내 작업실에 짱박아두고! 지는 연예인이랑 데이트나 하러 다니고오!’
물론 우진이 그냥 짱박아 둔 것은 아니고 꼬박꼬박 급여를 지급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소연이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이 화상 대신에 수강 신청도 해줬는데…….’
누군지도 불분명한 동기로부터 들은 한 마디에, 순식간에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소연.
하지만 다행히도 소연의 그 오해는, 금방 등장한 혜진에 의해 해결될 수 있었다.
“난 그거, 무슨 프로그램인지도 알지롱!”
“뭐?”
“정말?”
“<우리 집에 왜 왔니>라고, 곧 KBC에서 방영될 예능인데, 윤재엽이랑 유리아 나오는 예능이래.”
“오오오……! 대박!”
“우진 오빠가 거기에 일반인 게스트로 섭외됐던 모양인데……. 맞지?”
혜진의 물음에 모든 동기들의 시선이 우진을 향했고.
아직도 좀 어리둥절한 표정이던 우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음……. 맞아. 맞기는 한데…….”
우진이 어리둥절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카페 프레스코에서 촬영을 했던 것과 별개로, 학교에서 촬영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으니 말이다.
자신이 출연하지 않는 씬에 대해서는 공PD에게 들은 바가 없었으니까.
“대체 혜진이 넌 누구한테 들은 거야?”
우진의 물음에, 혜진은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혜진을 향한 그 물음에 먼저 대답한 것은, 막 과실에 들어온 제이든이었다.
“이 제이든님이 알려줬지. 제이든님은 원래 모르는 게 없거든.”
그리고 그것은, 제이든의 실수였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이든의 등짝으로 소연의 손바닥이 찰지게 틀어박혔으니 말이다.
“야, 제이든!”
화끈거리는 등짝의 통증에, 제이든의 표정은 울상이 되었다.
* * *
이번 방학 때 처음 WJ 스튜디오에서 일하게 된 신입사원(?) 한소연과 달리, 제이든은 이미 WJ 스튜디오의 터줏대감이었다.
그래서 제이든은 시공 파트 총괄담당자인 진태와도, 제법 친한 사이였다.
“진태 횽! 오늘도 바빠?”
“오, 제이든. 일찍 나와 있었네.”
“제이든이야 항상 성실하지. 제이든은 노력하는 천재거든.”
소연은 시공 파트 쪽 직원들과 친분이 아예 없었기에 말을 걸거나 우진에 대해 물어보기 애매했지만.
제이든은 언제든 진태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우연히 혜진을 만났던 그 날.
제이든은 학교에서 봤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진태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진태 횽. 요즘 우진은 뭘 하는 거야?”
“대표님? 대표님은 왜.”
“아니, 어제 학교에 우진 심부름을 하러 갔었는데, 왠 촬영팀이 와서 우진을 찾더라고.”
“음……?”
“진태 횽이 요즘 맨날 우진이랑 같이 다니잖아. 그래서 무슨 일인지 알 거라고 생각했지.”
제이든의 질문을 들은 진태는, 곧바로 그에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때는 카페 프레스코에서 촬영이 있기조차 전이었기 때문에, 제이든의 말이 곧바로 이해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자, 제이든의 얘기가 뭐와 관련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거 혹시, <우리 집에 왜 왔니> 촬영 아니었어?”
“오우! 맞아. 프로그램 이름이 그거였던 것 같아. 역시! 진태 횽은 뭔가 알 줄 알았어.”
진태는 우진이 <우리 집에 왜 왔니>에 섭외되었다는 것을 꽤나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카페 프레스코에서의 촬영에 대한 일정을 최대한 빨리 잡아야 했었기 때문에.
현장의 담당자인 그에게는 우진이 미리 알린 것이다.
때문에 ‘촬영팀’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진태가 그것을 떠올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표님이 거기, 일반인 패널로 섭외되셨다고 하더라고.”
“Bloody Hell! 그럼 유리아랑 같이 TV에 나오는 거야?”
“아마 그렇겠지?”
“젠장! 비겁한 우진!”
“뭐가 비겁해?”
“그런 일이 있으면, 이 제이든 님도 당연히 데리고 나가야지!”
하지만 제이든은 그때 들었던 이유를 따로 소연에게 알리지 않았고, 그것은 사실 실수였다.
원래 같았더라면 소연에게 신이 나서 썰을 풀어 놓았을 텐데.
하필 그날 바쁜 일이 있어, 말한다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제이든이 등짝을 맞은 이유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제이든은 억울했지만 말이다.
“야, 제이든!”
“오우! shit! 왜 때리는 거야 소연!”
“너, 나 좀 따라와 봐.”
“구해줘, 우진! 마녀가 날 잡아가려 해!”
“한 대 더 맞을래?”
“…….”
소연은 제이든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고, 그곳에서 좀 더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집에 왜 왔니>가 어떤 프로그램인지까지, 대략적으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소연의 흥분은, 조금 가라앉을 수 있었다.
“흐음……. 그런 거였단 말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연의 배신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소연은 학교에서 자신이 우진과 가장 친한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우진과 관련된 이런 빅 뉴스를 본인만 모르고 있었으니, 다른 의미에서 배신감이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연은 우진에 대한 생각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옆에서 가만히 서 있던 제이든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왔으니 말이다.
“아니, 그런데 소연. 이걸 왜 나한테 묻는 거야? 우진에게 물으면 되잖아?”
“음? 그, 그건…….”
소연의 당황한 기색을 발견한 제이든이, 살짝 눈을 빛냈다.
“헤이, 소연.”
“어?”
“혹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소연의 앞으로 한 발짝 다가오는 제이든.
그에 화들짝 놀란 소연이, 고개를 격렬히 휘저으며 말했다.
“뭐? 아니야 그런 거!”
“뭐가 아닌데?”
“그, 그게. 그러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당황한 소연은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그녀의 반응에, 제이든은 모든 걸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소연은 그랬던 거였군.”
“그게 무슨 말이야?”
“오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어.”
“의……심? 그게 뭔데?”
얼굴까지 빨개진 소연은, 불안한 표정으로 제이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이든의 꿈틀거리는 입술이, 시한폭탄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제이든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이제 솔직히 말해도 돼, 소연.”
“뭘!”
“소연은 Spy였던 거잖아.”
“뭐라고?”
소연의 입에선, 헛바람이 쑥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제이든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 어이없어서인지, 긴장이 풀리며 힘이 쭉 빠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연이 그러던 말던, 제이든은 신이 나서 계속 이야기했고…….
“방학 동안 일을 너무 열심히 할 때부터 알아봤어.”
“…….”
“우리 WJ 스튜디오의 노하우를 어딘가에 팔아넘기려던 거였군.”
“후우…….”
“이런 걸 산업스파이라고 하는 거지?”
드디어 인내심에 한계가 온 소연이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든.”
“후후, 이 제이든 님의 날카로운 추리력에 당황한…….”
“시끄러워.”
“…….”
단숨에 풀 죽은 표정이 된 제이든을 보며, 소연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