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시너지(Synergy)
“사실, 대표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부분이 좀 있어서 모셨습니다.”
석중의 입에서 문득 나온 말에, 우진은 음식을 들던 손을 잠시 멈췄다.
그렇게까지 묵직한 어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나온 이야기도 아니다.
해서 진지한 표정이 된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말씀하시죠. 제가 도움 드릴 수 있는 부분이라면…….”
우진과 시선을 마주친 석중이, 눈을 빛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첫 미팅 때 말입니다.”
“예, 대표님.”
“브랜딩이란 담금질이라는 말씀을 하셨었죠.”
“네. 제가 그랬었죠.”
“그때 그 이야기가 정말 깊게 와닿아서…….”
잠시 뜸을 들인 석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내부 직원들이랑 같이, 브랜딩 전략을 다시 짜고 있거든요.”
석중의 이야기를 들은 우진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그때 우진이 꽤나 열변을 토하기는 했었지만, 그렇다고 석중이 이렇게까지 그 이야기를 깊게 생각할 줄은 몰랐으니까.
아무리 그가 우진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하더라도.
나이로 보나 사회적 위치로 보나 새카맣게 어린 우진의 말을 이렇게까지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생각보다 더 그릇이 큰 사람이었나?’
우진이 속으로 감탄하는 것과 별개로, 석중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런데 이 카페사업의 브랜딩이라는 게 말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인테리어랑은 떼어놓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렇죠. 카페 사업이 단순히, 커피를 파는 사업은 벗어난 지 오래니까요.”
우진의 첨언에, 석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곧, 석중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말씀 대롭니다. 그래서 제가 정의한 카페 사업은……. 이곳에서만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파는 사업입니다. 그게 커피의 맛이든, 쉴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든……. 아니면 좋은 사람들과의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든 말이죠.”
우진 또한 고개를 끄덕였고, 석중의 입이 다시 떼어졌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를 비롯한 직원들은 공간과 브랜딩을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해서 이렇게 오늘 대표님을 다시 모셨습니다.”
“이미 카페 프레스코라는 브랜드는, 서 대표님이 디자인해주신 이 공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브랜드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우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석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실 우진은 지금, 석중에게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이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벌써 장기계약 이야기를 꺼내시려나?’
우진이 처음부터 노렸던 것.
그것은 바로 카페 프레스코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터뜨려, 전국 곳곳에 퍼져나갈 모든 직영점과 가맹점의 인테리어를 전부 WJ 스튜디오에서 맡는 것이었다.
만약 우진이 기대한 만큼 카페 프레스코가 터진다면 최소 수천 단위가 넘는 프랜차이즈 카페가 생겨날 것이고.
그 모든 곳의 인테리어를 우진과 WJ 스튜디오에서 직접 맡는다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액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진의 생각에 지금 강석중의 입에서 나올 만한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었다.
대화의 흐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나야 땡큐지만…….’
하지만 그렇게 예상하던 우진은, 다음 순간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석중의 입에서 이어진 다음 말이, 생각조차 못 했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저희 카페 프레스코의 브랜딩 외주입니다.”
“네……?”
“물론 브랜딩 전체를 서 대표님께 맡기겠다는 얘긴 아닙니다. 다만 지속적으로 브랜딩 전략 수립에, 대표님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이야기지요.”
석중의 이야기를 들은 우진은,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만약 우진이 브랜딩 전문 업체라면, 이것은 충분히 사업적인 제휴가 될 수 있는 제안이다.
하지만 아무리 우진이 통찰력이 있다 해도 그쪽은 전문 분야가 아니었고.
때문에 이 제안이 정확히 뭘 원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 주시겠습니까?”
우진의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석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좀 찾아봤는데, 업계 계약방식에도 이런 케이스는 없더군요.”
“그렇겠죠. 설계사무소에서 브랜딩을 하는 일은 없으니까요.”
“하하, 하지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계약서를 만들 수 있고, 또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치를 책정할 수 있는 게……. 자본주의의 매력 아니겠습니까?”
우진은 다시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고, 석중이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표님께서 저희 브랜딩 전략 수립이 끝날 때까지 참여해 주시는 조건으로, 개런티를 드리거나 외주비용으로 목돈을 드릴까도 생각했었습니다.”
생각했었다는 말은,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다.
때문에 우진의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래서요?”
“하지만 그건 서로 윈윈하기 힘든 방향이 될 것 같고, 해서 제가 드리고 싶은 제안은…….”
석중의 눈이 살짝 빛났다.
“브랜딩 서포트 조건이 들어간, 프랜차이즈 인테리어의 장기계약섭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우진은, 그제야 석중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재벌가의 핏줄이라는 건가?’
지금 석중이 우진에게 내민 제안은.
우진의 입장에서도 매력적이면서, 석중 또한 충분한 이득을 챙길 수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장기 계약권에 대한 입찰을 걸 생각이 없으니, 이런 식으로 원하는 부분을 얻어가겠다는 거네.’
우진이 예상했던 대로 석중은, 카페 프레스코의 모든 직영점과 가맹점의 인테리어 공사를 WJ 스튜디오에 맡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이권이 걸린 사업권이었고, 그래서 그냥 덥석 안겨주기에는 조금 아까울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우진에게 따로 어떤 대가를 요구하기에는 받은 도움이 많았으니.
이렇게 ‘부탁’이라는 명목으로 브랜딩 전략에 대한 도움을 받으면서 장기계약을 같이 묶어버린 것이다.
사실 전문가가 아닌 우진에게 브랜딩 전략 수립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가치로 환산하기에는 무척이나 애매한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내게 장기계약권이 있으면, 브랜드가 흥할수록 WJ 스튜디오의 매출도 늘어날 테니……. 나로서는 열심히 도울 수밖에 없고 말이야.’
“하하.”
우진은 기분 좋게 웃었다.
어차피 브랜딩에 도움을 주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결국 장기 계약권을 빨리 확정지을 수 있다면, 이것은 WJ 스튜디오에도 적잖은 이득이었으니 말이다.
확실한 사업권이 있는 상황은 그렇지 못한 상황일 때 보다, 훨씬 기업 차원에서 운신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니까.
“좋습니다, 강 대표님. 장기 계약권을 주시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우진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던 석중 또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 마음이 한결 편합니다.”
하지만 석중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신, 대표님께서 이렇게 제 부탁을 들어주셨으니, 저도 한 가지 선물을 드리려 합니다.”
“선물이라면……?”
“이번에 1호점을 작업하면서 맞춰드렸던 디자인 설계단가를, 5퍼센트 추가로 인상해드리겠습니다.”
“……!”
“브랜딩 개런티는 책정해드리기 애매하지만, 이 정도는 제가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어떻습니까?”
우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석중이 브랜딩 개런티를 얼마까지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장기계약에서의 설계단가 인상은 꽤나 매력적인 조건이었으니 말이다.
시공비용과 달리 설계비용은 순이익율이 무척이나 높은 매출이었고.
장기적으로 그것을 5퍼센트나 더 쳐주겠다는 것은, 수십억 단위에 가까운 큰 이익을 볼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정말, 그렇게 해주십니까?”
석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해드리지 않을 것 같았다면, 괜히 이런 이야기를 꺼낼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어떤 사업 관계 안에서의 거래라기보단 석중의 말대로 선물 같은 개념이었고, 그래서 우진은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훌륭한 선물이네요. 주신다면 거절 않습니다.”
“이거 이거, 한 번 정도는 사양도 해주시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표님 마음 바뀌시면 어쩌려고요. 그럴 순 없죠.”
우진과 석중은 서로를 마주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대신, 장기계약서에 이 조항 하나는 넣었으면 합니다.”
“어떤 조항 말씀이십니까?”
“저희 쪽이든 WJ 스튜디오 쪽이든. 언제든 서로의 협력관계가 불만족스럽다면, 그 즉시 파기 가능하도록 말입니다.”
만약 우진이 이렇게 계약서만 챙기고 WJ 스튜디오의 시공 품질이 계속 떨어진다면.
카페 프레스코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막대한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이 조항은 그런 리스크를 방지코자 하는 차원이었고, 때문에 우진으로서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좋습니다. 대신 계약이 파기되더라도, 이미 착공에 들어간 모든 공사에 대한 대금은 전부 지불하는 것으로 해야겠죠. 반대로 저도 진행 중인 모든 공사를 책임지고 마무리해야 하겠고요.”
“물론입니다.”
석중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우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우진은 그 손을 힘차게 맞잡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서 대표님.”
“저도 마찬가집니다.”
이것으로 WJ 스튜디오는, 또 한 단계 크게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 * *
얼마 남지 않았던 8월은, 금세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9월이 되었지만, 우진에게 가장 바쁜 일정은 학교의 개강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우진은 개강 첫 주에, 아예 등교조차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여기, 모형 파트에 있던 짐은 전부 이쪽으로 옮겨주시고요! 아! 그건 시공 파트 겁니다. 이쪽으로요!”
“제 짐은 이쪽으로 넣어주세요. 여기가 대표실입니다.”
7월에 우진이 계약했던 지식산업센터가 전부 완공되었고.
우진은 입주 기간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학교 앞의 사무실을 전부 이전했다.
시공 파트가 급속도로 커지면서, 기존에 쓰던 사무실이 턱없이 좁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사실상 원래의 작업실은 거의 모형파트를 위한 공간이었고, 시공팀은 거의 외근 위주로 움직였었는데.
이제는 시공팀에게도 충분한 공간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으니, 이사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무실이 좁아서 한번 넓힌 지, 고작 서너 달 만의 일이었다.
“와, 이제 진짜 회사 같네요, 실장님.”
“그러게. 인테리어까지 싹 했더니, 진짜 그럴싸하고 괜찮네.”
지금까지 그냥 반장님 혹은 소장님이라 불리던 진태에게도, ‘시공관리실장’이라는 새로운 직책이 생겼다.
이제 시공 파트 직원만 열 명이 넘는 상황이었으니, 책임자인 진태에게 제대로 된 직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모형 파트의 총 책임자인 석현에게도 직함이 생긴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어이, 강 팀장!”
“그래. 이제부터 그렇게 불러줘 제발.”
“팀장 칭호가 마음에 드나보지?”
“그렇다기보단……. 네가 자꾸 석구라고 부르니까 그렇지.”
“아하.”
“내가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알겠으니까 사무실 정리나 좀 도와 석구.”
“젠장!”
우진은 석현을 놀리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부른 것이었지, 사실 직원들 앞에서는 당연히 석구라는 말을 안 쓴다.
진태가 직원들 앞에서 우진에게 꼬박꼬박 대표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듣는 사람이 없을 때는, 석현을 놀리는 재미를 포기할 수 없는 우진이었다.
‘슬슬 정리는 좀 되는 것 같은데.’
사무실에 짐이 전부 다 들어오고 그럴싸한 모양새가 잡히기 시작하자. 우진은 한쪽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슬쩍 응시하였다.
‘지금 출발하면 조금 지각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학교에 가야겠지?’
사무실이 옮겨진 후 가장 불편한 것은 학교와의 거리였지만, 그것도 크게 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성수로 이사했다고 해서 학교 앞의 작업장을 없애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곳은 그곳대로, 우진의 과제 작업실 겸 서브 모형제작실로 한동안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성수동으로 이사하면서, 생각지 못했던 직주근접의 수혜를 입게 된 직원이 하나 있었다.
“오빠, 오늘부턴 학교 간다며. 이제 슬슬 출발하는 게 어때?”
그건 바로 이사한 사무실로부터 걸어서 10분 거리에 집이 있는, 알바생(?) 소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