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77화 (77/315)

77화

첫 번째 촬영

오늘 현장의 작업이 80퍼센트쯤 끝나갈 무렵부터, 우진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원래대로라면 현장에서 계속 작업을 하다가 촬영팀을 맞을 생각이었지만, 그것은 절대로 안 된다며 공진영 피디가 기함했으니 말이다.

[우진 씨, 저희가 샵 예약해 둘 테니까, 당장 그쪽으로 이동해요.]

[샵……이요?]

[오늘 촬영인데, 당연히 머리도 만지고 화장도 하고 해야지. 우진 씨가 무슨 윤동빈이에요?]

[그, 그건 아니지만…….]

[비주얼 깡패로 유명한 배우님들도, 촬영 날은 무조건 세팅하고 오세요. 그러니까 잔말 말고……. 할 수 있는 모든 튜닝은 다 하고 오세요. 알겠죠?]

윤동빈은 2000년대 초반부터 미남의 상징으로 통하던, 잘생긴 영화배우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그 정도 생긴 거 아니면, 당장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하고 분칠도 하라는 얘기다.

‘20 평생. 아니, 40 평생 화장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는데…….’

우진에게는 샵에서 치장을 하는 게, 너무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화장은커녕 로션도 거의 안 바르는 데다, 왁스조차 제대로 써본 적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 바닥에서는 또 이 바닥의 전문가 이야기를 듣는 게 맞았기 때문에, 우진은 군말 없이 샵으로 가 고분고분 모든 세팅을 받았다.

무려 세 시간이 넘게 걸린, 대장정 끝에 말이다.

그리고 이미 돌아오는 차 안에서부터, 우진의 정신은 혼미한 상태였다.

‘나, 방송 괜히 한다고 한 건 아닐까…….’

WJ 스튜디오의 인지도를 올려야 한다는 일념 하에 적극적으로 자기 어필을 했던 우진이었건만.

방송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녹초가 되어버린 것.

우진에게는 머리를 하고 화장을 하는 세 시간이, 같은 시간 동안 목공 작업을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든 것처럼 느껴졌다.

‘휴우. 이것도 적응이 돼야 하는데…….’

하지만 시간에 맞춰, 촬영장. 그러니까 카페 프레스코의 현장에 도착했을 때.

우진은 지금까지 쭉쭉 진이 빠졌던 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오셨네요, 우진 씨.”

“피디님, 와계셨네요.”

“이야, 역시 좀 꾸미니까, 인물이 사네요 살아.”

반갑게 맞아주는 공진영 PD를 향해 우진이 멋쩍게 대답하였다.

“으, 저는 좀 제 얼굴 아닌 것 같고 어색한데…….”

“그거야 뭐, 금방 적응될 거예요.”

“제가 너무 늦게 온 건 아니죠?”

우진의 물음에, 공PD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타이밍 아주 좋아요.”

“네?”

“저쪽에 세분 촬영 중이신 거 보이죠?”

“그, 그러네요.”

“저쪽으로 가서, 자연스럽게 인사 나누세요.”

“인사요? 그냥 인사?”

“네. 그러니까 긴장할 것 없이, 말 그대로 인사하시면 돼요.”

우진은 공진영 PD로부터 정말 최소한의 언질만 받은 직후.

뭔가 숨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카메라 앞에 투입된 것이다.

사실 우진은 공PD가 촬영을 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촬영을 중지할 테니 가서 인사부터 나누라는 것인지.

그것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 걸어간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진을 가장 먼저 발견한 임수하가, 반가운 표정으로 손짓했다.

“엇 대표님! 여기!”

임수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출연진들의 시선이 곧장 우진을 향했다.

“우왓! 언니! 내 최애 카페 디자인해주신 분이 바로 이분이에요?”

“뭐? 언제부터 또 여기가 네 최애 카페가 된 거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러니까, 대충 십오 분 전?”

그러자 시작부터 우진이 정신 차리기 힘들 정도로, 시끌벅적하게 대화를 나누며 그를 향해 다가오는 재엽과 리아.

덕분에 우진은 혼이 반쯤 빠져나갔지만, 그것과 별개로 촬영은 아주 스무스하게 잘 진행되었다.

윤재엽의 이름 앞에 따라다니는 ‘예능신’ 혹은 ‘국민MC’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저희가 갑자기 찾아와서, 좀 당황하셨죠, 대표님?”

“당황은 무슨. 대본 읽을 필요 없어 유리아.”

“아씨, 오빠. 대본은 무슨 대본이야. 나 대본 못 외우는 거 몰라?”

“됐고. 촬영은 처음이라 조금 떨리시죠, 우진 씨?”

“아, 네네. 갑자기 카메라 앞으로 끌려 들어와서…….”

“와, 이 사람들 좀 봐. 대본 그냥 무시해 버리네?”

“방금 전까지 대본 아니라며.”

“당황스럽다, 진짜. 피디님. 이래도 돼요? 예능은 원래 이렇게 찍는 거예요?”

예능 초짜인 우진과 임수하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윤재엽과 유리아의 대화만으로 넘치도록 뽑히는 분량.

“자, 그럼 우진 씨. 저희가 왜 우진 씨를 찾아왔는지는 들으셨죠?”

“네. 뭐, 임수하 배우님께 들었죠.”

윤재엽이 툭 하고 우진의 말문을 틔우자, 옆에 있던 유리아가 재빨리 그 옆에서 말을 받는다.

“저희, 두영 오빠네 이기고 싶어요, 대표님.”

“야, 리아. 너 너무 훅 들어가는 거 아니냐?”

“오빤 좀 가만히 있어 봐. 나 지금 여기 카페 보고 꽂혔단 말이야. 서 대표님 무조건 우리가 모셔가야 해.”

“야, 수하 씨한테 프로그램에 대한 얘기까진 들으셨다고 해도, 우리 소개는 하고 시작해야지.”

윤재엽과 유리아가 자연스레 우진에게 말을 걸며 이야기를 주도하자, 우진도 어느새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대화할 수 있었다.

촬영이 처음이기에 긴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긴장이 사실 SPDC 최종프레젠테이션 때만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우진이 자연스레 웃으며, 재엽과 리아를 향해 먼저 입을 떼었다.

“하하, 그러실 필요 없어요. 두 분은 제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오……! 정말요?”

“요즘 두 분 모르면 간첩 아닙니까.”

이어서 우진은 재엽의 리드에 맞춰 간단한 자기소개를 끝내었고, 그것으로 촬영이 한번 일단락되었다.

도입부 촬영의 그림이 대충 나왔으니, 이제 본격적인 촬영을 준비하는 것이다.

다행인 건 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우진에게 숨 돌릴 시간이 좀 주어졌다는 것이다.

“우진 씨. 지금 잘하고 계시니까, 너무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감사합니다. 뭐, 재엽 씨나 리아 씨가 하도 말씀을 잘해주셔서…….”

“아니에요 우진 씨, 이정도면 방송 체질이신 것 같은데요? 첫 촬영에 이렇게 안 떠는 분도 드물어요.”

재엽과 리아의 칭찬에 이어, 카메라 뒤편에 서 있던 공PD도 우진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리아 씨 말이 맞아요. 우진 씨 진짜 잘하고 계시니까……. 앞으론 더 잘해주세요. 알겠죠?”

눈을 찡긋하며 얘기하는 공진영 PD를 보며, 윤재엽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하였다.

“아니, 피디님. 잘하는 친구한테 왜 부담을 주시고 그래요.”

“부담 드리면 더 잘하실 것 같아서.”

그리고 한 십 분 정도가 지났을까?

“PD님! 세팅 끝났습니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다시 촬영이 재개되기 시작하였다.

* * *

본편 촬영의 시작은, 우진과 수하에게 포커싱이 맞춰졌다.

두 사람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부터, 장면이 시작된 것이다.

수하에게 들은 이야기가 재밌었는지, 공진영 PD는 이 내용도 방영분에 넣고 싶어 했고.

그 얘기가 딱히 숨길만 한 내용도 아니었기에, 두 사람도 흔쾌히 그러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까 수하 언니는, 아파트 청약하러 갔다가 우진 씨랑 알게 되신 거예요?”

“그렇다니까. 내가 또 불의를 보면 잘 못 참잖아. 새치기하는 줄 알고 잡으러 갔었지.”

“음, 그랬나? 언니 원래 그런 거 잘 참는 스타일 아니었어요?”

“아니거든!”

가벼운 농담 속에, 출연진들의 대화는 자연스레 이어졌고.

우진과 수하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는, 황당하면서도 꽤나 흥미로운 것이었다.

“진짜 그렇게 만났는데, 알고 보니 내 팬이시더라고.”

“우진 씨. 솔직히 얘기해 봐요. 사실은 그냥, 팬인 척 한 거죠?”

“하하, 아니에요. 제가 수하 씨 팬인 척을 왜 해요.”

“리아, 너 자꾸 얘기 끊을래?”

“아, 미안. 미안.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언니?”

이제 우진과 마찬가지로 분위기에 완전히 적응한 수하는,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으면서 당시의 상황을 현장감 있게 설명했다.

“내가 거기서, 투자 상담까지 받았다니까?”

“투자 상담?”

“무슨 부동산 투자 강의라도 듣는 줄 알았어, 진짜.”

그 얘기는, 꽤나 몰입감 있는 스토리였으며.

“대박. 우진 씨, 방송 끝나고 저도 상담 좀 해 줘요. 나 진짜 좀 위급해.”

“이 오빠는 또 왜 끼어들어?”

“알잖아, 나 좀 슬픈 사연 있는 거.”

“그러니까 압구정에 집은 왜 사서…….”

일 년 전쯤 압구정에 매입한 집의 가격이 떨어진 것을 개그 소재 삼아, 중간에 훅 치고 들어온 윤재엽 또한 이야기에 재미를 더해주었다.

“어쨌든 그러니까 우진 씨. 알겠죠?”

“…….”

“나, 진심이야. 도와줘야 돼!”

촬영 분위기는 시종일관 훈훈하게 흘러갔다.

제작진이 중간에 따로 핸들링할 것도 없이, 자연스레 재미있는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촬영이 한 번 더 일단락된 뒤.

이제 카페 프레스코가 메인이 될, 마지막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공진영 PD가 기획한 <우리 집에 왜 왔니>는, 단순히 1차원적인 재미만을 추구하는 예능이 아니었다.

예능이 주는 깨알 같은 재미를 기본으로 가져가면서도.

누구에게나 가까이 있는 ‘인테리어’와 관련된 컨텐츠를 베이스로, 시청자들의 지식욕과 호기심 충족에서 오는 고차원적인 재미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번 촬영이 이뤄지는 공간인 ‘카페 프레스코’에 대한 설명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와 동시에 공PD에게는 가장 걱정이 되는 부분이기도 했었다.

자칫 전문적인 내용 위주로 너무 지루하게 촬영이 흘러가 버리면, 과감히 편집하고 최소한의 내용만을 방영할 생각까지 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공PD의 그러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게 되었다.

우진의 입에서 시작된 카페 인테리어에 대한 설명은, 공진영이 듣기에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우진은 결코 지루한 얘기들을 꺼내지 않았다.

“우리가 아주 흔하게 쓰는 용어. 빈티지(Vintage)란, 원래 포도를 수확하여 와인을 담근 ‘그 해’를 의미합니다.”

“포도는 일정 수준의 당도와 각종 양분을 충분히 함유해야 와인으로 만들 수 있는데, 해마다 일조 시간과 강수량 등, 포도 농사의 기후조건이 다르니……. 어떤 해에 생산된 포도가 와인의 원료였느냐에 따라 와인의 품질을 예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빈티지 디자인이란, 오래 되어도 그 가치를 잃지 않은 디자인(oldies-but-goodies). 혹은 숙성된 그 오랜 기간에 의해 아름다움을 발하는 디자인. 그래서 오래되었음에도 새롭게 느껴지는 디자인(new-old-fashioned)을 의미합니다.”

“조금 더 나아가선, 시대와 유행을 타지 않는 최고의 디자인이라는 의미도 되지요.”

“해서 제가 이 카페 디자인에 담은 빈티지의 가치는, 그 복합적인 아름다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래된(oldie) 것의 아름다움에 현대적(modern)이고 세련된 정제미를 담아, 커피라는 오래된 식문화의 감성을 공간에 표현한 것이지요.”

공진영 피디는 우진이, 타고난 달변가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아주 재밌게 한다는 의미에서의 달변가라기보다는.

자신의 머릿속에 담겨있는 어떤 가치나 정보에 대한 전달을, 청자로 하여금 흥미를 갖고 들을 수 있도록 듣기 좋게 말할 줄 아는 재주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 프로는 다큐가 아니기 때문에, 우진의 입에서 나온 모든 이야기들을 화면에 담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좋은 소스들을 가지고 재밌게 포장하는 것은 PD인 자신이 해야 할 일.

게다가 옆에서 충분한 리액션을 보여주는 출연진들도 있었으니, 컨텐츠를 요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좋아, 앞으로도 이렇게만 가면……!’

카메라의 뒤편에서 촬영장을 지켜보던 공진영 PD는, 저도 모르게 대본을 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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