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76화 (76/315)

76화

첫 번째 촬영

삼송역의 남쪽에는 강이 흐른다.

3번 출구에서 나와 그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작은 규모의 개천인 창릉천이 서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그 강변을 따라 서쪽으로 걷다 보면 작은 다리가 나타나고, 그 다리를 건너 창릉천의 반대편으로 넘어가면…….

개발되지 않은 낙후된 동네(혹은 논밭)위에 홀로 번쩍거리며 서 있는 커다란 건물이, 바로 KBC의 일산 사옥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KBC 사옥의 위치는 고양시 덕양구다.

일산동구나 서구로 칭해지는, 일산신도시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KBC의 신사옥이 이곳에 지어지면서, 본래 일산서구 일산동 소재의 사옥에 있던 모든 인프라가 이곳으로 이전해 왔고.

때문에 KBC의 직원들은 물론 연예인들까지도, 이곳을 KBC의 일산사옥이라 부른다.

고양시 시민인 유리아는, 예전부터 그게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재엽 오빠. 여기 일산 아니라니까? 여긴 엄연히, 고양시 덕양구라고!”

“그런고양?”

“아, 제발! 이상한 아재 개그 하지 마. 부탁이야.”

“시른데!”

“설마 그 개그……. 방송에서도 써먹으려는 건 아니지?”

“당연한고 아니양?!”

“으악! 제에발! 오빠 나이가 이제 서른다섯이라고! 서른! 다섯!”

KBC 사옥에서 만난 유리아와 윤재엽은, <우리 집에 왜 왔니>스탭들과 함께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사옥에서 촬영장까지의 거리는 걸어서도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웠지만.

그래도 촬영 장비들과 함께 이동해야 했으니, 두 사람은 방송국 벤을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후. 이상한 오빠 때문에 걱정은 좀 되지만……. 촬영장은 가까워서 좋네.”

“너나 가깝지. 난 집에서 오는데 한 시간도 넘게 걸렸어.”

“누가 압구정에 살래?”

“이거 찍자고 일산으로 이사할 순 없잖아.”

“여기 덕양구라니까?”

“휴우. 덕양이던 일산이던.”

소속사가 같은 재엽과 리아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둘은 시답잖은 잡담을 떨고 있었다.

윤재엽이 입을 열었다.

“오늘 촬영부터, 그 임수하 배우님도 합류하시는 거지?”

“맞아.”

“나 그분 처음 뵈니까, 네가 대화 리드 좀 잘 해줘라.”

“지난번 사전미팅 때 봤잖아?”

“그때 뭐 몇 마디나 나눴겠냐.”

“알겠어. 수하 언니 성격 좋으니까, 별로 어려울 건 없을 거야.”

유리아는 임수하와 최근 같은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녀들 사이에는 친분이 있었지만, 윤재엽은 아니었다.

오히려 연예계에서 발이 넓은 것은 윤재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뭐, 리아도 있으니까, 촬영이 어렵게 꼬이지는 않겠지.’

윤재엽은 요즘 예능계의 떠오르는 별이었다.

시청자들에게 ‘예능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예능에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평가받는 인물.

하지만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과 달리, 윤재엽의 예능감은 타고난 게 아니었다.

많은 예능인들이 다 그렇겠지만, 그의 감각 또한 끊임없는 노력과 고민의 산물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우리 집에 왜 왔니>에 출연하기로 결정한 윤재엽의 판단은, 단순히 감에 의존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매니저나 소속사 관계자들보다도 공PD의 제안서를 꼼꼼히 읽었으며, 심도 있는 고민 끝에 여기에 출연키로 확정한 것이었다.

‘너무 구멍이 크지만 않으면……. 확실히 재밌을 만한 방송 포맷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촬영장으로 향하는 그의 머릿속에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방송에 대해 열심히 분석한다고 해도.

일반인 패널들에 대한 정보까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함께 프로그램을 이끌어 갈, ‘전문가’ 포지션의 출연자들 말이다.

‘변수는 결국. 전문가로 섭외됐다는 서우진이라는 사람인데…….’

물론 윤재엽이, 우진에게 예능감이 없을까 봐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일반인에게 예능감을 바라는 것은 너무 과한 기대였으니까.

하지만 예능감과 별개로 캐릭터 간의 시너지라는 게 있다.

만약 그가 낯을 좀 가리고 방송에 버벅인다 하더라도, 함께 출연하는 다른 출연진들과의 케미만 어떻게 맞아 떨어진다면.

그 안에서 또 충분한 재미를 포착하여 끌어낼 자신이 있는 윤재엽이었다.

하지만 출연진들과 친해지지도 못하고 그가 완전히 따로 놀게 된다면, 그것은 아무리 윤재엽이라고 해도 어떻게 구제가 불가능할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외모도 괜찮다고 했으니……. 여자 출연자들이랑 시너지가 좀 나면 그림 괜찮게 뽑힐 텐데.’

윤재엽은 임수하와 달리, 오히려 우진의 ‘전문성’에 대한 부분을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런 부분은 당연히 제작진 딴에서 잘 검증했으리라 믿었고.

예능의 재미나 프로그램의 흥행과는, 크게 상관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어차피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서 수준 차이가 얼마나 나건 간에 일반인이 보기엔 놀라운 실력을 가진 사람들.

요리 경연프로만 보더라도.

출연한 요리사가 보여주는 음식의 맛보다는, 출연진의 입담이나 재미있는 상황들이 훨씬 더 흥행요소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상대 팀으로 설정된 MC박두영에게 비교적 더 유명하고 경력있는 전문가인 ‘김기성’이 배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엽은 오히려 기뻐했었다.

뻔한 전문가 롤을 가진 김기성보다는, 재밌는 백 스토리가 많은 서우진이 예능차원에서 요리하기는 훨씬 더 좋은 재료였으니까.

물론 <우리 집에 왜 왔니>의 포맷이 양팀간의 ‘경연’을 메인 컨텐츠로 가져가기는 하지만.

그 경연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재엽이 볼 때 전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어느 팀이 이기던 재밌는 장면만 많이 나온다면, 그게 다 같이 흥하는 길이었으니까.

끼이익-

그래서 촬영장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엽은 장소에 대해 별생각 없이, 벤에서 내려 스텝들의 안내에 따라 이동하였다.

촬영장으로 사용될 카페의 디자인이 어떤지는, 딱히 궁금하지 않은 재엽이었다.

“자, 도착했습니다! 장비 세팅 시작하세요!”

다만 그의 머릿속에는, 방송을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관건은 새로운 출연진들과 만나는 부분이 최대한 자연스럽고 재밌게 빠져야 하는 건데…….’

유리아가 중얼거리듯 옆에서 재잘거렸지만…….

“여기, KBC에서 진짜 가깝네. 커피 맛 괜찮으면, 종종 와서 마셔야겠어.”

재엽은 계속 진행과 분량에 대한 고민뿐이었다.

‘적당히 리액션 보여주고 카페 인테리어 칭찬해 주다가……. 리아랑 만담이나 하면서 분량 챙겨야 하나?’

대략 계획이 세워지자, 재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카페에서의 촬영은 방송에 그렇게 길게 나가지 않는다고 들었다.

단지 합류하게 될 일반인 출연자인 서우진의 전문성을 보여주기 위한 짧은 장면일 뿐.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하던 윤재엽은, 잠시 후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스텝들이 촬영장 안으로 하나 둘 들어가면서, 현장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와, 뭐야? 여기가 카페라고?”

“우와! 분위기 장난 아닌데?”

재엽의 시야에도 곧, 카페 내부의 전경이 가득 들어찼으니 말이다.

“……!”

그리고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공간의 안으로 들어선 재엽은, 잠시 후 차 안에서 세워뒀던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오늘 촬영의 메인은, 아무래도 만담 같은 것이 아닌 것 같았다.

* * *

카페 프레스코가 입점한 건물은, 어둑해진 배경 속에 묻혀 외관이 잘 드러나지 않는 모양새였다.

마감에 쓰인 벽돌의 색감 자체가 블랙에 가까운 짙은 그레이 톤이었던 데다.

주변을 비치는 가로등의 숫자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유일하게 전면 통유리로 설계된 1층 로비의 파사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양 날개가 짧은, 납작한 ㄷ자 형태로 지어진 낮고 넓은 건물.

그 정 중앙을 장식하고 있는, 높고 넓은 통유리.

건물의 1층 층고는 거의 5미터에 육박할 정도로 높았고.

그만큼 높고 커다란 통유리에서는 내부의 환한 옐로우 톤 조명이 밝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니.

어두운 주변과 대비되어, 시선을 확 끌어당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 로비를 향해 걷게 되었다.

건물 안에서 쏟아지는 환한 조명의 인도를 따라서 말이다.

‘저쪽이 입구인가 보네.’

‘오, 입구가 멋진데? 한번 들어가 볼까?’

하지만 여기까지는, 딱히 방문객들을 놀랍게 할 만한 비주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외관 자체가 너무 단순한 벽돌 마감의 건물이었고.

짙은 색감 탓에, 눈에 잘 띄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다만 벽돌 재질과 유리 질감 사이의 이질감이, 조금 신선하게 느껴질 뿐.

그래서 공간의 진정한 반전은, 방문객이 입구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시작된다.

단순히 카페라고 생각하며 들어섰던 방문객의 시야에 가장 먼저 꽉 차는 것은, 거대한 스케일감을 뿜어내는 각종 기계들과 원두 진열대였으니까.

‘뭐지? 이건 무슨……. 박물관 같은 비주얼이잖아?’

‘커피 공장 같기도 하고……?’

심지어 로스팅 기계들과 진열대, 그리고 카운터가 있는 위치는, 플로어 레벨(Floor Level)*[바닥 기준선, 혹은 높이]이 다른 곳보다 몇 계단 더 높았다.

입구에 들어선 방문객이 약간 올려다봐야 하는 구도를 일부러 연출함으로써, 스케일감을 인위적으로 더 웅장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시각적인 충격과 함께, 진열대의 각종 원두에서 퍼져 나오는 은은한 커피향이 후각을 강렬히 자극했으니.

이 공간은 고객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먹는 커피는, 맛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라고 말이다.

“피디님. 진짜 여기, 우리 게스트 서우진 대표님이 디자인하신 거 맞아요?”

재엽의 물음에, 공진영 피디가 웃으며 대답하였고.

“그렇다는데요.”

그 바로 옆에 있던 유리아는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엄청나! 대박이야! 우리 동네에도 드디어 이런 갬성 커피집이 생기다니!”

물론 여느 때처럼, 거의 반사적으로 윤재엽의 태클이 이어졌지만 말이다.

“갬성이 뭐냐, 갬성이. 이상한 단어 좀 쓰지 마.”

하지만 적잖이 흥분한 유리아는,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은 채 입에 침을 튀어가며 다시 열변을 토했다.

“노인네! 쓸데없이 트집 잡지 말고, 여기 인테리어 좀 봐. 나 이제 앞으로 여기만 올 거야. 다른 데 못가!”

“커피 맛도 안보고, 그렇게 결정해 버린다고?”

“딱 보면 모르냐?”

“뭘?”

“여기 커피가 맛이 없을 것 같아?”

“……?”

“인테리어를 이렇게 해놓고 커피가 맛없으면, 그건 사기야! 사기!”

딱 봐도 진정성 넘치는 유리아의 흥분된 표정과 목소리에, 재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공PD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피디님, 얘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요?”

하지만 그 모양을 지켜보던 공진영은, 웃으며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아뇨, 지금 리액션 너무 좋아요.”

“네?”

“사실 조금 전부터, 촬영 중이었거든요.”

“뭐, 뭐라고요?”

당황해 입이 쩍 벌어진 윤재엽과, 그대로 얼음이 되어버린 유리아.

하지만 너무도 자연스레 촬영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다음 순간 새로운 출연진이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좀 늦었죠?”

그녀는 당연히, 임수하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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