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카페 프레스코
NA그룹의 계열사인 ‘NA푸드원’은, 식자재 유통업을 기반으로, 각종 요식업 프랜차이즈를 개발하는 대기업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 이미 코스닥에 상장하여, 2010년 기준 매출액 1조를 달성한, 국내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거대한 덩치를 가진 대기업.
때문에, NA그룹 회장인 아버지께 직위를 받아 이 ‘NA푸드원’의 대표직을 역임 중인 강도경은 소위 말하는 ‘재벌 2세’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고.
그의 차남인 강석중은 재벌 3세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로 하나 있는 형이나 나이 차이가 많은 여동생과 달리, 석중은 크게 욕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석중이 20대 후반일 즈음, 이미 NA푸드원을 물려받기 위한 후계 구도에서 먼저 한발 물러선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석중이 너. 그 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아버지.”
“공부하기 싫다고, 헛소리하는 건 아니겠지?”
“아버지 눈엔 제가 어려 보이시겠지만, 그 정도로 철없는 생각을 할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습니다.”
“흐음…….”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세 남매 중에서 가장 음식을 사랑하고 요식업에 관심 많은 인물이 강석중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형인 강민준은 음식보다는 회사 경영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으며.
이제 서른이 된 여동생은 연예계 쪽에 관심이 많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석중이 NA푸드원의 후계구도에서 일찌감치 손을 뗀 이유도, 그가 음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대신, 아버지.”
“뭐냐.”
“제게 세 괜찮게 나오는 건물 몇 채 정도만, 미리 좀 증여해 주십시오.”
“뭐? 창창한 20대부터 한량 질이나 할 셈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럼?”
“그냥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작게 해보고 싶습니다.”
석중은 남매들끼리 치고받으며 이권 다툼을 하는 것도 성격상 맞지 않았지만, 회사의 경영권 자체에 욕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자신의 음식을 개발하고 자신의 매장을 차리는 것이었지, 매출 현황을 보고받으며 거대한 회사 전체를 핸들링해야 하는 기업경영은 아니었던 것이다.
“네가 하고 싶은 게 뭔데?”
“요식업입니다, 아버지.”
“나랑 지금, 말장난이나 하자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우리 푸드원은 요식업이 아니더냐?”
“하지만 아버지께서 형이나 제게 바라시는 건, 기업경영이잖습니까.”
“……!”
“전 음식을 연구하고 개발해서, 저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 겁니다. 기업경영은……. 아무래도 제게 맞지 않습니다.”
그날 강도경 대표는, 석중이 원하는 대로 전부 다 들어주었다.
어차피 그가 원하는 것은 강도경의 입장에서 별것 아닌 수준의 지출이었고.
사랑하는 둘째 아들이 빨리 현실에 치여 보면서 깨달음을 얻길 바랬으니 말이다.
‘요식업과 기업경영이 별개라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는……. 제가 스스로 경험해 봐야 알 수 있겠지.’
하여 아버지께 원하는 것을 얻은 강석중은, 그때부터 계속해서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십 년이 지나도록 번번이 실패만 하였고, 이제껏 그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었다.
‘내 음식이 별로인 건가?’
‘메뉴 구성이 애매했나?’
강석중 본인은 깨닫지 못했지만, 그가 런칭했던 브랜드들의 음식은 한결같이 괜찮은 수준이었다.
다만 그는 오직 음식만을 생각했고, 그 외적인 부분들을 간과했을 뿐이었다.
브랜딩 전략과 마케팅 전략에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십 년 동안이나 제대로 된 원인조차 모른 채 사업에 실패해 온 ‘진짜’ 이유는, 사실 그에게 치열함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휴우. 이번에도 매출이 조금씩 흘러내리네. 슬슬 접고 다른 걸 다시 준비해봐야 하나?’
‘실패하면 다른 걸 해보지 뭐’라는 안일하고 가벼운 생각.
게다가 아무리 실패해도 재정적 어려움이 없는, 그런 리스크 없는 상황까지.
그런 이유들이 맞물려 시간이 갈수록 그는 한량이 되어버렸고.
새로운 브랜드 런칭을 그저 취미생활처럼 즐겨온 것이었다.
처음 아버지께 호기롭게 이야기했었던, 그때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철이 없었네.’
어쩌면 아버지께 건물 몇 채 증여받아 사업을 시작해 본다는 발상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첫 단추였을지도 몰랐다.
재벌 3세인 그에게는 너무 당연했던 그것이 말이다.
사무실에 앉아 옛날 생각을 하던 강석중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아버지께 철없을 나이가 지났다고 이야기했던 때가 그의 이십 대 시절이었건만.
그로부터 십 년도 더 지난 지금, 아직도 철이 없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이번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정말 한 번 최선을 다해봐야겠어.’
커피는 요식업 중에서도, 그가 정말 좋아하는 종목이었다.
그래서 카페 사업을 기획할 때부터 각오가 남다르기도 했었지만, 얼마 전의 미팅 이후로는 좀 더 목적의식이 뚜렷해졌다.
그에게 카페 프레스코의 인테리어를 맡아보고 싶다며, 먼저 미팅 제안을 꺼냈던 당돌한 20대의 대표.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 석중은 조금 더 의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막연히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던 그에게, 우진은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어린 나이에 자신의 사업체를 열정적으로 일구어가는 우진의 모습은, 그에게 큰 자극이 되기도 하였다.
‘브랜딩은 담금질이라. 이 말이 쉽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단 말이지.’
잠시 책상 앞에 앉아 펜대를 까딱이던 석중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 위에 올려있던 서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카페 프레스코 1호점의 공사가 시작될 현장.
이제 10분 정도 뒤면, 우진과의 최종 미팅이 약속된 시간이었다.
* * *
우진은 이 카페 프레스코 현장을, 오늘 처음 와봤다.
물론 지난주 미팅 때문에 근처까지 오긴 했었지만.
실제로 공사가 진행될 현장은, 오늘 처음 들어온 것이다.
사실 지난번에는 딱히 들어올 필요가 없었다.
직원들이 그려 온 실측도면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공간을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 강석중에게 최종 설계제안을 하기 위해 들고 온 도면과 투시도가 바로 그 증거.
하지만 무리 없이 설계와 디자인을 마무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진은, 지난번 방문 때, 현장에 직접 들어와 보지 않은 것을 후회해야 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이건……. 골든 프린트잖아.’
바로 얼마 전, SPDC 공모전의 설계 작업 때.
다시 한번 도면 위에 떠올랐던 황금빛 홀로그램을, 우진은 ‘골든 프린트’라고 부르기로 했었다.
아직도 이 골든 프린트의 정체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설계도면, 혹은 미래의 계획을 일컫는 단어인 청사진(Blueprint)에서 모티브를 딴 ‘Golden print’라는 단어가, 이 기현상을 설명하기에 아주 적합한 단어라고 생각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진은 앞으로도 이 골든 프린트라는 현상이, 당연히 그가 그리는 도면 위에만 나타날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진의 오판이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그려진 황금빛 홀로그램은, 공사가 시작되기 전인 텅 빈 현장 위를 찬란하게 수놓고 있었으니 말이다.
혹시나 해서 진태를 비롯한 다른 직원들의 표정을 살폈지만, 이 현상은 역시 우진의 눈에만 나타나는 듯 보였다.
‘하……. 이건 또, 골치 아프게 됐고만.’
우진이 경험한 골든 프린트는, 그의 디자인에 담긴 수준을 언제나 한 단계씩 끌어 올려주는 역할을 했었다.
아마 이번에도 역시 이 골든 프린트는 우진의 설계를 수정하게 만들 것이었고.
그렇다면 공사 일정이 지연되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진은 이 골든 프린트가 반갑기도 하면서, 반대로 난감하기도 하였다.
물론 난감하다 해서 골든 프린트가 주는 시그널을,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야지. 아직도 난……. 갈 길이 한참 멀었으니까.’
저벅- 저벅-
잠시 현장 앞에 멈춰있던 우진이 다시 걸음을 옮기며 안으로 들어서자, 그와 함께 온 WJ 스튜디오의 직원들도 우진의 뒤를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심각한 우진의 표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진태가, 작은 목소리로 우진에게 물어보았다.
“우진아, 뭐 잘못된 거라도 있어?”
“아냐, 형. 현장에 도면을 대조하다 보니까, 설계할 때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조금 보여서 그래.”
우진의 대답은 거짓말이 아니다.
설계할 때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라는 것이, 결국 골든 프린트였으니까.
다만 굳이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휴. 이건 벌써 세 번째 있는 일인데……. 아직도 적응이 쉽진 않네.’
우진은 지금 그의 눈앞에 떠오른 세 번째 골든 프린트를 해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이 금빛 선들이 뭘 뜻하는 건지……. 최대한 빨리 알아내야겠어.’
첫 번째 골든 프린트가 공간구획을 나타내는 평면도였다면, 두 번째 골든 프린트는 유저의 동선을 나타내는 흐름도였다.
그리고 지금 우진이 보고 있는 세 번째 골든 프린트는, 평면 위에 떠 올랐던 지금까지와 달리 3차원 구조를 갖고 있었다.
마치 공간 그 자체를 그리기라도 하듯 말이다.
‘이건 분명, 내가 디자인한 설계도와 연관이 있는 형태인데…….’
우진은 자신이 공사할 이 현장의 완성 이미지를, 어느 정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
때문에 이 점, 선, 면으로 이뤄진 황금빛 홀로그램이, 완성될 공간의 이미지와 겹쳐 보인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골든 프린트가 지난번 동선 흐름도를 나타낼 때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모양이 바뀐다는 점이었다.
지난번엔 도면의 공간구조를 수정할 때마다 골든 프린트의 모양이 바뀌었다면.
이번에는 현장 안에서 우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양이 바뀌고 있었다.
게다가 공간의 모든 부분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진의 시선이 닿는 곳.
그 안에서도 특정 위치에 대한 공간구조만이, 이 골든 프린트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 이게 대체 뭘 의미하는 거지?’
해서 우진은 골든 프린트의 변화를 읽기 위해, 현장 내부를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강석중 대표와 약속했던 시간 보다 삼십 분 정도 미리 온 것이, 우진에게는 신의 한 수였다고 할 수 있었다.
“우진아, 정신 사납게 왜 이렇게 돌아다녀. 공간은 앉아서 봐도 되잖아.”
“아니, 잠깐만. 치수 비교하면서 볼 게 조금 있어서.”
“음……?”
우진의 목표는 어떻게든 강석중 대표가 현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이번 골든 프린트가 보여주는 정보를 이해해 내는 것이었다.
만약 우진이 시간 내로 아무런 정보를 여기서 찾아내지 못한다면. 미팅이 끝난 시점에는 공사 일정이 픽스되어 버릴 테고.
그 뒤에는 골든 프린트를 해석해 낸다고 한들, 설계를 수정할 방법이 없을 테니 말이다.
‘공간 안에서……. 걸을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것. 그게 대체 뭘까?’
우진은 기왕 디자인을 도와줄 거라면, 이 골든 프린트가 조금 더 친절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잠시 떠올렸지만.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경험상 골든 프린트가 뭘 의미하는지 알아내는 이 과정까지도, 항상 디자인과 설계에 도움이 됐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우진은.
결국, 미팅이 잡혀있던 시간보다 조금 더 지나서야, 이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잠깐! 지금 도면상, 이 위치에서 메인 홀을 바라본다면……!’
들고 있던 평면도와 공간을 비교하면서, 우진은 미세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도면에 자신이 표시한 정확한 위치에 선 우진은, 가지고 있던 투시도 중 한 장을 꺼내들고 눈앞에 보이는 골든 프린트와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진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골든 프린트가 의미하는 것이, 우진이 서 있는 위치에서 허용되는 ‘시야’라는 것을 말이다.
공간 위에 떠올라있는 삼차원의 황금빛 선들은, 우진이 뽑아낸 투시도에서 확보되어 있는 시야를 정확히 그려내고 있었다.
‘그래.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간의 흐름에 따라 함께 바뀌는 것.’
명확한 깨달음을 얻은 우진은 다시 한번 공간을 돌아다녔고, 그러자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가 보여주는 현상을 이해한 지금.
이제 우진이 찾아내야 할 것은, 이 황금빛 도면이 어떤 시그널을 보내고 있냐는 것이었고.
그에 대해 고민하던 우진은, 잠시 후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시그널을 찾아내는 것까지 성공했으니 말이다.
“그래, 이거였어……!”
하지만 깨달음을 얻은 것과 별개로, 우진은 자신의 설계에 대한 생각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이제 끝나셨습니까, 대표님?”
어느새 그의 앞에는 푸근한 미소를 머금은 강석중이 다가와 서 있었고.
우진은 이미 미팅 시작 시간이 십 분 정도 지났음을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