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브랜딩(Branding)
브랜드(Brand)란, 과거 유목민들이 가축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불에 달군 인두로 찍었던 행위를 말한다.
즉, ‘낙인’에서 유래된 단어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브랜드는 어떤 상품이나 사업체의 이름. 혹은 상징의 의미로 쓰이고 있었고.
해서 이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행위가 바로 브랜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브랜딩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진의 질문에, 석중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글쎄요.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모든 행위가 브랜딩 아닐까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저는 이 브랜딩을, ‘담금질’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군요.”
“담금질이라…….”
브랜드에는 이미지가 있다.
소비자들이 브랜드를 떠올리는 순간, 머리로 떠올릴 수 있고 감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심상이 되어 떠오르는 것이, 그 브랜드가 가진 이미지인 것이다.
“그냥 로고만 만들고 이름만 지어도. 그것은 이미 ‘브랜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브랜드의 이미지를 고급스럽게 포장하고 가치를 높이기 위해선, 브랜딩이라는 담금질 과정이 필요한 거죠.”
우진은 즉흥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그가 꽤나 오래도록 생각해온 명제였다.
WJ 스튜디오를 처음 창업할 때부터, 그는 자신의 업체를 어떤 ‘브랜드’로 만들지 고민했었으니까.
“재밌네요. 조금 더 들어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강석중이 흥미를 보이자, 우진은 물을 한 모금 홀짝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목이 조금 탔지만, 우진 또한 이 상황 자체가 즐거웠다.
“담금질에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몇 번 망치를 두들긴다고, 완성되는 공정이 아니니까요.”
“브랜딩도 마찬가집니다. 소비자들의 머릿속에 명확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거든요.”
우진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지나갔다.
“소비자들이 브랜드와 관련된, 긍정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
“그 경험들을 통해, 신뢰감, 충성도, 편안함 등의 좋은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석중은 우진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듯 집중하고 있었고, 그것은 심지어 우진의 옆에 있던 진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브랜드만이 가진 특별한 경험을 창조하고, 그것으로 소비자들과의 진정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을, 저는 브랜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소비자들과의 관계구축을 위해 필요한 모든 준비와 노력들이, 전부 브랜딩의 일환이겠죠.”
우진의 설명은 간결한 편이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브랜딩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는 전부 담겨있는 것이었다.
강석중 또한 그것을 느끼고 있었고, 때문에 적잖이 감탄하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앉아있는 이 어린 대표에게서, 어떤 통찰력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담금질이라. 확실히 어울리는 비유야.’
그래서 석중은 우진의 말이 이어질수록, 이 이야기의 결론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우진이 얘기를 꺼낸 것은 결국 ‘레옹 베이커리의 실패’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으니.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그 이유가 나오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강석중의 기대처럼, 우진은 레옹 베이커리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레옹 베이커리는,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베이커리의 본질인 ‘빵의 맛’부터, 메뉴구성, 인테리어, 프라이스 포지셔닝(Price Positioning)까지.”
“그 모든 것들이 별로였다는 얘긴 아닙니다. 다만 문제는, 어중간했다는 점이지요.”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이, 결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확실한 고급화. 혹은 확실한 가격적 메리트. 어떤 베이커리에도 없는 확실히 특별하고 맛있는 메뉴. 혹은, 고객들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특별한 인테리어…….”
우진과 석중의 눈이 마주쳤고, 우진의 마지막 한 마디가 이어졌다.
“그것들이 부족했던 레옹 베이커리는 적당한 가격대에 적당한 맛을 가진 좋은 빵집이었지만, 좋은 브랜드는 아니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대안’이 존재하는 빵집이었으니까요.”
하고 싶던 모든 이야기들을 마친 우진은, 다시 냉수가 담긴 컵을 집어 들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우진의 머릿속에도 추상적으로 존재했던 개념들이 다시 정립되었고.
그와 동시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우진이 꺼내놓은 이야기들은, WJ 스튜디오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인지도 몰랐다.
“…….”
우진의 이야기가 끝났지만, 강석중은 잠시 침묵했다.
우진이 물을 다 마시길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컵을 탁자에 내려놓은 우진이 멋쩍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주제넘은 이야기를 한 것 같아, 조금 민망하군요.”
석중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주제넘다니요. 덕분에 좋은 이야기 들었습니다.”
석중의 웃음은, 결코 가식이 아니었다.
그는 우진의 이야기들에 공감했으며, 이런 좋은 이야기를 해 준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비록 직계는 아니지만, 재벌 3세나 다름없던 석중의 주변에는.
이렇게 직언을 해 줄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상품의 본질에 대한 고민은 많이 했었지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디자인이나 마케팅적 측면에서의 고민이 너무 부족했었어.’
사실 우진의 직설적인 제언에도 석중의 기분이 상하지 않은 데에는.
그의 그릇이 그만큼 컸다는 이유도 한몫했겠지만, 무엇보다 금전적인 ‘여유’가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정말 쫄딱 망해서 빚밖에 남지 않은 사람에게 이런 조언을 한다면, 그것은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강석중에겐 객관적으로 조언을 들여다볼 여유가 있었고.
우진도 그러한 석중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기에, 말을 꺼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다행히, 긍정적으로 통했나 보네.’
좋아 보이는 석중의 표정을 확인한 우진은, 속으로 살짝 안도하였다.
사실 브랜딩에 대한 우진의 이런 열변은, 우진에게도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이야기들은 미팅에 좋은 영향을 주었으며.
덕분에 미팅이 시작부터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촉진제의 역할을 해 주었다.
“여튼 그럼,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그럽시다.”
우진은 준비해 온 포트폴리오들을 하나씩 보여준 뒤, 이어서 ‘카페 프레스코’의 디자인 방향성에 대해 제시하였다.
물론 디자인을 미리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카페 프레스코를 생각하며 찾아 둔 이미지 래퍼런스들을 이용하여, 그가 생각하는 디자인 지향점에 대해 어필한 것이었다.
석중은 우진의 제안을 하나하나 경청하였으며, 무척이나 적극적으로 미팅에 참여하였다.
“좋습니다. 훌륭하군요.”
“부족한 제안서를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미팅이 전부 끝났을 때.
“그럼 마지막으로 제가, 한 가지만 더 여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석중은, 우진을 향해 한 가지 질문을 더 했다.
“서우진 대표님께선, 저희 ‘카페 프레스코’ 브랜드 런칭을 위해……. 처음에 말씀하셨던 그 ‘브랜딩’이라는 담금질을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석중과 눈이 마주친 우진은,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인테리어는 브랜딩의 여러 가지 수단 중 하나일 뿐이죠.”
“……?”
“하지만 ‘카페 브랜딩’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인테리어 디자인이기도 합니다.”
우진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공간 디자인’이 바로, ‘카페 브랜드’에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브랜딩 과정이다.
우진의 대답을 이해한 석중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고, 우진은 그 손을 망설임 없이 맞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 대표님.”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강 대표님.”
그렇게 우진은 카페 프레스코의 1호점 인테리어를, 성공적으로 수주할 수 있게 되었다.
* * *
2010년의 여름은, 무척이나 후덥지근했다.
곧 8월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뙤약볕은 사정없이 도로 위를 내리쬐고 있었다.
“어후, 도로에 아지랑이 올라오는 것 봐.”
일산 KBC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 임수하가 탄 벤을 몰던 매니저 송지호가 투덜투덜 중얼거렸다.
“아, 난 여름이 제일 싫어. 겨울 언제 오지?”
그러자 뒷좌석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스크림 콘을 씹어 먹던 임수하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호에게 핀잔을 주었다.
“오빠. 이제 7월인데 무슨 겨울을 찾고 있어?”
“며칠 뒤면 8월이야.”
“이상한 거로 말꼬리 붙잡지 말고.”
“8월이 지나면 9월이고, 9월은 가을이지. 가을 다음은 겨울이니까, 겨울도 금방인 거야.”
“언제는 겨울이 제일 싫다더니.”
“내가 언제!”
“정확히 5개월 전에 그랬어.”
“그럴 리가. 난 더운 것보다 추운 게 좋다고. 더워서 벗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추우면 계속 껴입으면 되거든.”
이상한 논리를 펼치는 지호를 향해, 수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매니저와 말장난을 하는 것이, 딱히 싫은 것은 아니었다.
도로 위에서 보내야 하는 따분한 시간에,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덜 지루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살 좀 빼, 오빠.”
“갑자기 내 살 얘긴 왜 나와?”
“더워서 벗는 데 한계가 있다며.”
“……?”
“뱃살 가려야 하니까 한계가 있는 거야. 몸 좀 예쁘게 만들어서 벗고 다니면, 매번 여름이 기다려질걸?”
“너처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제발 사람 많은 수영장에서 비키니 좀 입고 다니지 마, 임수하.”
“아 왜.”
“배우님 이미지 망가진다고. 이제 너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져서, 이미지 관리 좀 해야 해.”
“하……. 여름이 싫다는 얘기가 대체 왜 여기까지 이어지는 건데?”
결국 매니저의 잔소리로 귀결되는 대화에, 수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의자를 뒤로 쭉 밀어 내렸다.
일산 KBC까지는 이제 20분 정도면 도착할 테지만,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 볼 요량이었다.
“나 잠깐 누울 거니까, 말 시키지 마. 오빠.”
“예, 배우님. 누워서 휴대폰 만지지 마시고, 제발 말씀하신 대로 눈 붙이세요. 알겠죠?”
“으아! 잔소리대마왕! 진짜!”
송지호의 잔소리에, 습관처럼 휴대폰을 들었던 수하는 움찔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휴대폰을 내려놓지는 않았다.
잔소리는 잔소리일 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정신건강에 이로운 법이었다.
‘다음 생에는 꼭 내가 송지호 매니저로 태어나리…….’
휴대폰에 쌓인 문자들을 하나씩 확인하던 수하는, 문득 오늘 있을 미팅이 생각났다.
그리고 미팅에 대한 생각과 동시에, 한 사람의 얼굴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나저나, 신기하단 말이지. 그 사람은 나한테 예능 섭외가 들어올 걸, 대체 어떻게 예상했을까?’
오늘 수하가 매니저와 함께 일산 KBC로 가는 이유는, 그녀에게 예능 프로그램 섭외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올해 가을부터 방영이 시작될, <우리 집에 왜 왔니>라는 이름의 예능 프로그램.
그리고 그녀에게 예능 프로그램을 추천했던 사람은, 그녀의 모든 지인을 통틀어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녀의 가족도, 지금 그녀와 함께 차를 타고 있는 매니저도,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들도 아니었다.
수하에게 예능을 추천했던 그 사람은, 그녀와 아주 짧은 인연이 있는 한 남자일 뿐이었다.
모델하우스에서 자신의 팬이라며 아파트 계약을 도와주었던, 무척이나 동안(?)의 건설관계자.
물론 그가 수하에게 예능 섭외가 들어올 것임을, 정말 그대로 예언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었고…….
[올해 안에 꼭 예능 하나 해 보세요, 배우님.]
[어머, 갑자기 왜 이리 적극적이래. 누가 보면 제 매니전 줄 알겠네요.]
[그냥 감 같은 겁니다. 그리고 제 촉이 좀, 좋은 편이거든요.]
수하의 입장에서는 이 얘기가 거의 예언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진짜 무슨 예지력이라도 있는 거야 뭐야.’
만약 예능이 그냥 뜬금없는 기획이었으면, 수하가 이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집에 왜 왔니>라는 이름을 가진 이 예능 프로그램은,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집’과 관련된 컨텐츠로 기획된 예능이었고.
이게 묘하게 서우진의 분야와 연결이 되다보니, 수하의 입장에서는 더 신기하게 느껴진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아니겠지? 아니면 공피디랑 지인이라거나…….’
<우리 집에 왜 왔니>를 기획한 피디는,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출내기PD였다.
그래서 만약 서우진이 했던 얘기가 수하의 귀에 밟히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예능 섭외를 별 고민 않고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묘한 상황의 조합 때문에 그녀는 이렇게 오늘 KBC 사옥에 오게 되었고.
공진영 피디와의 미팅까지 가지게 되었다.
사실 기획서를 읽어본 지금, 프로그램의 컨셉 자체가 꽤나 마음에 들기도 했고 말이다.
‘서 대표님은 요즘 뭐하고 계시려나…….’
서우진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른 수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의 관계는 사실 조금 애매해서, 사적으로 연락하거나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내가 본인이 던진 얘기 때문에 이렇게 고민 중인 건, 혹시 알고나 있을까?’
그런데 다음 순간.
위이잉-!
갑자기 진동하는 휴대폰을 확인한 임수하는,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휴대폰에 찍힌 발신자의 이름이, 방금 전까지 그녀가 떠올리고 있던 바로 그 이름이었으니 말이다.
[서우진대표님]
수하는 반사적으로 수신된 문자를 눌러보았고.
그 내용을 확인하고는 더욱 경악하였다.
[배우님. 혹시 바쁘세요? 저 지금 일산 KBC쪽 왔는데, 이쪽에 계시면 차나 한잔 하실래요?]
‘뭐, 뭐야. 무섭잖아!’
마치 자신이 오늘 KBC에 올 것을 미리 알기라도 했다는 듯, 귀신같이 날아온 한 통의 문자.
우진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거의 한 달 만이었기에, 그녀로서는 더더욱 이 상황이 공교롭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와 진짜. 대박.”
“뭐가?”
“아냐, 오빠. 운전에 집중해.”
우진을 향한 수하의 의심(?)은, 그렇게 조금 더 깊어졌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