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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66화 (66/315)

66화

도약의 밑거름

대학생에게 모든 기말고사 일정의 종료는, 곧 여름방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진을 비롯한 10학번 신입생들 또한 첫 여름방학을 맞게 되었다.

사실 SPDC와 관련된 일들 때문에 우진의 방학은 오히려 늦어진 것이었고.

다른 동기들은 이미 7월 초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후아. 드디어 제대로 된 방학인 건가?”

“지난주부터 거의 놀았으면서. 바빴던 척하기는.”

“와, 팀원의 고생을 이렇게 매도한다고?”

“어쨌든 오늘로 끝! 이제 자유를 줄게 판넬 요정.”

“후아아! 끝이다! 끝! 디지털 노가다는 이제 한동안 손도 안 댈 거야!”

우진과 소연이 오늘까지 학교에 출근(?)한 이유는, SPDC와의 최종 설계조율 때문이었다.

해서 소연이 말하는 디지털 노가다란, 한 땀 한 땀 그리는 도면과 디자인 작업들.

그리고 오늘에야 드디어, 그 과정이 전부 다 끝이 났다.

조금 더 정확히는 시행자인 서울시 디자인재단과 시공자인 천웅건설까지.

요양원 시공과 관련된 모든 구성원들 간의 설계조율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기까지, 우진은 SPDC 관련해서 할 일이 없다.

물론 WJ 스튜디오의 일이야, 차고 넘칠 정도로 쌓여있었지만 말이다.

‘하……. 한 가지 끝나도 도무지 쉴 수가 없네. 모형 외주도 산더미처럼 밀려있는데…….’

사람을 두어 명 정도 더 뽑고 싶었지만, 뽑는다고 해도 당장에 실전에 투입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우진은 은근슬쩍, 소연을 향해 운을 떼기 시작하였다.

석현만큼 실력이 좋지는 않아도, 소연 정도면 충분히 건축모형 작업에 즉전감으로 쓸 수 있을 터였다.

“한소연, 디지털 노가다 질렸으면, 오늘부터 아날로그 노가다를 시작해 보는 건 어때.”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오늘부터 진정한 프리덤을 즐길 거라고. 행복한 방학 생활의 시작인데, 노가다라는 불길한 단어를 꺼내다니!”

소연의 반발에, 우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뭐, WJ 스튜디오에서 인턴으로 써주려 했는데……. 싫으면 말고.”

“인…… 턴?”

“시급 만 오천 원에 점심 저녁 식사까지 제공. 모형 하나 발주 나가는 날엔, 인센티브까지 추가지급.”

“……!”

“내가 볼 땐 괜찮은 조건인 것 같은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조금 더 싼값에 다른 알바를 알아봐야…….”

우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연은 그의 왼손을 덥썩 끌어다가 양손으로 붙잡았다.

딱히 계산기를 두들겨 볼 필요도 없다.

우진이 제시한 조건은, 그녀가 평소에 하던 알바 중 가장 페이가 좋은 미술학원 보조강사 알바보다도, 거의 1.5배는 높은 액수였으니까.

“대표님. 출근은 언제부터 하면 될까요?”

“음……? 행복한 방학을 즐겨야 한다더니?”

“세상에 돈 버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10대 후반 이후로.

소연의 인생에서 아르바이트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께서 보내주시는 양육비는 동생들이 클수록 부족하기 그지없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할머니 요양원 비용까지 해결해야 했으니.

소녀 가장인 소연으로써는, 매달 몇십만 원 이상이라도 꼬박꼬박 벌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방학만큼은, 우진에게 얘기했던 대로 알바를 조금 설렁설렁할 생각이었다.

공모전 상금에서 소연의 몫으로 떨어진 돈이, 세금 떼고도 육칠백만 원이나 되었으니까.

‘그래서 오랜만에 좀 쉬어볼까 했는데…….’

하지만 우진이 제시한 금액은,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쏙 들어가게 만들 수준이었다.

“대신 하루 12시간 근무인데, 괜찮?”

“최대 16시간까지 가능합니다, 대표님.”

“아냐, 그렇게 일하면, 너 탈진해.”

“할 수 있습니다, 대표님.”

“안 돼. 난 훌륭한 일개미를 잃고 싶지 않거든.”

우진이 말하는 인센티브야 얼마인지 감이 잘 오지 않지만, 그걸 제외하더라도 하루 12시간 근무라면 매일 일당이 거의 18만 원 수준이다.

‘워킹 데이 20일 기준으로 한 달만 빡시게 일해도…….’

대충 한 달에 350만 원 이상을 벌 수 있는, 소연으로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고소득 직장!

“어쨌든 좋아. 그럼 출근은 언제부터?”

“다음 주 월요일 어떻습니까요.”

“그래. 그럼 월요일부터 출근하도록.”

“예쓰!”

하지만 이 훌륭한 직장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영국인과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제이든이랑 같이 일할 예정이니까, 심심하진 않을 거야.”

훅 들어오는 우진의 한 마디에, 해맑았던 소연의 표정이 살짝 구겨진다.

“그냥……. 심심하게 일하면 안 됩니까, 대표님?”

“안 돼. 돌아가.”

“힝…….”

불쌍한 표정을 짓는 소연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우진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 네 1호 신도도 거기 같이 있으니까, 그 친구가 널 영국인으로부터 지켜줄 거야.”

제이든과 작업실에서 단둘이 일하는 것은, 어지간한 체력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제이든은 작업을 하면서도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입을 놀렸으며.

단둘이 작업한다는 말은, 그의 수다를 전부 다 혼자 받아줘야 한다는 얘기니까.

그래서 그 수다를 대신 받아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부분이었다.

우진의 말에 처음엔 고개를 갸웃했던 소연은, 금세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석현…… 오빠?”

“빙고.”

“휴우……. 그나마 다행이네.”

하지만 겨우 안정됐던 소연의 심리상태는, 곧 다시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우진의 다음 말이 이어진 순간…….

“그나저나 한소연. 우리 석현이 어때?”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남자친구 만들 거라며. S대생에, 소연교 신도인 석현이 정도면…….”

“뭐?”

소연은 저도 모르게, 분노의 등짝스매싱을 날려야 했다.

짝-!

우진의 얇은 반팔 티 한 장 위를, 찰지게 가격하는 소연의 손바닥.

“아! 왜 때려!”

“오빤, 좀 더 맞아야 해.”

“왜! 아니, 갑자기 왜!”

소연은 우진의 한쪽 팔을 꽉 붙잡은 채, 연속으로 그의 등짝을 공격했고.

“아, 알겠어! 알겠다고! 석현이가 그렇게 싫은 줄은 몰랐지!”

“뭐? 매가 부족했네. 더 맞자, 서우진.”

“으아아!”

소연은 우진에게 분노의 응징을 가하면서, 속으로 한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안 되겠어. 주변에 어디 석현 오빠 소개해줄 만한 애 없나? 서우진 자꾸 쓸데없는 생각 못 하려면, 석현 오빠부터 빨리 보내버려야겠어.’

오늘따라 우진이 얄밉기 그지없는 소연이었다.

* * *

학교에서 나온 우진은, 소연과 같은 대중교통으로 이동했다.

성수동에 사는 소연과는 하교길이 항상 비슷한 편이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도 더 멀리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

“오빠, 오늘은 2호선 타고 쭉 가는 거야?”

“응. 다른 데 볼 일이 좀 있어서.”

“어디?”

“송파구.”

“뭐 하러 가는데?”

“그건 비밀.”

“아 놔. 이 아저씨는 무슨 비밀이 이렇게 많아?”

소연은 툴툴대며 성수역에서 먼저 내렸고.

소연과 헤어진 우진은, 그대로 잠실역까지 직행하여 8호선으로 갈아탔다.

하여 우진이 향한 곳은, 그녀에게 말했던 대로 송파구. 문정동이었다.

오늘은 꽤나 오랜만에, 문정동의 김 씨 아저씨를 만날 약속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우진이 이 시점에, 부동산 김 씨를 만나는 이유는 하나.

“제가 매도 올린 가격에, 매수인이 나왔다고요?”

“네, 대표님.”

대략 두 달 전쯤 그를 통해 매입한, 세영아파트를 매도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흠. 생각보다 매수가 빨리 붙었네요. 8월을 돼야 팔릴 줄 알았는데…….”

우진은 세영아파트 재건축 물건을, 김 씨 아저씨의 부동산에만 단독매물로 내놓은 상태였다.

김 씨의 능력이 괜찮았기 때문에, 그의 편의를 좀 더 봐준 것이다.

반대로 김 씨 또한 우진을 VIP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에게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우진이 아직 거래 규모 자체는 다른 단골손님들에 비해 큰 편이 아니었지만, 그가 보여준 투자능력은 김 씨의 어떤 손님보다도 뛰어났으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대표님.”

“네, 사장님.”

“일단 매수가 붙긴 했지만, 조금 더 기다려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8월까지요? 아니면 9월?”

“아뇨, 한……. 겨울까지요.”

“왜요?”

세영 재건축 조합에서 나온 안내 책자를 꺼내 든 김 씨가, 우진에게 다시 설명을 시작하였다.

“이번에 비대위가 거의 죽어버려서, 대표님께서 예상하신 대로 재건축 진행속도가 엄청 빨라졌거든요.”

“흠.”

“제 생각엔 11월 즈음이면 관리처분 얘기가 나올 것 같고……. 그때까지만 기다리시면, 작은 거 너댓 장 정도는 더 먹으실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김 씨가 말하는 ‘작은 거 너댓 장’이란, 4천에서 5천만 원 정도의 금액을 말하는 것이다.

우진이 세영아파트를 5억 9천 정도에 매수했고, 현재 매도하려는 가격은 8억 5천이었으니.

5천이 더 붙는다면, 9억에 육박하는 가격인 것이다.

이미 두 달 만에 2억 5천이라는 높은 차익을 냈지만, 그럼에도 5천이라는 액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큰돈.

그러나 우진은, 김 씨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5천이 더 오를 것이라는 그의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지금 매도하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사장님 말씀이 맞긴 한데, 그래도 지금 매도하렵니다.”

“예?”

살짝 당황한 표정의 김 씨를 향해, 우진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시세가 발목도 아니고, 거의 발바닥 수준일 때 샀는데……. 꼭 머리 꼭대기까지 채워서 팔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으음…….”

“까치밥도 어느 정도 남겨둬야죠. 제 뒤에 매수하신 분도, 먹을 건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우진의 말을 들은 김 씨는, 순간 벙어리가 된 듯 말을 잃었다.

다음 투자자를 위해 차익을 조금 남겨놓는다는 그의 말이, 결코 허언처럼 들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본인은 다른 투자처에 들어가도, 얼마든지 그 정돈 벌 수 있다는 건가.’

우진의 여유를 느낀 김 씨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우진은 지금까지 김 씨가 수십 년 부동산업을 해 오면서 봐 왔던 투자자들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 감탄스런 인물이었다.

이십 대라는 우진의 어린 나이를 제외하고 생각해도 말이다.

‘세영아파트에서 두 달 만에 2.5억 벌고 나온 사람이 있다는 얘길 하면……. 대체 누가 믿을까?’

우진이 두 달 만에 얻은 2억 5천 이라는 차익은, 다른 투자자들이 알았더라면 경악을 할 만한 수준이었다.

한창 부동산 경기가 좋은 시절이라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부동산 매입을 미친 짓으로 취급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로,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우진은 재건축 조합에 걸린 ‘소송’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이용하여 차익을 극대화시켰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그것 자체가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실력이었다.

“으음. 뜻이 그러시다면, 매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좌는, 지난번에 쓰셨던 그 계좌 그대로죠?”

“맞습니다.”

우진에게 잠시 감탄하던 김 씨는, 능숙하게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 뒤 다시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이제 매수자로부터 연락만 오면, 우진의 계좌로 계약금만 받으면 된다.

“그나저나 대표님.”

“예, 사장님.”

“이번에 투자금 회수하시면, 다음 투자처는 또 생각해 두신 데가 있는 거죠?”

눈을 반짝이며 얘기하는 김씨의 모습을 보며, 우진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우진은 생각해놓은 투자처가 있었고, 거기에 이번에 회수한 모든 돈을 싹 다 집어넣을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예리하신데요?”

“하하. 척하면 척이죠.”

김 씨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운을 떼었다.

“어딘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혹시 둔촌? 아니면, 신천역쪽……?”

우진은 김 씨의 기대감 어린 표정을 봤지만, 아쉽게도 그의 기대에 부응해줄 수는 없었다.

이번에 그가 투자할 종목은, 아파트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생각하시는 곳, 전부 틀렸습니다. 하하.”

“헛, 그럼 혹시 송파구가 아닌가요?”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송파구도 아니고, 아파트도 아닙니다.”

“예……?”

당황한 김 씨의 표정에 작게 실소를 흘린 우진이, 탁자 위에 놓여있던 지도 한쪽을 검지 손가락으로 짚었다.

“제가 이번에 투자하려는 곳은, 성동구, 성수동.”

“성수요?”

“정확히는 여기……. 서울 숲 바로 인근에 공사 중인, ‘지식산업센터’라는 건물입니다.”

“……?”

김 씨는 우진이 손가락으로 짚은 위치를 다시 살펴봤지만, 그럼에도 우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김 씨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던 우진은,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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