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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61화 (61/315)

61화

역공

“삼촌, 오셨어요?”

“그래. 일찍 와있었구나.”

“커피라도 한잔하실래요?”

“좋지. 난 아이스아메리카노.”

“잠시만요. 주문하고 올게요.”

K대 인근에 있는 작은 카페 한쪽에서,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였다.

멀끔한 정장의, 사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한 명의 남자와.

캐주얼한 면바지에 깔끔한 후드티를 걸친,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사람.

그는 K대 3학년인 김기태였고, 마주한 사람은 그가 삼촌이라 부르는 명성건설의 직원 윤영운이었다.

“그래. 학교에서는 뭐 좀 찾은 게 있냐?”

“아뇨.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얘들 거의, 외부에서만 작업했다고요.”

“그랬지.”

“학교엔 남아있는 게 거의 없어요. 이 새끼들, 죄다 업체에다 외주 넣은 게 분명해요.”

기태의 표정을 확인한 윤영운은, 속으로 살짝 한숨을 쉬었다.

겉으로는 깨나 침착한 척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를 오래 알아 온 영운에게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속이 보였던 탓이다.

‘어지간히 억울한가 본데.’

사실 영운은 기태에게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1학년 학생들이 설계부터 시작해서 모든 디자인 프로세스를 전문 설계사무실에 의뢰했다고 생각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기태의 입장에서도 억울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적극적으로 그의 편을 들며, 조사에 가담했던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조사가 진행된 지금, 영운은 이 상황이 무척이나 애매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러면 사실, 기태랑 다를 게 없잖아.’

지난 며칠 동안 영운이 찾아낸 것은.

우진의 모형을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WJ 스튜디오라는 업체와, 그 업체 내부에서 발견한 우진의 모형에 대한 흔적 정도.

다시 말해 설계 자체를 외부에 의뢰했다거나 하는 흔적들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1학년 팀이 외주를 맡긴 게 모형제작뿐이었다면, 오히려 기태가 나을 것이 없었다.

모형이야 기태도 완전히 업체에 맡긴 상황이었으며, 기태는 한술 더 떠서 세부설계까지 명성건설의 도움을 받은 상황이었으니까.

원래는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었다면, 이제 똥 묻은 개의 포지션이 오히려 기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흐음…….”

“삼촌은, 뭐 좀 찾으신 거죠? 그렇죠?”

기태와 눈이 마주친 영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찾은 증거들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이 사진들을 보면, 그 1학년 팀이 출품한 모형 작업현장인 걸 바로 알 수 있어.”

“확실히 그러네요.”

“여기가 WJ 스튜디오라는, 너희 학교 근처의 모형작업장이거든.”

“아…….”

“최근에 업계에서도 이슈가 좀 됐던 곳이야.”

“업계에서요?”

“얼마 전에 천웅건설 홍보관에 여기에서 작업한 건축모형 들어왔었는데, 완전히 대박 났거든. 모형 퀄리티를 진짜 실사처럼 뽑아내는 업체야.”

“후우, 역시…….”

자신의 예측이 확실히 맞아떨어지자, 기태는 더욱 분노한 표정이 되었다.

주먹을 꽉 쥔 기태의 손에는, 핏기마저 사라진 느낌이었다.

“이거 말고 다른 정황은 없어요?”

“응. 꽤나 공들여서 조사해 봤는데, 설계의뢰나 디자인 의뢰가 보이는 정황은 없더라고.”

“음…….”

“나도 모르는 해외업체를 1학년들이 알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설계는 걔들이 한 게 맞는 것 같아.”

잠시 기태의 표정을 살피던 윤영운이, 낮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기태야.”

“네 삼촌.”

“그냥 여기서 접는 건 어떠냐.”

“예?”

“어차피 외주로 뽑은 부분이 모형뿐이고, 설계나 디자인은 걔들이 직접 한 거라면…….”

하지만 윤영운의 그 말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아니, 삼촌. 그건 아니죠.”

“뭐?”

“지금 저는, 걔들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확신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기태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냥 증거가 나오지 않은 것뿐이지, 걔들은 분명히 디자인이고 설계고 싹 다 의뢰했어요.”

“…….”

“삼촌도 아시잖아요? 1학년 수준에서 그런 설계가 가능할 것 같아요? 절대 아니죠.”

김기태는 점점 더 흥분하고 있었고, 영운은 가만히 그의 말을 듣기만 하였다.

“어차피 SPDC 규정상, 모형이 외주인 것만 밝혀져도 무조건 수상 취소에요.”

“그건 그렇지.”

“삼촌이 찾아주신 것만 해도 충분히 보내버릴 수 있으니까.”

슥-

기태는 영운이 책상 위에 올려둔 USB를 그대로 가져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건 제가 가지고 갈게요. 고생하셨어요, 삼촌.”

입을 달싹이려던 영운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그래.”

‘모형은 너도 의뢰했잖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차마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기태의 얼굴에서, 흡사 광기 같은 것이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래,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그의 상관이자 기태의 아버지 김진명에게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잠깐 고민이 되었지만, 결국 영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버렸다.

어차피 김진명은 이런 사소한 과정을 별로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결국 결과일 뿐.

기태의 말처럼 자신이 찾아낸 증거만 가지고도 1학년 학생들의 대상 수상은 취소되고 남을 것이고, 그 자리는 기태의 것이 될 게 분명했다.

영운은 찝찝함에 입맛이 조금 썼지만,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 ‘결과’가 바뀔 일은 없을 테니까.

* * *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왔다.

우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금 일찍 등교하였고.

우진이 도착한 1학년 과실은, 지난주에 있었던 SPDC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하였다.

“야, 그거 들었어? 올해 SPDC 대상, 우진 오빠네 팀이 받았대.”

“진짜? 헐. SPDC 엄청 빡센 거 아니었어? 선배들도 상 받기 어려운 수준이래서, 난 아예 출품도 안 했는데.”

“일학년 딱 세 팀 출품한 것 같은데, 세 팀 전부 상 받았어.”

“정말이야?”

“우진 오빠네 대상. 선빈이네 우수상. 유림이네가 특선.”

“와 대박. 부럽다…….”

“젠장. SPDC 특선이면, 대외활동 점수 한 방에 50점 채우는 거 아냐?”

“맞아.”

“졸업 때까지 그거 100점 채워야 한다던데.”

“선빈이네 팀은 60점이고, 우진 오빠네 팀은, 그냥 한 방에 100점이야. 대상은 그냥 프리패스라고.”

“우와…….”

드르륵-

과실 문을 열자 소란스러움을 느낀 우진은, 평소처럼 소리 없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아 노트북을 폈다.

수업까지 남아있는 한 시간 동안, 오늘 제출해야 하는 과제를 최종 점검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우진의 그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야, 우진 오빠 왔다.”

“어 정말?”

“형! 우진 형이다!”

평소에는 조용조용한 우진이 과실에 나타나던 말던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던 동기들이.

우진이 책상에 앉자마자, 그를 에워싸며 우르르 모여든 것이다.

우진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형, SPDC 대상 받았다며? 작품 좀 보여주면 안 돼?”

“오빠, 축하해. 아침에 기사 봤어. 대박!”

“누구랑 팀이었어? 소연 언니?”

“소연 언니랑 제이든.”

“와, 부럽다……. 나도 같이하자고 할걸…….”

SPDC는 건축디자인을 전공하는 디자인학부생이 쌓을 수 있는 최고의 스펙 중 하나였고.

거기서 무려 대상이라는 쾌거를 이뤄낸 우진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동기들의 반응은 순수한 호기심과 부러움 같은 것들이었기 때문에,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냥 운이 좋았던 거야, 운이.”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맞아. 대상 작품은 실제 시공설계까지 진행해 준다던데?”

“대상 수상할 만한 작품이 없으면, 대상 자리를 비워버릴 때도 있다고 들었어.”

“운으로 당선된 설계를, 서울시에서 시공까지 해 줄 리가 없잖아.”

“맞아, 맞아!”

우진을 둘러싸고 재잘거리는 동기들은,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뭔가 같은 학번에 소속된 동기가 졸업반 선배들까지 제치고 대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뿌듯한 모양이었다.

사실 SPDC라는 공모전 자체가 1학년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세상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시기 질투나 부러움보다는 자랑스럽고 신기한 감정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빨리, 작품 작업한 것 좀 보여줘!”

“보여줘!”

“모형 전부 디자인재단에 출품했는데, 나한테 지금 없지.”

“판넬이랑 피피티 파일은 있을 것 아냐.”

“맞아.”

“거기 모형 사진도 다 있을 텐데, 왜 이러실까.”

“밑장 빼지 마시고. 빨리!”

“아, 알겠어, 보여줄게. 잠깐만.”

우진은 동기들의 성화를 못 이겨 노트북에 저장해 둔 작업 파일들을 오픈하였다.

이어서 하나씩 그것들을 보여주기 시작하자, 동기들의 눈은 완전히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이 오빠, 무서워.”

“우리랑 같은 학년 맞아?”

“제도 시간에 맨날 잠만 자던 오빠 아니었어? 이게 다 뭐람.”

“와……. 형…….”

“우와, 우진 오빠 개 멋있어.”

우진의 옆에 모여든 학생들은 저마다 감탄하며 한 마디씩 떠들어댔고, 우진은 멋쩍은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학부생 1학년에 불과한 동기들의 칭찬이었지만, 그래도 칭찬이 싫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잠시 후 제이든이 합류했을 때, 우진은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유후. 제이든 등장!”

“제이든!”

“제이든 등장이 뭐냐? 오그라들게.”

“괜찮아, 제이든. SPDC 대상 받았으면, 오늘 하루 정도는 등장해도 돼.”

“난 건축디자인계의 슈퍼루키 제이든이라고. 곧 스타 디자이너가 될 몸이지. 혹시 나한테 싸인 받고 싶은 사람은 없어?”

학교에 오자마자 텐션이 절정으로 치솟은 제이든이, 미친 듯이 날뛰며 떠들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다른 동기들까지 신이 나서 제이든의 장단을 맞춰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맞아, 슈퍼루키 제이든. 공모전은 당연히, 제이든이 캐리했겠지?”

“물론이야.”

“발표는 우진 오빠가 했다던데?”

“우진은 훌륭했어. 하지만 제이든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겠지.”

“크……!”

“소연도 마찬가지야. 둘 다 Genius지만, 결국 제이든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게 가능했던 거니까.”

우진이 중간에 태클을 걸어봤지만…….

“하……. 대체 뭐라는 거야?”

“제이든은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애초에 날뛰기 시작한 제이든은, 가벼운 태클 정도로 저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차라리 영어로 말해줘 제이든.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우진. 영어 잘 못 하잖아?”

“어차피 못 알아듣는 건 똑같아. 그렇다면 스트레스가 덜한 쪽을 택하겠어.”

“어리석은 우진!”

수업이 가까워질수록 과실에는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모였고.

그것은 곧, 우진의 고통도 그만큼 커졌음을 의미하였다.

“어때, 이제 제이든의 위대함을 좀 알겠지, 우진?”

“시끄러.”

“소연이 없어서 아쉬워. 소연이라면 분명, 제이든의 훌륭함에 대해 이해했을 거야.”

“제발 이제 수업 준비나 하자 제이든.”

그런데 그렇게 수업이 20여 분 정도 남았을 즈음.

우진은 예상치 못한 상황 덕에, 제이든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학년 과실에, 의외의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엇, 선배! 무슨 일이세요?”

“혹시 과실에, 우진이 있니?”

“아, 우진 오빠요? 저기 있어요. 잠시만요!”

소리를 들은 우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결코 반가울 수 없는.

어쩌면 우진이, 이 학교 안에서 가장 싫어하는 얼굴.

하지만 우진은 밝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 김기태는 우진이 아주 싫어하는 인물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상황 자체는 전혀 싫지 않았으니 말이다.

“선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우진의 웃는 얼굴을 마주한 김기태가, 그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리고 그 기분 나쁜 미소와 함께, 우진을 향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잠깐 박준민 교수님 집무실로 올래? 할 얘기가 조금 있거든.”

김기태의 목소리를 들은 우진은, 오히려 기분이 더 좋아졌다.

우진은 오늘 벌어질 일들이, 기대돼서 아주 미칠 것만 같았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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