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55화 (55/315)

55화

두 번째 골든 프린트

말이 갖는 힘은 위대하다.

말에는 뜻을 담을 수 있고 의지를 담을 수 있으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까지도 담을 수 있다.

때문에 어떤 한 분야를 날카롭게 관통하는 통찰력이 담긴 말은, 듣는 이의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킬 수도 있다.

특히나 듣는 이가 그 분야에 정통한 식견을 갖고 있다면, 그 파장은 더욱 클 것이고 말이다.

“¡No puedo creerlo(믿을 수 없군)!”

브루노 산체스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스페인어가 튀어나왔다.

그는 한국에 온 뒤로 거의 영어를 사용하였지만, 그래도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감탄사는 모국어일 수밖에 없었다.

‘믿을 수 없군. 정말 믿을 수 없어. 저 꼬마가 한국의 학부생이라고?’

브루노는 최근, 약간의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디자이너로서 지금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그였지만, 그것과 디자인에 대한 고민은 별개의 문제였다.

어떤 분야든 그 이해도가 심화될수록, 오히려 그 본질에 대한 고찰은 더욱 깊어지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래. 건축이라 것은 본디, 주어진 제약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학문이지.’

브루노가 최근에 관심 갖던 건축의 양식은, 그 형식이 정해져 있지 않은 비정형 건축물이었다.

수십 년 건축을 하면서, 그의 디자인은 항상 비슷한 형식과 느낌을 가지게 되었고.

브루노는 그 고착화된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다 각도로 고민 중이었던 것이다.

좋게 말하면 그가 가진 건축디자인의 스타일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브루노는 거기에 안주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한 번 더 껍질을 깨고 나아가야, 그가 추구하는 건축의 진정한 이상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수십 년이 담긴 ‘틀’이라는 것은 쉽사리 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브루노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인간의 삶. 그것을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그릇이 바로 건축의 본질이며, 건축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건축양식이거늘…….’

건축은 인간이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수천 년 동안 진보해 왔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정형화된 건축의 틀.

그런데 브루노가 최근 고민 중인 것은, 그 틀을 깨고 나와 새로운 건축을 하는 것이었다.

건축디자인을 고민하면서, 건축이라는 학문의 목적성과는 정면으로 대비되는. 그런 역설(逆說)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사용자의 편리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게 과연 건축일 수 있을까?’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조형물과, 인간의 삶을 담아야 하는 건축물. 어쩌면 난, 그 경계 위에서……. 의미 없는 고민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브루노가 자신에게 던져놓은 이 숙제는, 벌써 몇 년째 쳇바퀴마냥 같은 논리 구조 안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것은 결코 쉽게 풀리지 않는, 모순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바로 오늘.

생각지도 못했던 자리에서.

브루노는 미제로 남아있던 자신의 숙제에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작은 힌트를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이제 갓 학부 1학년.

건축에 입문했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그런 ‘햇병아리’의 디자인 프레젠테이션을 보다가 말이다.

‘디자인 그 자체를 건축이 가진 제약 중 하나라고 생각하다니……. 아니, 그 전에 대체 왜 난 저 생각을 못 했던 걸까?’

목적으로서의 디자인이 아닌 수단으로서의 디자인.

단상 앞에 나와 있는 꼬마가 자신과 같은 고뇌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브루노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의 통찰력을 가진 이야기를 확신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만의 디자인 철학이 확고하게 자리 잡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까.

업계에서 수십 년을 굴러도 갖기 어려운 것을, 브루노는 저 1학년짜리 학부생에게서 본 것이다.

‘대체 어떤 경험을 해야 저 나이에 저런 통찰력이 나올 수 있는 걸까? 한국에선 대체 어떤 교육을……. 아니, 저 꼬마가 특별한 거겠지.’

협회장 로드리고의 전화를 받은 직후부터.

브루노의 기분은 오늘 아침까지도, 줄곧 불쾌한 상태였다.

서울시 디자인재단의 이사장이라는 사람과 약속을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심사위원으로 참석하긴 했지만.

최대한 빨리 심사를 마치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만 하며, 심사위원석에 앉은 것이다.

하지만 공모전에 출품된 작품들이 의외의 퀄리티를 보여줬고.

심사가 진행될수록 그의 기분은 조금씩 나아졌다.

그리고 이 최종심사단계의 마지막 발표가 시작된 이후.

브루노는 가지고 있던 모든 불쾌감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청탁 같은 하찮고 무가치한 대상에 감정 소모를 하고 있기에는, 저 어린 디자이너로부터 너무 큰 선물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래. 이제 디자인이라는 제약 위에서 어떤 건축을 고민했는지……. 그것을 내게 보여다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가운데, 브루노는 빨려 들어가듯 우진의 발표에 집중하였고.

그렇게 5분 정도가 지났을 즈음, 프레젠테이션 서론이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저희는 이런 형태의 파사드(Facade)를 디자인할 수 있었으며, 이 디자인의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 될 수 있도록 설계를 고민했습니다.”

“다소 파격적일 수 있는 유기적인 형태의 외관이 되었지만, 이 안에 요양원이 갖춰야 할 모든 가치가 최대한 아름답게 담길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우진의 말은 청산유수처럼 물 흐르듯 이어졌으며.

그와 동시에, 스크린의 화면에 커다란 도면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우진의 팀이 디자인한 요양원 건물의, 1층을 총망라하여 보여주는 평면도.

딸깍-

레이저 포인트로 그것을 가리킨 우진이 버튼을 한 번 더 누르자, 도면 위에 수많은 점선들과 실선들이 차례대로 떠오른다.

얼핏 보면 무척 복잡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하나의 큰 흐름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을 잠시 응시하던 브루노의 두 동공이,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설마, 동선(動線)을 표현한 건가?’

* * *

2월 말.

그러니까 O.T때 진행됐던, ‘디자인의 밤’ 이후로.

‘그것’이 우진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헤이, 우진. 작업하다 말고 갑자기 왜 멍한 표정인 거야?”

수없이 많은 얇고 굵은 황금빛 선들.

황금빛으로 프린팅된, 오직 우진의 눈에만 보이는 특별한 도면.

아니, 그것은 도면이라기보단, 숨겨진 공간을 보여주는 마법의 열쇠 같은 것이었다.

디자인의 밤에서 우진이 봤던 ‘골든 프린트’가 최적의 공간배열 솔루션을 보여주는 힌트였다면.

이번에 우진의 눈앞에 나타난 두 번째 ‘골든 프린트’는, 러프하게 디자인된 구획들 안에서 최적의 동선(Traffic Line)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슥슥-

우진이 외벽으로 그려뒀던 진한 선을 지우고 그 아웃라인을 수정할 때마다, 황금빛 물결은 계속해서 다른 모양을 보여주었다.

구조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사용자의 동선 흐름을, 그때그때 반영하여 눈앞에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 황금빛 선들이 동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우진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바로 알았던 것은 아니다.

우진은 거의 한 시간이 넘도록 이 현상에 대해 고민했고, 그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이번에 골든 프린트가 그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최적의 동선 구조임을 말이다.

‘대체 골든 프린트가 나타나는 조건은 뭘까?’

골든 프린트는 우진에게 있어, 일종의 ‘기적’이다.

그것이 모든 디자인과 설계를 책임져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가 해낼 수 있는 디자인의 한계치를 한 단계 이상 더 끌어 올려주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우진은, 원인조차 알 수 없는 이 현상에 의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이 기적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구조의 변화에 따라 트래픽 라인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건…….’

우진은 자신이 그린 도면 위에, 골든 프린트가 보여주는 동선을 그대로 베껴 그렸다.

그것이 다 그려지면 또 조금 바뀐 새로운 구조의 도면을 그렸고, 그에 따라 달라진 골든 프린트의 선들을 또다시 그려 올렸다.

‘이 황금빛 선들이 최대한 서로 부딪치지 않으면서, 유기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모양새가 되어야 해.’

최적의 동선이란, 최대한 짧고 간결해야 하며, 제각각 독립성을 가져야 한다.

때문에 우진은 황금빛 선이 그렇게 이상적인 그림을 그려낼 때까지, 미친 듯이 새로운 도면을 그리고 버리고를 반복하였다.

우진은 그날, 도면을 그리며 밤을 샜다.

‘그래. 이게 답이었어. 층간 공간배치만 생각하다가, 중요한 부분을 하나 놓치고 있었네.’

하여 작업실 창으로 아침햇살이 스며들 즈음.

결국 우진은, 만족스러울 만한 도면을 뽑아낼 수 있었다.

결과를 보여주는 골든 프린트를 이용해, ‘최적의 동선을 유도할 수 있는 최선의 공간구조’라는 답을 찾아낸 것이다.

우진의 마지막 도면이 완성되자, 허공에 빛나던 골든 프린트가 더욱 밝은 금빛을 뿜어내며 도면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마치 우진의 도면 안에 스며들기라도 하듯, 우진이 그려놓은 선을 따라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다.

그 광경을 본 우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디자인의 밤에서 골든 프린트를 마주하였을 때는, 보지 못했던 현상이었으니 말이다.

‘설마……. 그때는 골든 프린트가 의도했던 최적의 공간을 뽑아내지 못했던 건가?’

이 골든 프린트에 대한 어떤 설명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이 현상에 대한 원인을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진은 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방금 그의 생각이, 맞다는 사실을 말이다.

드르렁-

우진의 건너편 자리에서는 제이든이 코를 골며 자고 있었지만, 우진은 여기서 작업을 마무리할 생각이 없었다.

골든 프린트 덕에 생각지 못했던 답안을 도출해 낼 수 있었지만, 우진의 생각에 그것은 단지 기적의 힘을 빌린 치팅(Cheating)일 뿐.

여기서 만족하고 끝낸다면, 이 도면은 결코 우진의 것이 될 수 없었다.

‘순서가 좀 뒤바뀌긴 했지만……. 이제 역으로 분석을 해 봐야겠어.’

찾은 답을 가지고 거꾸로 짚어 나가며, 도면의 설계 과정을 역으로 분석한다.

이 작업을 통해 우진은, 골든 프린트를 통해 엿볼 수 있었던 도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평면설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지이잉-!

스크린의 화면을 연속으로 돌린 우진이, 좌중을 둘러보며 다시 자신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 여러분께 보여드린 도면들은, 구조의 변화에 따른 동선의 흐름을, 도식화해서 그린 작업물입니다.”

우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참관 중인 사람들의 표정은 가지각색이었다.

처음부터 이 그림이 사용자 동선을 나타냈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으니 말이다.

“저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가장 간결하고 독립적인 동선을 가질 수 있는 최적의 설계를 찾아냈으며…….”

딸깍-

스크린이 다음 화면으로 다시 넘어갔고, 그 위에는 3D로 그려진 아이소매트릭(Isometric)*[건축에서 클라이언트에게 구조를 한 눈에 보여주기 위해, 내부가 잘 보이도록 일정 높이 이상의 벽과 천정부를 들어낸 3D모델링 작업을 의미한다.]이 나타났다.

우진의 팀이 디자인한, 건축물의 모든 내부구조가 한눈에 드러나는 아이소매트릭.

“바로 이 아이소(ISO)에 그 설계가 담겨있습니다.”

우진은 그 공간들이 이렇게 구성된 이유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하였고, 청중들은 그 모든 이야기를 놓치고 싶지 않기라도 한 듯 우진의 발표에 집중하였다.

하여, 그렇게 모든 설명이 끝났을 때.

짝- 짝짝-

어디에선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작은 박수 소리를 시작으로.

발표장 전체에 진심 어린 박수갈채가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우진에게는 아직까지도, 해야 할 이야기가 하나 더 남아있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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